2017. 5. 16. 09:17ㆍFeature
[2017 올모스트 프린지 : 2일차 예술계 내 착취]
우리의 권리를 위하여 #예술계_내_착취
글_윤가현
#예술계_내_착취
나는 아르바이트 노동조합에서 자신의 권리를 외치는 알바노동자를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 <가현이들>을 작년 7월에 완성해서 작년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를 프리미어 상영(첫영화제 상영)을 시작으로, 지금은 공동체 상영회를 하며 번 돈과 작년에 청년 뉴딜 일자리를 하고 계약만료가 되어 실업급여를 받으며 살고 있다. 그리고 작년 2016년 3월부터 12월까지 9개월 동안 <인디다큐페스티발>이라는 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청년뉴딜 일자리에 지원하여 일했던 경험이 있다. 나는 짧으면 짧은 길다면 긴 시간동안 예술문화노동계의 착취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 원고를 쓰기 전 나는 ‘착취’의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았다.
착취
1. 계급사회에서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생산수단을 갖지 않은 직접 생산자로부터 그 노동의 성과를 무상으로 취득함. 또는 그런일.
2. 동물의 젖이나 식물의 즙을 꼭 누르거나 비틀어서 짜냄.
나에게서 의 ‘착취’는 아주 다르진 않지만 사전적 의미와 전혀 같지 않은 ‘착취’ 의 의미가 있다. 지금은 그것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다큐영화 <가현이들>(윤가현감독, 2016)의 한 장면, 출처_네이버영화
경제적 착취
영화를 제작하는 제작자의 입장에서
먹고사는 일은 늘 버겁고 힘들다. 여태까지 나는 아르바이트 노동만 8년동안 해왔다. 대부분의 “예술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직업이 적어도 3개이상이다. 알바노동자, 예술인, 작가 아무튼 이름도 불리기 마련이다. “직업”이라고 불리는 것이 먹고 살 수 있어야 직업이라고 할 때 내 직업은 감독이 아니다. 카메라를 들어도 카메라로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적고, 조각을 한다고 해서 조각으로 먹고살긴 어렵다. 그림을 그린다고해서 그림으로 먹고살기도 어렵다. 어떤 예술이든 자기 분야로 먹고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뻔한 이야기다. 그럼 다들 어떻게 먹고 살고 있는건가 하면 다 나같이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도 타고, 원하지 않는 편집도 하고, 찍고 싶지 않은 인물들을 찍으며 자신의 경제적 정체성 없이 살고 있다.
내 영화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람들은 내가 감독이라며 멋있다고 하지만 나는 편집할 컴퓨터 한 대, 촬영할 카메라 한 대도 없다.” 찬란하고 거대한 ‘감독’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위로를 받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영화의 가장 큰 투자자이자, 가장 최다 <가현이들>의 관객이며, 배급사이며, 만든이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현이들>을 많은 영화제에 상영 할 수 있었고, 지금은 상영료도 적게나마 받으며 굶지 않을정도로 살고있긴 하니까. 하지만 나를 제외한 감독님들은 공동체 상영은 물론이고, 영화제에 틀어 본 적 없는 영화를 안고 계속 영화를 만들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 대체 이 영화계 내에서 감독의 경제력은 어쩔 수 없는 제로인가 생각한다. (다른 예술인들도 마찬가지.)
자기 스스로를 ‘문화예술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이는 누가 있을까 싶다. 당연히 노동을하면 댓가를 받아야하는데, 문화예술 노동을 해도 (정당한)댓가를 받지 못하니 자기 스스로의 정체를 문화예술노동자 또는 예술창작 노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도 의문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창작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대학생에게 EBS 외주 제작자가 일급 5만원을 주면서 “차비와 식비 정도로 생각하고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하며 제안한 조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1. 스스로 셀프 카메라를 찍을 것(또는 타 대학생의 일상이여도 상관없음), 2. 편집하여 5분내로 만들 것’ 이었다. 나는 그 제작사 PD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했다. “방송국에 PD라고 하시는 분이 이렇게 적은 돈으로, 앞으로 방송국에서 일하고 싶은 학생들한테 ‘방영해 줄테니, 일급으로 5만원을 주겠다’고 하시다니요. 너무한거 아닌가요?” 기가 찬 대답이 돌아왔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업은 생계를 위해서 돈을 벌려고 작업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런 걸 하는 것을 좋아하고 만들고 싶은 사람에게 일부러 맡긴 거였어요.”라고 그래서 5만원을 차비정도로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더 이야기 할 필요를 못 느끼고 전화를 끊었지만 끝내 찜찜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안하면 누군가는 그 돈을 받고 그 작업을 분명할 것임을 알기에. 촬영을 나가는 데에 1회차에 10만원이하 받고 나가는 것을 하지 않기로 카메라를 든 사람들끼리 협정이라도 맺어야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아무도 가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거절하더라도 누군가는 예술창작 노동에서 착취를 당해야만 한다는 것이 너무 속상할 뿐이다. 이 이야기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방송내에서, 영화내에서의 착취는 너무나 익히 알고 있다. 계약서를 쓰지 않고, 또는 계약서 내로 지급을 이행하지 않아 이 판을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예술창작 노동을 하는 노동자라고 스스로를 정체성을 세우는 것, 그 안에서 권리를 이야기하고, 예술 창작 노동권을 상상하고 고민하는 것이 이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 아닌가 싶다.
예술가들의 경제적인 문제는 여러모로 많이 거론되었다. 고(故) 최고은 작가는 챙길 끼니도 없어 쌀과 김치를 구걸해야했다. 이미 작가의 죽음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지만, 정작 제대로 해결하려는 방안은 늘 부족하기만 하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을 하고, 그 댓가가 정당하지 못할 때 내가 당하면 열받는 일로, 남이 당하면 공감할 일로만 치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생각해보면 그 대안으로 예술가들은 <한국 예술인 복지재단>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복지”라고 불리는 것이 얼마나 찌질한가. 가장 반겼던 ‘예술인 창작금지원’은 2년에 1회 300만원, ‘예술인 퍼실리테이터’는 1년에 1회. 어쨌든 없는 것 보다 낫다고 하지만 중복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괴롭다. 이것에 지원하면 이것에 지원을 못하고, 이것에 지원하면 이것에는 지원을 할 수 없는 이상한 선별적인 구조의 지원제도가 아쉽고 야속할 뿐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있어도 안하고 할 수 없는 것. 나는 여기서 조금 더 상상해보고 싶다. 예술인복지재단이 할 수 있는 사업이 무엇이 있을지. 예술가들이 받을 수 있는 복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지. 지금 존재하는 복지재단의 사업의 확장 말고도 경제적으로 착취당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을 상상해볼 때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홈페이지, 표준계약서 보급을 위한 안내(kawf.kr)
사회적 착취
영화제를 기획하는 기획자 입장에서
사회적 착취라는 문제를 떠올리면 상상하기 어렵다. 일단 우리가 영화제에 갔다고 가정해보자. 영화관이 있고, 영화가 있고, 영화감독이 있고, 영화배우가 있고, 영화제부스에서 굿즈를 판매하기도하고, 영화제에서 표를 제공하고 안내를 해주는 자원활동가들이 있다. 자원활동가들 뒤에는 일상적으로 영화제에서 일을 하는 영화제 활동가들이 있다. 내가 이야기한것들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영화제는 진행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마주하는 것들 중 가장 보이지 않는 존재인 자원활동가와 영화제 활동가들이 있다. 나는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들을 반성했다. 가장 크게 반성한 것 중 하나는 제작자가 기획자들을 착취하는 것을 확인할 때였다.
영화판이든, 영화제를 만드는 판이든 공통적으로 비슷한 것이 있다. 바로 운동권 같은 기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독립’으로 시작되는 곳이면 그 기질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자본의 틀에서 벗어난 ‘독립’, 정치적으로 ‘독립’, 어떤것에서 독립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가난하기도 하고 고집이 세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단순한 구조를 넘어서서 지향하는 것을 실천하냐 마냐의 문제도 포함이 된다. 예를들어 여태까지 일구어온 이 독립영화의 판, 영화제 안의 판에서 우리의 선배세대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욱 괴롭고 힘들게 자신의 권리를 외쳐왔고, 연대했고, 자신의 신념을 아등바등 지켜오며 현재까지 이 땅을 일구어오며 살아남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우리도 그렇게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영화제의 상영 일정은 영화를 많이 보러 올 수 있는 시간대인 직장인들의 저녁, 주말이다. 보편적으로 남들이 쉴 때 일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환경이다.
하지만 남들 쉴 때 늘 우리를 웃으면 반겨주는 이들은 우리가 쉴 때에도 일하고 일할 때에도 일한다는 것이 문제다. 얼마 전 영화제 뒤풀이에서 “영화제가 하지 않는 기간에도 영화제에서 사람이 일해요?”라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네 일해요. 그래야 감독님의 상영본도 받고, 계획도 하고 회계업무도하고, 정기상영회도 있고 감독님의 영화를 더 많이 보게 하기 위한 연대사업부터, 감독님의 영화를 궁금해하는 사람들한테 오는 연락을 받는 것까지 아주 자잘하고 많은 일을 합니다요.”라고 설명했다. 자원 활동가들은 어떨까? 독립영화를 사랑하고, 독립영화제를 지키는 것에 중요하다고 느끼는 활동가들은 가장 늦게까지 일을 하고 가장 일찍 출근하여 영화제를 준비한다. 우리는 이들에게 ‘자원 활동가’라는 이름을 붙여주지만 어쩌면 더 다른 좋은 대안이 있지 않을까? 끼니를 겨우 때우며 영화제때 웃음을 보이는 이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관심이 있었을까? 사람들은 이것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을까? 영화제를 만드는, 기획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에서부터, 당연히 불가피 한 환경속에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이것 자체로부터 우리는 사회적으로 영화제 스텝들에게 착취를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문화예술 기획자, 현장 실무자인 스텝들을 우리는 잊고 있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한다.
나는 일하는 스텝들을 보면서 늘 반성했다. 어쩌면 영화제 일이라고 하는 것이 시민단체와 그냥 일반 사무직 사이에서 길을 헤매고 있기에 그런 것 일지도 모른다. 마치 노동조합의 일이 그러하듯. (노동자인 듯 노동자 아닌 노동자 같은 너. 활동가인지 노동자인지 그 사이에 있는 너.) 내가 위에서 이야기한 ‘선배들이 살아남았다’에서 정확하게 ‘살아남았다’는 워딩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선배들처럼 살아남을 수 있는 아주 ‘단단한 신념’과, 신념으로 없던 힘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체력’, 열정 페이라고 하면 혼날 것 같은 ‘낮은 임금’과 ‘업무환경’에 우리는 당연시 되지 않아야한다. 당연히 우리의 선배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고 노력할 것이다. 살아남지 않아도 지속할 수 있는 행복한 일, 누구나 할 수 있는 넓은 곳. 일에 치여 허덕이지 않고, 신념에 구애받지 않고, 절실함을 드러내지 않고, 영화를 좋아해서 시작한 곳에서 영화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행복이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존재해야한다.
내가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애석하게도 ‘우리가 있는 곳이 이렇게나 가장자리랍니다. 하하’ 할 수 있는 것 뿐이지만 ‘우리’를 넓히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인디다큐페스티발 포럼2 “두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 포럼 안내문
스스로의 자존감 착취
우리의 권리를 위하여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독립영화 판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이지만 나는 사실 영화판 말고도 미술, 음악, 글 등등 예술의 전반의 이야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림을 그리는 미술가와 그림을 이야기하는 큐레이터, 음악을 만드는 음악가와 음악을 배급하는 제작사와 기획사, 글을 쓰는 소설가와 시인들 그리고 그것을 출판하는 출판사. 연기를 하는 연기자와 기획사 등 여러모로 예술 전반의 이야기를 짝지어 연결해도 우리는 모든 것을 비슷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다.
원고를 준비하면서 어쩌면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운이 좋은” 창작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예술가인지 아닌지를 검열하고 정체성을 왔다갔다하는 지망생, 창작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이마저의 발언권도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나는 인디다큐페스티발과, 영화진흥위원회, 두 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이하 두영찍) 기획단이 함께 공동주최한 <두 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라는 포럼을 제안하고 준비하여 성황리에 마친 경험이 있다. 다큐멘터리영화판에 신진여성감독이라 불리는 여성 감독님들과 함께 ‘#영화계_내_성폭력’을 바탕으로 다섯가지의 섹션으로 주제를 정하여 현재 영화판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자리였다. 그 다섯가지 섹션중에서 남순아감독의 <감독은 언제부터 감독이 되는가>라는 발제문에서 첫 문단을 인용해보려 한다.
“영화감독은 언제부터 감독이 되는가?
이번 포럼을 준비하면서 나는 제목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영화를 완성해야 감독이 되는지,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으면 이미 감독인지, 장편을 만들어야 감독이 되는지,
단편을 만들어도 감독인지, 영화제에서 상영해야 감독이 되는지, 상영하지 않아도 감독인지.
이런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어떤 감독들은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어리거나, 여성이거나, 경험이 적다는 이유로 독립 다큐멘터리 씬에서 감독으로서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의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착취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가장 큰 구도로 예술계 내에서 스스로의 검열과 착취를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도 착취를 가장 많이 당하는 사람이다. 여성, 학생, 지망생, 비전문직이라고 분리하고 배제하기 시작한 이 것들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착취를 당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착취하는 지경까지 이르고 만다. ‘이판은 남성이 대세이니까 여성인 나는 어쩔 수 없어’, ‘나는 전문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나는 이 일을 계속 할 것이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대우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라는 말을 우리 스스로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 정도의 싸구려 대우나 그 정도의 환경에서 이 정도는 낫다며 위로하고 위안하는 것 자체가 내가 이야기하는 스스로에 대한 착취의 시작이다.
“계급사회에서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생산수단을 갖지 않은 직접 생산자로부터
그 노동의 성과를 무상으로 취득함.”
밑줄 친 아래의 대상은 나이고, 또 나이다. 어쩌면 위에 이야기했던 경제적 착취와 사회적 착취는 우리가 우리를 스스로 옥죄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사회에서 “예술”이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다. 누군가는 예술에 대해 관대하고, 누군가는 예술에 대해 협소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예술의 가치”에 대해서도 제각각 다르다. 누군가는 예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누군가는 예술의 가치에 대해 터부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때야 할까? 나는 개인적으로 예술의 기준은 넓고, 예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되, 예술의 자리는 낮추어야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창작을 하는 예술가, 창작을 배급하고 독려하고, 기회를 제공하는 곳까지, 또 예술을 소비하는 사람까지 모두 예술인으로 보아야 한다. 또 동시에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은 창작 노동자로 불리며 우리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요구할 수 있어야한다. 아까 이야기했던 ‘우리’를 넓히는 일이야 말로 스스로의 착취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이다. 덧붙여 사람들의 제각각 적인 시각 안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나’다. 우리 자신을 잘 지켜야만 예술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 ‘너만 그렇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야’가 나왔을 때 나오는 그 힘으로 절망하고 스스로 배제할 것이 아니라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해야 한다.
착취는 좁고 고립된 환경 속에서 더욱 악화된다. 누군가 그랬다. 예술은 외롭고 고 된 길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예술은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힘,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가졌고, 그 힘은 ‘진정하게’ 고되고 외로운 예술가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어쩌면 그 예술가가 더 즐거운 환경에서, 좋은 환경에서 작업을 했더라면 그 힘은 배의 시너지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력이야 말로 스스로의 착취, 사회적, 경제적으로의 착취에서 벗어 날수 있는 시작이 될 것 같다.
나는 글을 써도, 영화를 찍어도 직업은 “백수”이다. 나는 이 직업이 참으로 좋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것을 보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사실 직업이라는 말이 뭐 그리 중요한가 싶다. 세상은 무엇인가를 아주 단순화시키고, 규정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 맞서 규정화 된 것들을 해체하고 재 정의하고, 재설명하고, 재분배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나는 “백수”도 나쁘지 않지만, 그래서 내 직업을 설명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며 필요한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 되었다. 이 사회에서 “착취”라는 단어가 너무 익숙해졌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착취”라는 단어를 다시 이야기해본적은 없었다. 사람들이 쓰는 단어를 다시 차용해서 우리의 “착취”라는 단어를 만들고, 더 중요한 우리의 해결방안을 찾아야한다. 그 단어를 만드는 일과 해결방안의 시작은 지금부터함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싶다.
▲올모스트 프린지, 두 번째날 #예술계내 착취, #예술계내 차별
*본 원고는 ‘2017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포럼 <올모스트 프린지> 2일차 ‘차별과 착취’ 세션에서 발제를 위해 준비했던 글입니다.
필자_윤가현
소개_<가현이들>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고, 두 번째 영화를 찍기위해 이것저것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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