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8. 09:11ㆍFeature
[2017 올모스트 프린지 : 2일차 예술계 내 차별]
모두 알았지만 아무도 몰랐던, 몰라야 했던...
#연극계_내_성폭력
글_임성현
살면서 여러 집단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위계 폭력과 성차별이 가장 심각한 집단을 꼽으라면, 두 군데가 떠오른다. 교회와 연극계. 그곳에 있으면, 여러 마음이 교차한다. 가해자를 가해자라고 부르지 못하는 유사-홍길동의 복잡한 심경을 느낀다. “저 사람이 그 남자다, 저 남자가 그 파렴치한 성폭력 가해자다, 라고 왜 말을 못하(게 하)냐고!”라며 박신양처럼 따지고 싶을 때도 많다. 차별과 폭력이 심하다는 걸 모두 알고 있지만, 아무도 모르는, 아는 척해선 안 되는, 몰라야 하는 곳.
Intro: 교회와 연극계,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지독히 가부장적이고, 여성혐오가 마음껏 창궐하는데도, 그것이 아름답게 (혹은 그런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청정지대로) 포장되는 공동체. 교회와 연극계. 둘 사이엔 공통점이 많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부장 질서를 가졌으며,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순종은 미덕이자 전부다. 물론 그들이 밖에 꽂은 깃발과 십자가는 찬란한 이상과 환한 진리를 향해 있다.
그런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 두 집단은 현실과 당위(이상)의 관계를 정반대로 바라본다. 교회부터 얘기해보자. 교회는 현실을 당위로 덮어버린다. 이해를 돕기 위해 쓴 다음 장면을 한번 보자.
K 집사: (다급하게) 목사님, 목사님!
J 목사: 네 집사님.
K 집사: 아이고, 이걸 어떡합니까.
J 목사: (물을 건네며) 집사님, 숨 좀 돌리시지요.
K 집사: ...감사합니다.
K 집사, 물을 받아 마신다
J 목사: 왜 그러십니까?
K 집사: 아니 글쎄... 이걸 어떡합니까 목사님. 우리 교회에서 성폭력 사건이...
J 목사: 네?!
K 집사: L 장로가 성폭력을 저질렀답니다.
J 목사: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지요!
K 집사: 네, 안 되지요. 그런데 글쎄 L 장로가 P 집사를 성폭-
J 목사: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K 집사: 네, 압니다. 그런 일은
J 목사: (듣기 싫다는 듯이) 안 됩니다. 우리 교회에선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K 집사: 그렇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
J 목사: (단호하게) 그만하시죠. 기도하겠습니다.
K 집사: ....!?!?
성폭력 사건이 벌어진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성폭력이 일어난 ‘현실’을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당위’로 묻어버린다. ‘당위’를 앞세워 ‘현실’을 은폐한다.
교회는 현실을 당위로 덮어버린다. (그래픽: 이서연)
연극계는 반대로 당위가 현실에 압도당한다. 예술은 본래 이상과 가치를 추구한다. 이상과 가치는 당위의 영역이다. 그래서 얼핏 연극도 ‘당위’가 지배할 것 같아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연극계에선 ‘현실’이 모든 상황을 종료시킨다.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연극 공동체의 강자들(연출, 선배, 남성 등)은 주로 이런 대사로 응답하신다. “그런 식으로 트집 잡으면 현장에서 작업하기 어려워”, “그런 사소한 일들까지 챙기면 현실적으로 공연 올리기 쉽지 않아”, “너 그렇게 이 바닥에서 밉보이면 앞으로 너의 현실은 막막해질 거야” 등. 다른 문제보다도 유독 젠더 문제에서 현실적인 태도가 강경해진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관점은 다르지만, 결국 연극계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현실과 당위를 분간하지 못해 오류를 범한다. 교회건 연극계건,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현실과 당위를 나눠 면밀히 살펴야 한다. 현재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무엇이 문제인지, 해결 방안은 있는지, 이런 현실에서 추구할 가치는 무엇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연극계에선 ‘현실’이 모든 상황을 종료시킨다. (그래픽: 이서연)
현실 진단: 연극 현장에서 벌어지는 성차별
연극계의 성차별은 작품 내용 외적/내적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내용 외적인 차별 즉, 제작 과정에서 벌어지는 차별부터 살펴보자. 가벼우면서도(?), 손쉽고(!), 익숙하게(?!) 접할 수 있는 사례가 ‘언어 성폭력’이다. 외모 품평이 대표적이다. “너는 배우를 하기엔 얼굴이 XX하고, 여배우라면 몸매가 OO해야 하며, 그 역할을 맡기엔 네 얼굴과 몸매가 OXOX하기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이런 아무말들을 마음껏 늘어놓는다. 그리고선 “배우는 본래 보여주는 역할이니 어쩔 수 없다”고 꾸지람을 놓으면서 상황을 제멋대로 종결한다.
언어 성폭력은 십중팔구 성적인 농담을 빙자한다. ‘농담이라는 가면’은 그것이 성폭력이라고 지적받았을 때 ‘장난’이라고 변명할 출구 전략을 제공한다. 피해자에게 화살을 돌리는 구실도 마련해준다. 피해자를 농담조차 못 하게 만드는, 연습 분위기를 망치는 주범으로 만들면서 말이다. 희롱당한 것도 분한데, 훈계까지 듣는 사태가 발생한다. 훈계와 희롱의 대상은 특정 성별에 몰려있다. 외모 지적, 성적 대상화, 훈계의 목표물은 대부분 여성과 성소수자의 몫이다.
농담이라는 가면을 쓴 언어폭력. 당신들의 농담이 전혀 웃기지도 않다는 것만 알고 계시라.
(그래픽: 이서연)
농담이라는 가면을 썼던 언어폭력이 연습에 돌입하면 ‘연출’ 또는 ‘상대 연기’라는 탈을 쓴다. 이는 몸을 표적으로 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신체 접촉과 물리적 폭력으로 나아간다. 여기서도 가해자는 빠져나갈 구멍을 듬성듬성 만들어 놓는다. “어디까지나 연출이었으며”, “연기에 몰입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으므로”, “그 정도는 네가 이해를 해야 한다”는 식의 아무말이 가해자의 곁을 보우하신다. 그뿐이랴. 연습이 끝나면 술자리에서, 단톡방에서, 심지어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도 성폭력은 성실히 일어난다.
작품 내용 안에서도 성차별은 무궁무진하다. 인물, 서사, 주제 등 연극의 요소들을 망라하면서 차별한다. 대부분 주인공은 남성이며, 여성 인물은 조력자 내지는 장식품으로 묘사된다. 이런 인물들이 만나니 ‘고생은 여성이 하는데, 성장은 남자가 대신하는’ 괴상한 서사가 탄생한다. 때로는 어떤 남성 캐릭터가 폭력을 잘 저지르나 경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은 너무나도 쉽게 정당화된다. 여성은 폭력을 당했어도 서사의 완성을 위해 용서와 희생으로 헌신하며, 남성은 그 과정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는다.
문제는 이런 내용들이 연극계에 주류를 이룬다는 것이다. 소위 ‘잘 나가는’ 극작가, ‘연극계를 주름 쥔’ 연출가들이 앞장서서 이러한 이야기를 떳떳하게 선보인다. 연극계의 작품상, 희곡상 역시 그들의 몫이다. 모든 연극(인)이 남성중심적이진 않지만, 주류가 되려면 일단 마초가 되는 게 안전할(?) 것만 같다.
남/여를 벗어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이성애 중심적인 시선에서 일어나는 차별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고전 텍스트부터 현대 유명 작품에서까지 퀴어의 존재는 매우 희미하다. 마치 세상에 없는 존재로 느껴진다. 연극 드라마 속 세계는 이성애를 대전제로 두기 때문이다. 주류 텍스트에서 퀴어(퀴어함)를 찾는 것은 일베에서 페미니즘 찾기만큼 어렵다. 간혹 퀴어 인물이 등장하더라도, 그는 사람의 모습이 아닌 해괴한 존재로 묘사된다. 퀴어는 대개 조롱의 대상이자 웃음의 수단이다. 연극에서 퀴어를 바라보는 시선엔 그를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혐오로 가득하다.
원인 분석: 연극계는 왜 이 모양일까?
왜 예술을 한다는 집단, 그것도 공동체를 신성하게 여기는 연극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우선 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고등 교육기관의 연극 전공 교육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처참하리만큼 폭력적이다. 엄격하다 못해 쪼잔하기까지 한 선후배 문화는 군사 독재 시절을 방불케 한다. 때문에 연극 전공 학생들 사이에선 남성중심적인 제도와 권위주의적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것이 수년간 학습되어 고스란히 연극계로 전염된다.
‘성적 자유’에 대한 오해도 한몫한다. 예술은 금기에 의문을 품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흔히 ‘성적 자유’를 예술 정신과 직결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되다 보니, 성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성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을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투쟁이자 금기에서 벗어나는 해방으로 자랑스레 여기는 모양이다.
그러나 모든 자유가 해방이나 진리에 도달하는 통로는 아니다. 그 자유는 일부 세력만 누리는 사치재다. 성차별 구조의 기득권 세력만 향유하는 조각 난 해방이다. 일부 세력이 공유하는 ‘성 담론 판타지’로 인해 누군가는 억압을 받는다. 억압을 낳는 자유, 이게 정녕 그들이 추구하는 자유이자 예술혼인가?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이 모든 폭력을 정당화하는 그놈의 ‘예술 정신’(예술이라면 자고로~), ‘프로페셔널리즘’(프로답지 못하게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공동체주의’(우리가 남이가?) 등의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 카드만 꺼내면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 따라서 흔한 ‘성폭력 소동’이 한바탕 벌어진 뒤 연극계에 살아남는 건 가해자다. 피해자의 존재는 감춰진다.
이것이 연극계의 현실이다.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그놈의 ‘예술정신’, ‘프로페셔널리즘’, ‘공동체주의’ (그래픽: 이서연)
다시 당위로: 우리의 연극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나?
현실을 짚었으니 이제 당위로 돌아오자. 우리의 연극은 이 처참한 현실에서 무엇을 말해야 할까?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급진 페미니즘 운동의 유명한 구호다. 여성, 성소수자의 몫과 목소리는 항상 ‘개인적’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에서 제외됐다.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나중에’ 처리해도 되는 이야기로 여겨졌다. 남성은 사적/공적 영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데, ‘나머지’는 사적 감옥에 가둬진다. 그들의 몫은 공적으로, 정치적으로 주장할 수 없었다.
이 부분에서 프랑스 사상가 자크 랑시에르의 논의를 끌어와 보자. 랑시에르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과 ‘예술’은 불가분하다. 예술은 곧 정치적인 것이며, 정치적인 것이야말로 예술(미학)이다. 그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예술)은 지배 질서에 모순과 불일치를 기입함으로써, 민주적 불화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기존에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도록 하고, 소란스럽게 여겨졌던 소음을 한 주체의 목소리로 들리게 한다.
위의 급진 페미니즘 구호와 랑시에르의 주장을 연결하면, 가장 사소하게 여겨진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가장 예술과 가까운 셈이 된다. 연극계의 과제와 존재 근거는 이 지점에 있다. 가장 소외된 존재, 차별과 억압의 대상의 목소리를 우리 연극이 귀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사회에 들리도록 해야 한다. 소외된 소수자를 무대 위로 모셔와 그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만드는 것, 그것이 차별과 폭력으로 점철된 연극이 진정한 예술로 거듭나기 위한 방책이다. 바로 그 중심에 젠더 이슈가 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고 말하며 글을 마치겠...
+잠깐만요: 남자들은 뭘 할 수 있나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건가요?
사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남자들은 지금까지 너무 많은 걸 했다. 굳이 안 해도 될 말, 행동, 폭력을 저지르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도 하고 싶다는 남성분들께는 추천할 일이 상당히 많다. 너무 많아서 문제다.
우선, ‘하지 않음’으로써 행동할 것을 권한다. 무대 연출에선 ‘빈 무대’로도 큰 연출 효과를 낸다. 배우는 대사 없이 가만히 있는 연기로도 큰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 한발 물러서서 참견하지 않는 것으로도 큰 변화를 이끌 수 있다. 이전까지 남자들은 늘 나서기만 했다. 잠시 멈춰보자. 발언권을 내려놓고 듣는 이의 입장에 서보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기존의 행동과 ‘정반대로 실천하기’도 좋은 지침이다. 예컨대 여태 말하던 사람은 이제는 들으면 된다. 성적인 농담을 즐겨 하던 사람은 안 하면 되고, 성적인 농담을 들으면서 웃었던 사람은 정색하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바로 “미안하다고 하기”, “죄송하다고 하기”, “잘못했다고 하기”. 대부분 남성이 잘 못 하는 것이 바로 사과하기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문제를 반성하고, 같은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잘못했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사과의 완성은 책임지는 것이다.
너무 어려운가? 맞다. 쉽지는 않다. 그러니 너무 큰일부터 하려고 욕심내지 말자. 수십 년 동안 체내에 쌓인 ‘남성성’이라는 독소부터 제거하자. 디톡스부터 차근차근해야 탈이 안 난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으며 옆 사람의 손을 잡자. 우리 옆엔 사람이 있다. 여성뿐만 아니라,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인터섹슈얼, 에이섹슈얼 등 수많은 퀴어들도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는 점에서 같은 존재다. 모두의 손을 꼬옥 붙들자. 모든 존재를 사랑하기, 그것이 연극의 본연이자 숭고한 예술 정신 아닐까?
“만약 남성들이 섹스를 갈망하는 것만큼 사랑에 대해서도 그렇게 갈망하도록 교육 받는다면, 우리 문화는 혁명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벨 훅스 저, 이영기 역, 『All about Love』, 책읽는수요일, 2012, 224p
아멘.
*본 글은 ‘2017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올모스트 프린지> ‘우리는 우리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합니까?’ 세션에서 발제한 내용을 바탕으로 쓰였다.
**본문엔 글쓴이가 직접 겪지 않은, 간접 경험한 내용이 많다. 글쓴이가 제 3자로서 지켜본 사례나, 동료 연극인들이 겪은 경험담, 그리고 연극계에 지속해서 출몰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썼다는 점을 밝힌다. 본 글보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취재와 연구가 이뤄지길 바라 마지않는다. 그것이 구체적인 제도 확립과 문제 해결로 이어지길 바란다.
▲<올모스트 프린지> 현장 사진 (출처: 서울프린지페스티벌)
필자_임성현 소개_연극 보고/만들면서/공부/하는 사람.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 한남이자 죄인. 글쓴이 역시 성차별 구조의 수혜자이자 적폐 세력이기에, 동일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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