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발코니를 넘어설 수 있을까 - 프로젝트414 <발코니>

2018. 10. 6. 11:24Review


발코니를 넘어설 수 있을까.

프로젝트414 <발코니>


글_유혜영

 

극장을 나서며, 무엇보다 무대에 선 저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했다. 배우들은 확실히 무대를 즐기고 있었다. 사실, 복잡한 미사여구와 아포리즘, 그 장황한 말들에 묻혀버린 인물들의 캐릭터, 배우들의 다소 평면적인 연기는 공연 초반 집중을 흐리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능가하는 감동으로 객석에 전달된 것은 배우 자신들이 하고 있는 ’(연극의 대사이기도 하고, 실재적 신념이기도 한)에 대한 확신, 역할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것은 강렬한 에너지로 객석과 눈을 마주했다. 배우들은 대본에 주어진 캐릭터를 재현한다기보다는, 이미 분석하고 개념화한 현실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앞 다투어 설명하고자 하는 연설가들 같았다. 이들은 객석을 향해 소리치고, 은밀히 속삭였으며, 그들의 신념을 연기해냈다.

 


 프로젝트414’는 인문학과 미술 및 음악, 무용을 전공한 구성원들이 모여 만든 연극집단이며, 알랭 바디우의 저서를 통해 장 주네의 <발코니>를 만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직접 겪은 일에서 영감을 얻었다 말하는 여타 예술집단과는 다른 접근이다. 극단적으로 벌거벗은 주네의 현실 묘사가 오히려 추상적인 기호의 난장으로 읽혔던 것일까. <발코니>를 현재적으로 읽어내는 관점 또한 많은 부분에서 알랭 바디우를 참고했고, 발표 당시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고발을 당하기까지 했던 희곡의 선정적인 대사와 지문들은 다소 수정된 듯했다. 그렇게 모으고 정리된 이들의 생각이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고자 했다. 예술은 현실을 모방하고, 철학은 현실을 설명하며, 예술은 철학이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가장 늦은 걸음으로 현실을 뒤쫓는 것이 철학이다. 그러나 본 공연이 그랬듯이, 철학은 전혀 다른 감각으로 우리가 현실을 상기하게 하는 도구이자, 다른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자산이다. 그래서였을까, 공연이 끝나고 집에 가는 내내 나는 마치 철학자가 된 듯, 무대에서 본 이미지들과 그것의 실체와 지금 내가 살아가는 현실을 대입하고 있었다.


 

가장 문제적인 것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인물의 태도와 선택, 사건의 흐름에 있어 희곡의 내용을 충실히 따라가던 공연은 이르마의 마지막 대사까지 마친 후, 또 하나의 장면을 잇는다. 살색의 수영복 또는 속옷만을 남겨놓고 모든 의상을 벗어 던진 배우 전원이 등장하여 춤을 추는 장면이다. 갑자기 옷과 역할을 벗어던진 배우들의 움직임은 등장과 더불어 급히 격렬해지고, 어떤 질서나 공통된 동작 없이 무작위의 막춤이 한동안 이어진다. 공연의 끝에서 밝은 표정으로 에너지를 분출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해방이었다. 장 주네의 <발코니>에서 옷을 입는 것은 역할을 입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욕망하고 있는 어떤 것의 이미지를 입는 것이며, 이미지를 입을 때, 배역은 정해지고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있다. 실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수를 놓고 있다는 여왕의 이미지가 실재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경찰서장은 급기야 모두가 열광할 권력 이미지의 최고봉인 거대한 남근을 세워 본인의 것으로 삼고자 한다. 주네는 작품을 통해 이러한 이미지의 승리를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배우들이 옷을 벗는 행위, 벌거벗은 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말로 역할을 끝낸 것에 대한 해방이었을까? 아니면, 극 초반 이르마의 유곽에서 무력하게 징징대며 역할 놀이를 졸라댔던 사람들의 실체가 결국 너와 나였음에 대한 자조일까? 어쩌면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으로서 아직 어떠한 역할도 입지 못한 경계의 생명을 의미한 것일까?... 나는 그것이 다른 의미의 순순한 욕망들이기를 바랐다. 이미지로 대체되지 않은 욕망이자 열망의 실재로서 남근에 대항하는 또 다른 힘의 발로이기를 바랐다. 이미지화되지 않는 자격으로서, 누군가의 복종이 아닌 인정으로 공존하는. 그런 욕망일 수 있을까.

 


오늘날은 민주주의자라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감상적인 의무감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를 파괴하는 맹렬하고 벌거벗은 권력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뒤집어쓰자마자 모두의 인정을 받고 심지어 사랑받게 됩니다. 마치 경찰서장이 발기된 성기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모두의 욕망을 희망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의무감이나 사랑을 조리 있게 다뤄야 합니다. 일단 우리의 영혼에서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떼어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결론은 매우 암울할 것이고, 현재는 조만간 최악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 알랭바디우, 오늘의 포르노그래피, 알랭바디우 저, 강현주 역, 북노마드, 2015, 35-36p

 

알랭 바디우는 오늘의 남근민주주의라고 했다. 최근 한국 현대 연극사 수업에서 연출가 오태석과 이윤택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에 대한 거부 반응이 심해 수업 진행이 어려워지고, 두 연출가의 작품 관련 발언 일체가 공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제지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연극계 남성 권력을 고발하고, 모두가 평등한 작업 문화를 만들고자 투쟁하는 한 켠에서, 페미니즘은 남성에 분노하는 여성의 이미지로 대체되어 역사를 삭제하고 편집하는 권력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아닌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오히려 양성 간의 혐오를 부추기고, 성구별을 극대화하며, 치우침에 치우침으로 맞서겠다는 선동적인 주장으로 동지을 가려내는 폭력으로 대체되는 것을 나는 객석에서, 그리고 모니터 앞에서 지켜보기도 한다. 문화계 검열 사태라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을 때도 표현의 자유가 특정 예술가만의 것으로 권력화되었을 때, 현장에 있던 무고한 기획자와 제작자, 때로는 동료 예술가들마저 갑질과 검열의 낙인을 두려워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목소리를 삼켰다. 성스러운 민주주의 권력의 이름 앞에 무작위로 지목당한 채 가만히 돌을 맞은 것은 표현의 자유가 있는 또 다른 주체들이었다. 민주사회에서 정당하게 일어난 인정 욕구와 그를 위한 투쟁의 현장으로부터 나는 오히려 가장 절망적인 이미지들을 떠올려야 했다. 이것이 바로 주네의 결말이었다.


 

그러나, 공연에서 그 결말은 새로운 결말로 전복된다. 아무 이미지도 걸치지 않은 에너지 자체. 하나의 동작으로 집단화되지 않고, 그저 각자만의 존재로 그 시간을 누리고, 응시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발코니 아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선정적 이미지에서 벗어난다. 그들은 여성도 아니고, 배우도 아니고, 그 어떤 매혹적인 이데올로기도 입지 않은 한 개인으로서, 몸으로서 삶을 욕망한다. 그들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있었다. 우리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욕망하지 않을 수 없고 투쟁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서 나는 나의 욕망이 순수하고 무력한 실제로서만 추구되기를, 누군가의 욕망에 복종하거나 누군가에 의해 소비됨으로써가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는 의지로서 인정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래서 더욱 자유롭게 같이 살고, 또 말할 수 있기를. 그럴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라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사진제공_프로젝트414

*프로젝트 414 SNS페이지 바로가기 >>> https://www.facebook.com/project414/ 



 

 필자_유혜영

 소개_다 똑같은거 아는데, 별거 없을거 아는데, 그래도 혹시나해서, 괜히 기대하고 그래요.            아직 안 끝났으니까.

 


Production

공동창작

 

출연

곽하은(여자, 노예 , 칙사 역)

권선형(이르마 역)

박세리(판사 역)

성산희(주교 역)

유민수(까르멘 역)

이승하(장군 역)

이여원(젊은여자, 사형집행인, 아르뛰르)

임은경(상딸 역)

조예술(로제 역)

조진영(경찰청장 역)

 

제작

김소연/무대, 분장

김현진/기획, 안무

송지은/연출

이나영/음향

조주영/연출

차슬기/기획, 드라마투르그, 조명

최지연/그래픽디자인

홍지원/의상, 소품, 분장  


 - 공연소개 : 장 주네의 <발코니>는 대표작 <하녀들>에 비해 비교적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1956년 프랑스에서 쓰인 이 작품을 동시대의 연극으로 번역함으로써, 오늘날의 현실과 삶의 정치에서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비현실적이면서도 일상적인 발코니공간을 통해 관객은 각자가 지닌 다양한 위치성을, 어느 만큼이나 질서의 에 있으면서도(포섭), ‘에 존재하는지(이탈/배제)를 감각하게 될 것이다.

 

- 공연 일시 : 921() 오후 8

      922() 오후 3/ 오후 7

- 공연 장소 : 홍대 포스트극장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148)

- 후원 :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