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불편한 연극> 말하기 1. '아버지와의 화해는 현실에서'

 

 

아버지와의 화해는 현실에서

 

 

<뼈의 기행>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불편한 연극> 말하기 - 국가지원 연극의 성평등 모니터링’은 젠더비평의 관점으로 연극을 보고 말하는 모임이다. 작품 내에 주변부를 소외시키거나 혐오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등 가부장제 질서에서 행해지던 폭력을 인식하고 재현윤리를 검토한다. 국가의 지원을 받는 동시대 연극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성이 무엇인지 실마리를 찾는 프로젝트이다.

 

일시 : 2019년 6월 17일 오후 1-3시

장소 : 삼일로창고극장 갤러리

참석자 : 대도루팡, 명탐정코난, 모두까기, 무민

모더레이터 : 장준애

공연명 : <뼈의 기행>

 

장준애 : 오늘 좌담의 대상이 되는 작품은 국립극단 창작신작 시리즈를 잇는, 백하룡 작, 최진아 연출 <뼈의 기행>. 내용을 정리하는 자체가 이 작품의 성격을 드러내는 면이 있다. 주인공은 70대 노인 ‘준길’. 이 사람이 어렸을 때 만주에 두고 내려온 부모의 유해를 인생 늘그막에 와서 고국 경상도 선산에 이장하려는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무대는 만주, 다롄, 하얼빈에서 이루어지고, 등장인물들도 아들인 ‘학종’을 제외하면 대체로 중국동포들로 구성되어 있는 연극.

 

명탐정코난 : 작품의 핵심인 부모님의 뼈를 이장해오는 것이 작품 전체를 끌고 가는 가장 큰 가치인데, 공감이 가지 않았다. 세대 차이인 것인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현실을 극복해보려는 조카 ‘영욱’이 한국으로 넘어오는 것보다, 그러니까 지금 현재 살아있는 사람보다 부모의 뼈가 더 중요한가? 거기서부터 공감이 전제가 되어야 극 전체에 몰입해서 따라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모두까기 : 나 역시 거기서부터 공감이 안 돼서 공연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관객 입장에서 보통 주인공에 이입해보려고 하면서 관극을 하고, 악역이라도 그리고 그 의지가 비틀렸더라도 그 사람만의 논리가 있기 마련인데, 이건 너무 맹목적이다. 불에 타면 뜨겁다는 제스쳐만 있고, 논리적이지 않았다.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 동생과 조카는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니까 보면서 당황스러웠다. 작품은 옳은 말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고, 어찌 됐든 주인공이 하고 싶은 것만 하게끔 하니까 괴리감이 컸다.

 

장준애 : 화장을 해도 문제가 없는데 왜 이렇게 뼈를 가져오려고 하는지. 주변 인물들이 말 그대로 팩트로 뼈를 때린다. 이 소동이 무슨 의미가 있지? 거기에 공감할 수 있나? 그런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대도루팡 : 내가 공연을 볼쯤에, 문재인 대통령이 김원봉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여론이 굉장히 격했었다. 결국에는 민족주의를 어느 시점에서 누구의 것으로 바라보느냐에 대한 얘기였는데, 이 공연을 보고서 더 그런 이슈가 눈에 보이고 역사를 더 찾아보게 되었다. 연변은 타지니까 우리 땅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논리부터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이야기가 대한민국의 정서를 일차원적으로 대변하는 것 역시 문제라고 생각했고, 어르신이 고군분투하는 드라마도 완전 신파여서 선전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극작부터가 그랬고, 등장인물들의 연기에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나? 하고 인터파크에 들어갔는데, 정말 공연 잘 봤습니다, 유일하게 이 공연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10점 별점만 있더라. 아직도 이런 감상적인 것만이 연극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구나 싶었다. 객석의 정서도 다들 감상적인 흐름을 따라가더라.

 

모두까기 : 나 개인적으로 민족주의를 강하게 얘기하는 것들에 거부반응이 있는 편이긴 하다. 민족주의라는 개념은 근대에 발명된 것일 뿐, 그전에는 땅의 경계라는 것이 명확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냥 살고 있었고, 왕권국가라 해도 왕이랑 만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도 않고, 우리가 한 민족이라는 인식도 전혀 없었고, 유럽같이 좁은 땅에서 여러 나라가 있는 곳들 역시 예컨대 ‘나는 프랑스 시민’이라는 인식이 없었고, 왕이 바뀌어도 상관없이 나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와중에, 제국주의와 같은 당대의 개념들과 맞물리면서, 상상으로 만들어낸 개념이 바로 ‘민족’이라고 알고 있다. 극단까지 가면 파시즘까지 가는 거고. 개인적으로는 그런 것들을 경계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식민지로서의 경험이 커서 그런지, 경계하는 목소리는 잘 없고 여전히 민족정체성이라는 것은 훼손되면 큰일 나는 가치라는 인식이 강한 것 같다. 이 작품이 어떤 정서에서 기반했는지는 너무 잘 알겠는데, 공감해주고 싶은 생각은 안 드는 작품이었다. 거부감이 컸다.

 

무민 : 다들 비슷하게 느끼신 것 같다. 어쨌든 기본적으로 드라마에서 주요배역의 초목표는 뼈를 가져오는 건데, 우리 세대는 공감할 수 없는 것이고, 사실 세대차이 문제도 아닌 것 같다. 주인공이 우리 엄마아빠 세대 언저리인데, 뼈에 집착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차라리 개인사적으로 엄마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나 혼자 남겨진 순간들, ‘뼈’라는 자신의 기원 혹은 원형 보존에 대한 집착을 강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개인사적인 근거들이 있었다면, 세대 차이 문제나 민족 기반한 정서와 별개로 그 인물에 이입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런 포인트들을 전혀 안 보여줬기 때문에, 거부감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느껴졌다.

 

대도루팡 : 남한의 경제구조에서 사회화된 삶 속에서 열심히 성실히 돈 벌고 살아온 캐릭터라면 중국 공안이 하지 말라는 건 안 할 것 같다. ‘뼈째 가져가야 한다’에 대한 설명이 생략된 채로, 개연성을 납득시키는 과정 없이 원래 그런 것, 당연한 것으로 퉁치고 가니까 설득이 안 됐다.

 

장준애 : 작품 속 연도들을 체크해보면, 작중 현재가 2004년이고 70대 노인 ‘준길’은 30년대생이다. 해방 이후 혈혈단신으로 김천으로 내려와서 부모님과 만나지 못하고 살아왔다. 왜 2004년인가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한중수교가 90년대 초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미뤄보면, 12년가량 오빠가 찾아오지 않은 동생의 한 같은 것을 고려해서 설정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은 ‘준길’인데 작가가 투사한 자기 자신은 아들 ‘학종’의 세대일 것 같다. 낭만화된 기원 찾기 같은 느낌이 있다. 스스로가 고아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노인이 되어서 늘그막에 부모님의 유해를 꼭 뼈째 선산에 묻어야겠다, 나도 나중에 거기 묻힐 거니까, 하는 사고가 어떤 기원을 복원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그 세대의 욕망인지? 아님 작가 세대의 욕망인 것인지?

 

명탐정코난 : 나는 ‘학종’이 배 타고 한국 돌아와서 돈(유골 밀입의 대가로 브로커가 요구한)을 안 보내줄 줄 알았다. 그런데 결국 응원해주고, 조카 ‘영욱’도 종국에는 뼈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고, 쓸데없는 아집을 효로써 응원해주는 것이 결국은 모두가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말해주려는 의도였을까?

 

장준애 : ‘학종’의 대사에도 나온다. 아버지가 당신의 욕망을 투사해서 자기를 키운 거다, 공부 못한 한으로 대학원 보내고, 출세 못한 한으로 공무원 시키고, 이제는 조상 뼈 찾겠다고 나를 중국까지 보내서 개고생을 시키는데, 틱틱대면서 결국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아들 관계의 서사가 된다. 어딘가 몹시 익숙하다. 젠더적으로 가져오면, 아버지와 아들의 역사 쪽에서 이야기할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대도루팡 : 프로그램북에도 아버지와 아들의 얘기를 하겠다, 자전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다, 라고 하는데, 지금의 메이저가 그 세대의 그런 감수성이 디폴트로 되어있어서 국립극단에서 선택하고 올라가는 것 같다.

 

모두까기 : 이 작품이 옛날에 학습된 감수성이 반영된 것 같고, 지금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고려가 안 된 것 같아서,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다른 세계 같았다. 젠더 이슈 관련해 얘길 해보자면, 여성 캐릭터들이 전통적인 여성상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색다를 것도 없이 전통적인 이미지였고, 비판할 지점도 있는데, 아무튼 새로운 지점은 없었다.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 사용이 되었는가 봤을 때 주인공의 길을 가로막는 방해물로서 존재하는 것. 몸이 아픈 여동생이 갈 길을 막았다. 아버지는 가야 하는데, 어머니의 모성애로 또 길을 막았다. 모성애가 많아서 내 아이를 살려야 해, 잠깐 쉬었다 가자 하면서, ‘준길’의 인생에 자꾸 방해가 되거나 원인을 제공하거나 하는 식의 인물들이었다. 결국 새로 만난 동생도, 왜 이제야 찾아왔냐, 여긴 여기만의 절차가 있다고 어머니의 목소리를 못 듣게 하고, 결국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녹음테이프는 어떻게 된 건지?

 

무민 : 그 녹음테이프가 서사를 낙차가 크게 해소시켜 줄 수 있는 장치였는데, 심어놓고 처리해주질 않았다.

 

모두까기 : 그걸 보여주지 않은 것은 해소되지 않는 그리움으로 끌고 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그리움을 아예 다른 것으로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준길 어머니의 영혼이 손자인 ‘학종’의 머리를 때리고 간다는가 하는 장면 역시 그냥 전통적인 이미지 안에서 사용하는 정도였다. 그나마 그런 전형성이 덜 보이는 여성 캐릭터라고 한다면 ‘심가’, 라고 되어있는, 보따리상 하시는 분 같은 경우에는... 악역으로 나오시는 건가? 정확하지 않은데...

 

무민 : 이 드라마 안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악역도 아니고 말씀하신 것처럼 애매한 게 맞는 것 같은 게, 주인공보다 입체적인 인물이다. 가장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고 나를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모두까기 : 이건 연출적 포인트인데 배우분이 덩치가 좋으신 걸 코미디 요소로 계속 사용하는 게 불편했다. 통로가 덩치에 비해 비좁아서 낑낑대며 겨우 지나가는 장면에서 “나니까 지나갔지.” 하는 대사라든가. (게다가 웃음요소) 여성의 신체를 희화화하는 것이 전제로 깔려 있는 것.

 

무민 : 인물 자체가 그런 캐릭터라서, 그러니까 내적 성격 자체가 그런 대사를 뱉을 만한 성격의 인물이었으면, 그렇게까지 불편하게 안 느껴졌을 것 같다. 인물이 뱉은 말이 아니라, 누가 봐도 연출적으로 연기적으로 보여주는 대사라 더 불편했던 것.

 

대도루팡 : 보면서 가장 곤란했던 지점은, 자꾸 개인사를 가지고 근현대사의 서사로 관통해보려고 하는 기성작가들의 선택이었다. 너무 위험한 것 같다.

 

장준애 : 남성중심적인 역사와 남성중심 서사가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이 작품이 아버지와 아들의 서사가 아니라, 모녀의 서사였다면? 일단 잘 상상이 안 된다? 관객들이 그 인물들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생떼와 민폐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고집과 꼬장이 이해받아야 된다는 여지가 작품 안에 분명히 있다. 만약에 주인공의 동생 ‘순영’의 서사였다면? 완전히 다른 극이 나올 것이다. ‘순영’은 그동안 계속 오빠한테 편지를 보내며 연락을 시도했고, ‘준길’은 답장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기간도 길고, 중국에서의 삶이 워낙 어려우니까 초청장을 받아서 한국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초청장은 구비 서류를 다 갖춰도 번번이 반려되고, 오빠라는 사람은 찾아오지도 않다가 12년 만에 와서는 자기가 찾아가고 싶은 것만 내놓으라고 하고. 이런 오빠를 바라보는 ‘순영’의 시점에서 극이 전개됐다면 전혀 다른 극이었을 거다.

 

모두까기 : 인물의 개인사가 참 억지스럽다고 느껴졌던 건, 주인공이 삼대독자인데 아직 어린아이만 혼자 내려보낸다는 게 정말 설득이 안 됐다.

 

대도루팡 : 세관 통과하고 출입국 거치고 하는 과정에서 뼈를 가지고 이동을 한다? 공안들 총 소지하고 돌아다니고 이런 분위기에서? 현실에서 내가 직접 그런 사람을 만났으면 완전 민폐 진상일 사람이, 무대 위에서 보여지니까 당위성을 가진 캐릭터가 된다. ‘원래 그래’로 퉁 쳐진다. 그럴 수 있지, 라고.

 

모두까기 : 성별이 여자인 사람이 현실에서 그랬으면 ‘공항女’ 뭐 이런 ‘女’자 붙여진 이름으로 혐오적인 질타 대상이 되었겠지. (다시 얘기 돌아가서) 왜 아들만 남쪽으로 내려보냈을까?를 생각해봤을 때, 식민지배를 당한 남성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식민지 시대를 겪으면서 선조로부터의 유산이 끊겼고, 홀로 자립해야 했었다는 사고가 전제된 것 같다. 그래서 그 상징성이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설정으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장준애 : 개연성 부족을 덮어줄 수 있는 것이 남성중심 서사의 특징인 것 같다. 영화 <걸캅스> 같은 경우 관객들이 얼마나 현실성, 사실성에 엄격한지 생각해보면. 극적인 개연성 부족, 억지스러운 신파적 코드들을 그럴 수 있지 라고 이해해주는 그런 코드가 남성중심 서사의 코드가 아닌가, 그게 문제가 아닌가, 생각했다.

 

명탐정코난 : 돈을 밝히는 여성캐릭터들 이라는 설정도 불편했다.

 

무민 : 이거는 여혐 문제뿐 아니고 사실 인종혐오도 들어가 있다. 물론 그 당시 ‘조선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삶이 힘들고 팍팍하긴 했지만, 작중 모든 ‘조선족’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다 그러니, 혐오적인 편견을 더 강화시키는 설정들이었다고 느껴진다. 실존 인물들 취재해보면 사실 브로커들 의외로 멀끔하고 젠틀하고 이런 캐릭터들일 수도 있는 건데.

 

명탐정코난 : 내가 ‘순영’이었으면 너무 싫었을 것 같다. 부모랑 같이 살아온 건 나고, 뼈를 보존한 것도 나인데, 평생 만나지도 못했던 오빠가 뼈를 가져가 버린다고?

 

모두까기 : 그 포인트에서 왜 싸움이 안 나지? 삼대독자라서?

 

대도루팡 : ‘순영’의 이해도 어쩌면 당연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 같았다.

 

장준애 : 조선족이 중국 현지에서 받는 차별과 혐오, 한국에서의 냉대를 안고 살아온 ‘순영’의 삶과, 한국에서 살아온 ‘준길’의 삶을 비교한다면, 실은 ‘순영’의 삶이 훨씬 더 고달팠을 것 같다. 그런데 ‘순영’에게는 자기 이야기를 할 비중이 주어지지 않았다. 현상으로 드러난 것은 고생해서 뼈 찾으러 온 오빠에게서 돈 뜯어내는 정도. (‘여’동생이자 ‘조선족’의 삶이 타자화되고 삭제되어 서술돼 있지만 그것을 연극으로 만들어도 먹힌다는 점)

 

대도루팡 : 국립극단에서 과연 이런 이슈들에 대해서 이야기가 되고 있긴 한 건가 싶다. 그 안에 드라마터그도 있고, 기획부서도 있고, 마케팅 파트도 있는데, 이런 이슈들에 대해서 어떠한 경청이나 판단이나 이런 것들을 자체적으로 하긴 하는 건가 의문이다. 그런 것들이 부재하다면 근본적인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부터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아르코, 창작산실, 국립극단 등등이 올해 대극장에서 올리는 작품들이 사실 3.1운동 100주년의 영향 때문에 그런 경향인 것은 이해한다. 그런데 결국에 기저는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역사 속에서 남성들이 무엇을 했는가 의 이야기다.

 

명탐정코난 : 사실 그간의 역사를 보았을 때 여성의 것이 기록되기도 어려웠던 실정이니, 역사극이 남성중심으로 서술되는 건 그렇다 쳐도, 그럼에도 어떠한 관점 하나라도 포착해서 재조명하고 의미를 발견해준다면, 정도의 바람인 것 같다.

 

모두까기 : 연극은 상대적으로 순수예술에 가깝고 관객들의 입김이 세지 않은 장르다 보니, 심사위원이나 선택권을 가진 사람들의 입김이 절대적인데, 그런 심사위원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죄다 남성중심 서사로 세팅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장준애 : 지극히 상업적인 영화 산업도 사실 마찬가지다. 소위 ‘알탕영화’, ‘한남 엔터테인먼트’, ‘한남 시네마틱 유니버스’ 이런 용어들이 나오면서 영화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욕을 먹는다는 건, 사실 천만 영화 타이틀을 가진 영화들이 실제로 천만 명이 그 영화를 좋아해서라기보다, 산업은 기존의 흐름에 이어 굴러가고, 게이트키퍼들 그러니까 제작사나 배급사에서 시나리오를 거를 때 여성 캐릭터가 주연이면 흥행이 안 되니까 거르고, 이렇게 자본이나 흥행의 논리로 결정하는 층위가 있고, 대중들은 그냥 만들어져있는 게 그런 것들뿐이니까 별다른 선택지 없이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카페에서 나오는 유행가들도 카페 업주들이 손님들이 좋아할 것 같은 곡들을 선곡하는 것이 아니다. 멜론 차트에 있으니까 트는 거지. 그걸 듣는 대중들은 그 곡들에 익숙해져서 그것이 인기곡이 되고 이런 식의 순환인 거다. 절대다수의 대중들이 남성중심 서사를 선호한다고 볼 수도 없다. 한때 트위터에서 한국영화 거르는 기준 이런 게 유행했었다. 한국연극 거르는 기준도 회자 됐었는데, 시놉시스가 “여기 한 남자가 있다.”로 시작하면 믿거라는 설... 또 “……를 통해서 오늘날의 현실을 진단한다.”라는 표현이 있으면 걸러야 한다는. 꼭 그 현실 진단하는 건 지정성별 남성이고. 최근에 발표되는 여성 서사들 보면 마음이 편한 게, 그런 것들을 짊어지지 않아서. 2-3년 전에 페미니즘 담론이 막 활발해지기 시작할 때에, <청춘예찬>을 비롯한, 무대 위에 여혐을 재현하는 작품들이 인터파크 평에서 전에 없던 냉대를 받기 시작한 시점이 있다. 그런데 사실 <뼈의 기행> 같은 작품이 더 위험할 수 있다. 어떤 장면을 꼬집어서 들 수가 없고, 잘 들여다보면 지극히 남성중심 서사일 경우에, 만든 입장에서는 쉽게 방어 가능하고, 문제제기 하는 입장에서는 고려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극작이나 상상력의 차원에서부터 이미 기울어져 있는 극들에 대한 비판이 매우 중요한데, 그것을 어렵게 만든다.

 

모두까기 : 여성혐오가 무엇인지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설명하기가 너무 어렵다. 단순히 여자한테 욕설을 한다든다 때려서 여성혐오가 아니야, 당신들의 작품에 이미 여성혐오의 사고가 내재화되어 있어, 라고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대도루팡 : 국립극단이나 아르코의 작품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하면, 다들 점잖고 멋쩍게 평을 한다. 사실 호되게 혼나야 하는 자린데. 난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아역배우들이 많이 걱정됐다. 너무 도구화하고 기계적으로 작동시켰다는 인상이 강해서.

 

장준애: 이 작품에서, 아버지들의 변명으로 이루어진 역사가 있고, 그것들을 감성화하고 낭만화하는 데 수단이 되고 주변화되는, 중국동포도 마찬가지고 여성, 아이들이 있는데 (극작과 연출 양쪽 모두의 차원에 있어서) 이걸 너무 잘 용인해주는 연극계 코드 안에서 반복생산되는 문제를 확인할 수 있는 것 같다.

 

무민 : 2000년대 중반부터 남성 극작가들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소재로 삼고, 작품 제목에 ‘아버지’ 들어가고 그렇게 떠버리더니, 이게 지금 15년 이상을 계속 그런다. 본인들 스스로가 진화하고 혁신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그런데 다음 스텝에 대한 방향을 못 잡고 있는 것 같다.

 

장준애 : 오늘 좌담회를 한 줄 평으로 정리한다면?

 

모두까기 : ‘아버지와 화해는 현실에서’

 

※ 이 좌담은 한국여성재단 2019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사진출처_국립극단 인스타그램

2019.05.31 - 06.16 | 8+//100min//30,000원

공연소개 <뼈의 기행>

"나는 뼈채 가져간다. 저거 고대로 가져간단 소리다!"

우리 아버지의 고군분투 이장기!

인생 끝자락에 선 70대의 백준길은 평생을 벼르던 숙원사업에 착수한다. 이름하야 유골 이장 대작전. 어린 시절 이별해서 임종도 못 지킨 부모님을 ‘뼈라도 모셔오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기행을 떠난다. 초반부터 심하게 삐걱대는 여행길이 순탄할 리가 없다. 아들부터 조카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도움은커녕 훼방을 놓기에 바쁘고 급기야 가방 속 부모님의 유골까지 이리저리 섞여버려 억장이 무너진다. 이 소중한 뼈들을 무사히 한국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그의 여정은 쫓기듯 떠나온 이민의 역사와 피붙이의 손마저 놓아야만 했던 이산의 아픔을 가로지른다.

만드는 사람들

작 백하룡
연출 최진아

무대 손호성
조명 김성구
의상 김미나
움직임 이경은
음악·음향 이승호
영상 윤민철
분장 장경숙
소품 김교은
방언지도 백경윤 송재룡

CAST
박상종 ㅣ 준길
이준영 ㅣ 학종
이수미 ㅣ 심가
성여진 ㅣ 순영
강해진 ㅣ 영욱
이호철 ㅣ 황가
조남융 ㅣ 사내
김수아 ㅣ 아낙
남수현 ㅣ 중국인 외
윤서진 ㅣ 소년
최지우 ㅣ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