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불편한연극>말하기 4. 노라는 변했으나 사라지지 않았다

2019. 11. 18. 13:54Feature

 

 

노라는 변했으나 사라지지 않았다

 

 

<WIFE>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불편한 연극>말하기 - '국가지원 연극의 성평등 모니터링'은 젠더비평의 관점으로 연극을 보고 말하는 모임이다. 작품 내에 주변부를 소외시키거나 혐오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등 가부장제 질서에서 행해지던 폭력을 인식하고 재현윤리를 검토한다. 국가의 지원을 받는 동시대 연극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성이 무엇인지 실마리를 찾는 프로젝트이다.

 

일시 : 2019년 10월 11일 오후 1-3시

장소 : 삼일로창고극장 갤러리

참석자 : 햄토리, 나무, 호두, 석류, 자두, 양파

모더레이터 : 사과대추

공연명 : <WIFE>

 

사과대추_어떻게 보셨는지?

호두_공연보고 나오는데 어떤 관객이 ‘한국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 첨예하다’고 하는데 한국에서 이런 이야기가 뭐가 첨예하다는 건지 의아했다. 영국에서는 첨예한 문제일 수 있겠으나 지금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와 페미니즘 진영에서의 문제나 갈등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기 때문이다.

햄토리_소수자 당사자들이 셀프 디스를 할 때의 통쾌함이 커서 신나게 봤다. 기득권이나 강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혐오 발언을 할 때의 불쾌감이 없었다. 우리 페이스에 맞는 느낌이 들어서 재밌었다.

나무_대본이 좋았다. 여러 세대들이 이어나가는 구성이 좋았다. 대극장이나 규모있는 극장에서 페미니즘 공연한다고 해서 봤을 때 느끼는 감각은 항상 조금 참담했다. 그런데 그런 감각 없이 잘 봤다. 늘 레즈비언 이슈가 비가시화되는 것들이 아쉬웠는데 이 공연 역시 분명하게 여성들의 관점에서 여성들의 시선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게이들의 이야기가 더 가시화되고 있다는 감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햄토리_정량적인 분량은 그럴 수 있는데, 수잔나와 데이지의 서사가 수미상관처럼 있으면서 1950년대 한창 인형의 집이 유행되었을 시기와 마지막 2040년대, 거의 백년이 지나가는 역사가 데이지와 수잔나의 서사로 결국 봉합이 되니까 비중 면에서는 레즈비언이 덜 가시화되었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사과대추_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다. 작품의 맥락과 제목을 연결지어볼 수 있을 것 같다. 기존의 ‘와이프’는 남녀관계로 이루어진 가정에서 부인, 여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쓰이는데, 작품에서는 ‘보조자’의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작품에서 특정하게 여성을 두고 와이프라고 부르진 않는데, 그건 상대적 약자를 와이프로 칭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작품에서 이성관계든 동성관계든  그 속에 와이프라는 위치가 존재하는데, 이 지점이 흥미롭다.

석류_으레 ‘우리(내) 와이프야’라고 상대를 지칭하는 게 편하지, 주류 사회에서 ‘내 남편이야’라고 소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결혼이라는 관계에서 내가 아닌 타자라는 이름의 와이프였을 때, 고정관념을 떠나서 주체가 상대를 부르는 언어이지 않았을까. 

자두_제목에 대해서는 작품이 대중들의 반응에 정면승부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콘센트-동의’ 때 연출의 의도가 헷갈리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여기서 하는 자아비판이나 시니컬함 같은 것들은 의도했다고 믿고 볼 수 있었다. 고민이나 의구심들을 다 맞닥뜨리고, 본인들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무가 느꼈던 비가시화의 경우 게이들은 계속 탁 트인 공간에서 욕도 하고, 욕도 먹고, 자기를 과시하기도 하는데 레즈비언들은 계속 방안에서 자기들끼리만의 연대만 있으니 갑갑한 느낌을 받았던 것들을 동의한다. 

사과대추_이분법적이긴 하지만 허즈밴드라고 하면 왜 안 됐을까. 와이프가 현실사회에서 섹스여성과 결부되어 있는 단어인 건 분명하다. 그것을 작품 속에서는 젠더여성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만약 언어와 의미가 결코 일치되는 게 아니라는 취지로 와이프라는 단어를 반복 사용한 것이라면, 굳이 와이프라는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을까. 어차피 허즈밴드도 기표와 기의가 분리된 것일 텐데, 무엇을 쓴들 어떠하리.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와이프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한다는 건, 기존의 와이프라는 단어가 지닌 고유한 성격 때문에 그러했으리라 짐작된다. 극 중에 와이프로 불리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와이프라는 단어에는 사회문화적으로 약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작품에서는 그것을 재확인시켜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와이프라는 단어에 달라붙어 있는 기성의 고착화된 이미지와 의미를 떼어버리고 새로운 의미를 연결해보려는 시도인 것일까. 생각할수록 복잡해진다.

호두_극 중에서 ‘이 사람 내 와이프예요.’하고 나면 상대방 눈치를 본다. 상대를 ‘와이프’로 부르는 나는 주체기 때문에 나는 ‘와이프’가 되지 않는 거다. 내가 남자든 여자든 상대가 동성이든 이성이든 상관없이 ‘와이프’라는 말 안에 타자화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연출이 의도한 것인지, 대본에도 그게 의도되어 있는지 궁금하긴 했다.

사과대추_와이프라고 지칭한 사람은 늘 당당한 태도였고, 호명 당한 사람은 약간 수동적인 느낌이었다. 실제 사회 속에서 통용되는 ‘와이프’라는 문화를 여기에 대입시킨 건지, 오히려 그것을 깨트리기 위해 풍자한 건지 아직 헷갈린다.

석류 다시 생각해보니 시대별 와이프를 받아들이는 부분들이 셀프 디스든 고정적이든 확장이 되든 달라질 수는 있는데, ‘와이프’ 자체는 타자화하는 말이었던 것 같다. ‘와이프’라는 게 성 고정관념이나 이런 거에서 구분하는 용어로 쓰이기는 했었지만, 고정관념을 다 떼고 난 다음에도 남는 것은 지칭 언어일 뿐이다.

나무_나는 단어를 지워버리지 않는 것이 좋았다. 계속 다른 언어를 쓰려고 하거나 대치되는 단어를 계속 가져오지만, 결국 이 단어 자체에 어떤 함의를 가져가느냐에 따라서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생리라는 단어도 혐오적이라고 하며 시대별로 계속 단어를 바꿔왔지만 결국 똑같이 남았다. 혐오가 배제된 새로운 언어를 찾고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굳이 다른 언어를 찾지 않고, 다르게 해석하려고 한 것이 좋았다.

양파_와이프의 의미가 시대별로 서성이는 존재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나타내는 건가 싶었다. ‘제목이 왜 와이프일까?’라는 생각으로 공연을 되돌아 봤을 때, 와이프라고 지칭되는 인물들에게 약간 그런 면이 있었던 것 같다.

햄토리_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극중 좌절의 입장에 처해 있는 인물들이 공교롭게도 ‘와이프’로 지칭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사과대추_또 다른 독특한 점은 세대가 연속된다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보았는지?

양파_세대가 이어짐에도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좋았다. 

햄토리_그것이 구성면에서 잘 짜여졌다고 생각하는데, 주요 인물들의 서사가 있으면, 그 관계도에 얽혀 있는 어떤 인물이 다음 에피소드의 또 다른 관계도를 이어 만들어가는 구성이 정말 좋았다. 영화나 영상콘텐츠에서 이런 비슷한 구성 유형 중에 ‘유목민적 구성’이라는 방식이 있는데, 이러한 방식을 연극적으로 풀어낸 탁월한 구성이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 구성과 맞물려 인형의 집의 시대적 변화와 함께 대표적인 장면들을 보여주는데 시대의 인물들이 다 얽혀 있어서 탄성을 하며 보았다.

석류_사실 되게 판타지적인 설정과 구성인데 개인의 족보사임에도 불구하고 엘지비티 역사나 퀴어문화의 전반적 흐름을 볼 수 있게끔 해 주는 구성이어서 재미를 줄뿐더러 서사 자체도 잘 뽑아낸 것 같다.

나무_앞서 운동했던 것들을 지워내거나 새로 시작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들의 지난 연대를 기억하고 가져가야 한다는 의미를 남긴 것이 좋았다. 다만 퀴어문화와 역사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레즈비언의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보여줬는지 잘 모르겠다. 지적인 이야기, 사상과 운동의 역사들을 게이들의 입으로 계속 발화되어 자꾸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더불어 게이들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햄토리_계속해서 소수자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정작 잘 알지 못하고, 당사자들도 아니다 보니 전형성에 기대어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

호두_이 연극에서는 의식해서 기계적으로 맞춘 느낌이 들었다. 한 명은 전형적으로 그리면, 한 명은 그렇지 않은 느낌으로.

사과대추_중요한 건 대중들에게 어떻게 소수자의 모습을 노출시킬 것인지 필수로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이미지로만 반복 노출하게 되면 어느새 대중들에겐 소수자의 이미지는 그것 하나뿐이게 된다. 너무 쉽게 같은 모습으로 재생산하는 건 위험하지 않은가. 호두님의 말씀대로 균형을 이루는 형태긴 했던 것 같다. 다만, 에릭 같은 경우 여성성을 꾸며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아직 커밍아웃하지 않은 위치기 때문에 대중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지 않으려는 방어적 태도의 일환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자두_다른 연극에서도 비슷한 의문이 여러 번 제기되었다. 이것도 다른 페미니즘 이슈처럼 명확히 답이 나오지 않은 채 계속 가야 하는 쟁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석류_연출이나 작가가 어떤 의도였는가, 배우가 어떤 것을 참고해서 어떤 방향성을 잡았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떤 것을 선택했다기보다는 80년대 게이들의 표상을 잡았다고 생각한다. 분명 80년대 당시 문화와 캐릭터가 있었고, 그것이 정말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었기 때문에 그를 표현하기 위해 80년대 한 호프에서 대화를 나누는 커플을, ‘게이가 되기엔’ 아직 미성년자와 게이 운동권에 나가 있는 진보적인 인물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으로 가져오지 않았을까.

사과대추_80년대 아이바와 2019년도의 아이바는 분명히 다른데, 그 과정에서 이 사람은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을 하며 변화된 것도 있을 것 같고, 게이 사회 내에서도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있는 걸 있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사람들이 아이바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걸 보면서 지금쯤 웃음을 터트려야 하기에 만들어낸 설정인 건가 싶었다. 이런 캐릭터를 웃음을 위한 계산된 설정으로 가져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석류_풀어가는 역할도 있었긴 했겠지만, 그 장면에서 그 캐릭터가 우습지는 않았다. 그가 하는 전형적인 코드들이 우리들에게 계속 부딪혀서 2019년을 만들었던 것처럼 80년대 아이바가 그런 것들을 계속 주장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양파_작품에서 성소수자를 표현하는 방식이 퀴어정체성을 드러내거나 숨기거나 두 가지 방향으로만 보여서 좀 더 다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한 가지 궁금증은 노라 역할을 했었던 배우는 똑같은 배우였는데, 왜 아이바 역할을 하는 배우는 바뀌었을까? 

햄토리_그렇게 희망적이고 의지 있고 동력 있었던 사람이 결국 좌절하고 타성에 젖어가고 매너리즘에 빠져가고 그런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양파_백석광 배우가 그 역할을 계속 했다면 캐릭터의 변화가 더 크게 와닿았을 것 같다. 

나무_그 캐릭터는 시간의 흐름이 되게 중요했다. 수잔나 같은 경우는 계속 같은 인물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나왔었다. 이 캐릭터 같은 경우는 실제로 그 인물이 나이를 먹었다는 시간의 흐름도 중요했고, 젊은 신세대 애인이 있다는 것도 포인트였던 것 같다. 사실 분량 차이도 절대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석류_유일하게 아이바가 두 시대를 연결해서 보여주는 사람이지 않았나.

사과대추_80년대 아이바는 당시에 정확하게 적을 구분할 수 있었는데, 2019년 아이바와 그의 애인은 여전히 해결된 것 없는 사회 속에서, 그때와 다른 적들을 대면한다. 더 내밀하고 은밀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적. 80년대는 정치적인 대립이 있었으면, 지금은 사회 속에 스며들어 있는 자본과의 문제가 불거진다. 그런 면에서 2019년 아이바는 한치 앞도 못 보는 어린 애인의 태도를 방관하듯 인정하듯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태도인 것 같았다. 마치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예전에 비해 너무나도 거대하다는 걸 아는 것만 같았다. 이외에 아이바의 젊은 애인을 통해 약자거나 소수자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포용하는 것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 애인은 자신이 소수자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역으로 활용했다. 아이바와의 관계에서는 그것을 권력으로 행사했고 헤테로들에게는 약자임을 근거로 더 오만하고 방만하게 대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어쩌면 사회가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나 싶기도 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 위악적으로 태도를 취하는 건가 싶었다. 

나무_‘인형의 집’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노라가 집을 나갔고, 여성이 주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으로 출발되는 원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와이프’는 왜 노라가 퀴어일 수도 있다는 의문에서 시작된 건지, 이게 왜 퀴어 혐오의 이야기로 전개가 되는지 궁금했다.

사과대추_노라를 여성이 아니라 약자, 소수자로 생각해서인 것 같다. 수많은 다양한 형태의 노라들을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닐까. 그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사회, 벗어나고자 하는 집, 끊임없이 노력하는 주체, 수많은 형태들의 노라들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인형의 집>에서 와이프의 위치에 있었던 노라, 그 노라는 분명 약자였다. 그것이 현대의 다양한 약자들로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 부분이 극중의 약자들을 통칭할 수 있는 ‘와이프’라는 단어와 겹쳐지는데, 50년대의 ‘와이프’였던 노라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고, 어떤 ‘와이프’들이 탄생되어 왔는지, 역사의 순환과 반복을 목격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자두_인형의 집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방법이지 않았을까. 이제 웬만한 변주들은 흔해졌고 어떤 것들은 원작의 의미를 손실시키기도 하니 아예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해보려 했던 것 같다. 

햄토리_처음 입센이 인형의 집을 썼을 때 원작에서의 여성주의는 초기 버전의 페미니즘이었고 그 권리주장을 하는 입장의 주체는 생물학적 여성이었는데, 지금 2019년 페미니즘의 범주 안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목소리를 내는 주체들은 비단 생물학적 여성뿐만 아니라 그 층위가 셀 수도 없이 다양해져서, 같은 페미니즘의 이름 안에서도 각자의 소수자성을 가지고 서로 치열하게 싸우기도 하는데 그런 사회상과 맥락이 장면으로 잘 드러난 것 같다. 

나무_인형의 집 시대별로 변하는 장면을 왜 보여줬을까? 마지막에 젠더프리극을 비판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는 필요했던 것 같은데. 여성혐오와 퀴어혐오를 분리하여 생각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씬 앞뒤로 붙는 것들은 여성 혐오가 아니고 퀴어혐오에 대한 이야기여서 왜 이렇게 시작되었을까 싶었다. 

호두_공연에서 젠더프리는 필요하다. 남성이 보편인간으로써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캐릭터의 기본값을 남성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젠더밴딩, 젠더프리, 젠더블라인드 등을 통해 다양한 실험을 하며 기존의 젠더 개념에 의문을 던지는 작업이 필요하다. 단순히 여자들이 설 문화가 없으니까, 젠더프리 요즘 핫하니까, 여자들이 했던 역할 남자들도 하자, 이런 게 아니라 젠더프리가 왜 필요한지, 무엇을 깨트리기 위해 하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 방향에 맞는 방식인지에 대해 우선 고민해봐야 한다. 작가도 그런 생각과 질문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석류_캐릭터와 관련해서, 나는 클레어가 너무 혐오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감정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이해를 해야만 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투자자라고 본인을 속여가며 아이바를 만나고, 다짜고짜 ‘당신이 내 아버지의 첫 번째 남자친구였기 때문에 밝혀라, 나는 아버지와 당신에 대해 알아야겠다’라고 한다니. 그러면서 한편으론 내 스스로도 관심이 있다고 해서, 그들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았나 돌아보게 되었다. 

호두_클레어는 아버지가 호모포비아에 의해 살해됐는데 아이바가 그런 문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처럼 여기는 것에 화가 났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세계에 만연한 혐오의 문제에 아이바가 직면하길 바란 것 같다.

석류_영국인들이어도 모두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해를 못하는 사회가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아닌가. 거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기에 뭔가를 캐치하고 나아가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나무_마지막으로 공연 중에 ‘병신’이라는 욕설이 자주 나오는데 극 중 사용되는 욕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양파_작가가 대사를 쓸 때, 등장인물에 따라 각각 다른 말투와 어휘를 선택 한다. 작가가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가지고 썼기 때문에 작품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혐오 표현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써야 하지만, 그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해당 표현을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호두_모든 장면에서 분별없이 계속 사용되니 연출이 장애인혐오표현에 별다른 의식이 없다고 느껴졌다.

석류 서울시극단에서 서울시 예산을 들이면서 퀴어 역사를 되돌아보는 작품들을 선택했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사과대추_서울시극단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연출이라는 인물을 지원하는 거지 작품 지원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주의든 아니든 그런 것들을 세세하게 따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석류_국립극단에서 ‘콘센트-동의’를 선정했던 것과 서울시극단에서 ‘와이프’를 올리려고 했던 방향이나 의도 차이는 있을 것 같다. 

햄토리_여성주의적 관점에 관심이 많은 배우들을 섭외한 것을 보았을 때 노력하고자 하는 의도들은 보였던 것 같다.

사과대추_다양한 세대들을 공략해서 만나게 하는 것이 의미 있었다. 와이프를 볼 때 다양한 연령대 분들과 함께 공연을 봤는데 모두가 충격을 받았었다. 그러나 다행히 기분 좋은 충격으로 마무리 되었다고나 할까. 덕분에 그분들의 가치관의 근원을 돌아보도록 했던 것 같다.

석류_공공기관에서 지원을 받는 작품으로써 의미를 찾는다고 한다면, 서울시에서 어떤 의식을 가지고 젠더나 소수자 이야기를 픽하기 보다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개인을 지원하는 것으로 읽힌다. 서울시에서 어떤 의식이 있어서 선정이 된 것이 아니라. 

양파_이런 극장들에서 작품을 자체적으로 기획‧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극장의 시각과 마인드도 중요하지만 참여하는 예술가들의 마인드도 중요한 것 같다.

석류_행정기관과 예산집행기관에서도 검열이 아니라 우리의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서 계속 함께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창작자의 성인지감수성도 중요하지만 서울시나 기관의 감수성도 중요하다.

나무_나는 누구의 선택이든 선택이 되었다는 건 극장이든 창작자든 배우든 모두의 합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말씀하셨듯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관객들이 ‘큰 극장에 와서 이런 서사를 만날 수 있다는 경험’, 그리고 창작자들도 우리 공연이 좋은 평을 받고 있고 사람들이 이 서사에 반응하고 있다는 감각들을 한 번씩 체험했을 거고, 이런 개개인들의 경험들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  한줄평 

호두_대본선택은 훌륭했으나 재현의 깊이감이 아쉽다.

햄토리_셀프 패드립이 청량하다.

양파_희곡으로 읽고 싶다.

자두_재공연됐으면 좋겠다.

사과대추_우선 배우들이 난 좋았다.

 

※ 이 좌담은 한국여성재단2019 성평등조성사업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사진출처_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
사진출처_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