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9. 14:40ㆍReview
맞아요, 축제예요
리뷰 <우리가 모이면 축제다>@신촌극장
김송요
공연을 보기 전 주말, 친구에게 곧 이 작품을 보러 간다고 말했다. “제목이 뭐였지? 뭔가… ‘아니다’였던 것 같은데”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왠지 너무나 합당한 기억의 왜곡 같아서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모이면 축제다>인데!” 대답을 하고서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비로소 이 공연을 보러 가는 날에도 그 말이 두고두고 떠올랐다. 아니다, 가 아니라, 맞다, 축제다, 그런 제목이었지, 새삼스레 생각했다.
때로 부정문이 더 좋은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정확히는 그 편이 더 강력한 선언처럼 들릴 때가 있다. ‘그렇지 않아. 그거 아닌데? 그건 틀렸어. 그런 줄 알았지?’ 부정문은 왠지 유혹적이다.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항상 그렇진 않더라도) 듣는 쪽을 주춤하게 만들기도 하고, 왠지 대단한 확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잘못된 것을 전복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근사한 긍정문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긍정의 힘’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는 분명 멋진데, 때로는 채찍질을 하는 자기계발적 발언처럼 쓰여서 사람을 못살게 군다. ‘아니’만큼 단호하고 냉정한 ‘맞아’가 사람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모이면 축제다>는 몹시 간단한 긍정문이다. 아니라는 말로 멈춰세우지도 않고 맞다는 말로 묵살하지도 않는 이 문장은 그리하여 부정문의 유혹과 긍정문의 압력을 유연하게 빠져나온다. 아무런 부사도 형용사도 없는 오직 아홉 글자의명쾌함. 이 문장이 대학로 바깥, 주거공간으로 쓰이는 건물의 꼭대기층에 자리잡은 신촌극장의 100번째 작품이자, 안무가와 무용수의 위계나 주도권을 나누는 대신 ‘공동창작’의 형태로 완성된 공연의 이름으로 쓰인 것은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세 무용수의 목소리가 공간에서 새어나온다. 세 사람은 나비, 경주마, 청개구리다.(얼떨결에 ‘사람은 사람 외의 동물이다’라는 문장이 되었다.) 이들의 말에는 형식적 제약이 없어서 회상과 감정 표현과 고백 등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공연이 시작된 것은 아니므로 관객은 어느 정도는 새겨듣고 어느 정도는 흘려듣는다. 그럼에도 잔류하는 알맹이들이 있다. 관객은 그 알맹이에 차츰 귀를 기울이면서, 이들이 갖고 있는 ‘이야기’를 발견한다. 형식이 자유로운 만큼 경중을 나눌 수도 없고, ‘특징’이나 ‘정체성’이라는 표현으로 쉽사리 정리하고 싶지도 않은, 삶의 구술로서의 ‘이야기’다.
춤을, 춤추기를 사랑하는 나비는 자기 얘기를 하는 게 쉽지 않을지언정 대화의 기회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인라인 스케이트 선수였던 경주마는 질주만이 유일한 목표이자 가치이던 시절의 폭력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상처입히는 일을 멈추려 한다. 청개구리는 자신의 퀴어 정체성을 일상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충분히 말하고 싶다.
이윽고 목소리는, 그리고 이야기는 그것이 흐르는 공간으로 시선을 매어둔다. 바닥에는 춤도 추고 행진도 할 수 있고 스케이트도 탈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플로어가, 무대의 안쪽으론 철제 프레임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사각 프레임을 쌓아 만든 조형물은 흡사 정글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글짐은 원래 x, y, z 삼차원 좌표를 물리적으로 구현한 구조물이라는데, 공연은 축이랄지 좌표에 매여 있지 않다. 테두리 패턴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닥의 테두리와 철제 프레임의 테두리는 모두 노랑과 검정 사선 줄무늬다. 꼭 접근금지 사인 같지만, 공연은 도리어 그 안에서 벌어진다.
무용수들은 토슈즈, 인라인 스케이트, 굽 높은 싸이하이 부츠를 신고 바닥을 딛는다. 이들은 자신이 신은 것에 아주 익숙한 상태처럼 보인다. 셋 다 발에 인위적인 변형을 일으키는 신을거리인데도, 하나같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관객은 이들이 들려준 말뿐만 아니라 신은 것을 통해서도, 이들이 어떤 기억과 경험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인지 짐작하게 된다.
이윽고 이 공연의 ‘판 까는 사람’ 역할을 한 조아라가 작품을 아우르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는 작품을 지휘한 단독 안무가의 위치가 아니라 작품을 기획한 공동창작자의 일원으로 역할한다. 다만 조아라는 신촌극장 개장 때 선보였던 ‘디조니소스’가 되어 틈입한다. 다른 세 무용수들이 무대 바깥의 모습과 무대 위의 모습을 연결짓는다면, 그만은 배역을 맡아 그 페르소나로 무용수와 관객을 엮어낸다. 디조니소스는 작품의 변사이기도, 유사관객이기도, 퍼포머이기도,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객석에 말을 걸다가도 청개구리 타령을 흥얼거리고, 이윽고 음성언어 대신 신체를 사용하여 다른 무용수들과 섞여든다. 단 디조니소스는 작품의 결말을 짓기 위한 봉합을 시도하거나, 작품에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일침을 가하지는 않는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니라 ‘우리가 모이면 축제다’의 ‘우리’ 중 하나로 분하는 것에 가깝다.
공연의 도입부, 관객은 디조니소스의 손과 말에 이끌려 무대를 침범한다. 색색의 유성펜을 받아 무대 위로 올라선 뒤, 무용수들의 흰 옷에 글자나 그림을 남기는 것이다. 신촌극장의 기본 바닥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지만 이 공연에서는 바닥이 따로 설치되어 있기에 ‘무대에 들어왔다’는 것이 한층 선명하게 감각된다. 유성펜 뚜껑을 열었을 때의 알싸한 냄새, 앞에 선 무용수의 맥박과 그새 촉촉하게 배어나온 땀, 조명을 받은 무대의 온기 따위를 느끼며 옷에 낙서를 한다. 옷감 너머 체온을 지닌 사람들이 느껴진다. 이들이 살아있고,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한 뒤에야 공연은 더 깊은 곳으로 돌입한다.
이들이 말한 내용과 방식이 다양했듯, 이들의 움직임 또한 서로 다른 내용과 방식으로 전개된다. 무용수들은 각자 숙련된 형태로 몸을 사용한다. 나비는 관절과 근육을 경직하고 이완하며 신체를 정교하게 이동시킨다. 경주마는 인라인 스케이트의 바퀴까지도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민첩하고 힘차게 지면과 마찰한다. 청개구리는 신중하게 낙하를 재현한다. 통제할 수 없어 위태로운 몸짓이 아니라, 꺾이고 떨어질 것을 알고 있는 채로 꺾이고 떨어진다. 뒤이어 이들 사이에서 교감이 일어난다. 나비와 청개구리는 대칭을 이루듯, 거울상을 그리듯 마주 움직이고, 경주마와 디조니소스는 밀접한 거리에서도 서로를 위협하지 않고 팔다리로 궤적을 그린다.
수평적 상호작용은 이 작품의 주요한 특성이다. 공동창작이라는 작업방식은 작품의 형태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공연은 ‘펼쳐진’ 형태를 취한다. 감정과 감각이 고조되는 지점은 있지만, 다른 것을 압도하는 ‘제일 중요한 것’을 따로 우뚝 세워두지는 않는다. 특정 개인이 제시하는, 아주 뾰족하고 물러서지 않는, 단 하나의 주제문 같은 것은 없다. 대신 ‘모두가 공평히 말할 것’이라는 약속, 말하는 과정이 안전하고 말하는 내용은 경청될 것이라는 약속이 그 자리를 채운다. 말하자면 이들은 서로를 비전으로 갖고 무대에 오른다. 이들은 끝없이 넘어지고, 발목을 꺾으며 주저앉고, 목청을 데우고 긁어가며 소리친다. 몸을 완전히, 다 사용한다. ‘자유롭게 추기’라는 말이 곧장 즉흥이나 무질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몸들, 복수형의 몸은 여기서 저기로 움직이며, 좌표를 그리기보다는 영역을 확장하듯 더 넓은 면까지 뻗어나간다. 잘 이야기된, 약속된 자유가 이들을 해방한다. 이들은 서로를 본다. 서로를 보고, 눈빛을 주고받고, 다시 뒤섞여 움직인다. 이들이 달리면서도 부딪히지 않을 때, 관객은 이들이 만들어둔 정교한 몸짓과 안전한 신뢰를 확인한다.
좌표의 무용함과 준비된 자유는 철제 구조물의 분해로도 이어진다. 무용수들은 따로따로 분리되는 프레임을 떼어내고 원하는 위치로 옮긴다. 고정될 것 같은 무대장치가 해체되고 운반된다. 면을 채워넣지 않은 선적 조형물로서의 프레임은 그 사이를 통과할 수 있게끔 하며, 그 위로 팽팽하게 랩을 당겨 씌우면―즉 임시의 면을 만들면― 유리창처럼 빛을 투과하기도 반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임시의 면은 파괴될 수 있어 의미 있다. 나비가 번데기 고치처럼 랩으로 동여매진 구조물 안에 머무를 때, 청개구리는 하이힐 굽으로 랩에 구멍을 낸다. 밀폐된 공간에 숨구멍을 내듯이. 공간이 전복되고 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이 행위는 일방적으로 ‘구하는’ 동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나비는 결국 스스로 침잠하는 세계에서 빠져나온다. 자신의 팔과 다리로.
공연의 말미, 마침내 다함께 프레임 바깥으로 나와 객석의 지척까지 다가오며 춤을 출 때, 직관적으로 전달되는 감흥이 있다. 그것은 몸이 주는 감흥이자 내밀한 것을 공유한 관계가 주는 감흥이다. 이는 <우리가 모이면 축제다>의 재미나기도 찡하기도 한 면모다. 관객이 퍼포머의 신체와 움직임에 더해 언어화된 서사까지도 공유받으며 생기는 유대감과 친밀감은 클라이맥스에서 방류된다. 관객은 이들을 보고 들었을뿐만 아니라 실제로 접촉하기까지 함으로써 순간적 공동체가 된다.
공연을 보다 생각이 뻗어나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생각의 흐름을 공연이 ‘지지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꽤나 특징적이다. 연극을 보면서, 특히 개인적으로는 밀레니얼의 청소년기를 소환하는 연극을 보면서 기억을 반추하는 것은 최근의 달가운 일 중 하나이지만, 무용이 기억의 촉매제가 되는 것은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 역시도 ‘몸, 소리, 말’이 병렬함으로써 생겨나는 힘이 아닐까 싶다.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내 이야기’와 꼭 닮아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아주 구체적인 이야기, 타인의 핍진한 소서사는 그 자체로 나의 기억을 꺼내보일 원동력이 된다. 너무 달라서, 너무 비슷해서 같은 내용상의 이유일 수도 있고, 상대가 말하니 나도 말하게 되는 인지상정적(?) 이유일 수도 있다. 이 공연은 그 ‘지어내지 않은’, 피상적인 데 그치는 대신 흉내낼 수도 없을 만큼 구체적인 소서사의 공유에 움직임을 덧입힌다. 말이 불러오는 기억뿐만 아니라 근육이, 몸짓이 불러오는 기억이 뒤섞여드는 것이다. 말과 몸은 위계를 갖는 대신 동등하고 나란하게 역할한다. 말에게 감각을 빼앗기는 공연의 도입부에서도 몸은 그 물리적인 파급력을 표출하며, 반대로 몸에게 주도권을 준 것 같은 공연의 중후반부에서 말은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환청처럼 속살거리기도 아주 또렷한 형태로 전달되기도 하는 음성 레코딩을 통해, 음악이자 음향이자 대사의 역할을 오고가는 것이다.
그 이유 내지는 촉매제가 무엇이 되었건, 별안간 떠오르는 기억들은 공연 중간중간 관객을 습격하고 또 위로한다. 실은 옷 위에 글씨를 쓸 때부터 생각의 꼬리물기가 시작됐다.
안양에 있던 인라인스케이트 경기장이 철거된다는데, 근육이 간직한 운동의 기억이 아닌 머리가 간직한 공간의 기억은 어디로 갈까요,
꽃잎은 항상 홀수라는데, 나비도 그걸 알고 있나요, 나비에게 사실 꽃은 별 상관 없는 대상일까요,
디조니소스의 타이다이 의상은 우연히 하늘색과 분홍색인 건가요, 논바이너리의 상징일까 아니면 한 시기를 풍미했던 로즈쿼츠와 세레니티의 고채도 버전인 걸까요,
애먼 생각들이 머리를 분주하게 스치고 나면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나라면 축제에 어떤 이야기를 들고 갈까. 어떤 나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혹은 나의 어떤 부분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동안, 공연 시작 전부터 공간에서 흘러나오던 ‘소리내고 싶다, 소리치고 싶다’는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충격적인 선언이어서가 아니라, 그 문장이 이 공연의 정직한 소갯말이자 아름다움처럼 느껴져서다. 소리내고 싶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 어쩌면 그 자체가 수많은 작품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일 것이다.
세 인물이 말하는 삶(의 역사)은 그들이 대변하는 업이나 젠더에 덧입혀진 편견에 금이 가게 하지만, 그 방식은 단순한 전면 부정이 아니다. 이들은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이러하다’라고 말하기를 선택한다. 무용수를, 퀴어를, 프로스포츠를 둘러싼 단순하고 평면적인 생각들에 부정문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무엇보다 확실히 알고 있는 나라는 존재의 진실을 솔직하게 꺼내놓기를 택한다.
그렇기에, 혹은 그러나, 이 공연의 매혹이 ‘남들과 다른’ 이야깃감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엔 고개를 젓고 싶다. 이들은 남다른 개인사를 가졌기에 주인공이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사를 꺼내놓았기에 주인공이 된 것에 가깝다. 작품은 오히려 남들과 다른 ‘대단한 사연’이 있어야만 이야기가 되는 것도, 가치가 되는 것도 아님을 주지한다. 사실 모두가 남들과 다르고, 다른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각자의 역사와 목소리와 마음을 가진 존재니까. 무대 위 인물들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상대에게 가닿고 함께 춤을 춤으로써 ‘축제’에 도달한다. 축제란 얼마나 큰 용기를 주는 곳인가. 거리에서 춤을 추지 못하던 사람을 춤추게 하는 것, 낯선 사람과 프리허그하게 하는 것, 선뜻 소리치고 속삭이게 만드는 것은 축제의 힘이다. 이들은 축제의 힘 앞에서 자신의 일상과 당사자됨을 표현하고, 그 태도로 인해 축제의 주인이 된다. 그러니 어쩌면 ‘남다른 개인사’란 말은 부정하되, 이들이 특별하다는 것 자체는 긍정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 특별함은 거창함보다는 고유성 자체일 것이다.
‘아니다’ 대신 ‘축제다’로 끝나는 제목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지만, 앞으로도 나는 부정의 문장이 지닌 아름다움과 통찰을 저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부정당하지 않고, 오롯하게 제 힘을 가진다. 그러니까 말할 것이다. 우리가 모였는데, 축제가 아닐 리 없다. 그 어떤 위대하고 엄중한 조건도 이 모임이 축제가 아니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모이면, 축제다.
추신
조금 다른 얘기지만, 예외와 유예가 가진 느리고 대안적인 가능성은 때로 불분명하고 비경제적인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맞을 수도 있다거나 아닐지도 모른다는 문장이 제목의 세상에서 탈락하길 바라지는 않기에 슬쩍 덧붙인다. 언젠가는 ‘우리가 모이면 축제일지도요, 아니면 말고’ 같은 제목의 공연이 태연한 얼굴로 등장해도 좋겠다. 그때는 관객인 내가 ‘맞아요, 축제예요!’ 대답하면 되니까.
필자소개
김송요: 덜 재미있어도 남 속상하지 않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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