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4. 17:38ㆍReview
시공간 속 좌표 찍기. 그리고 별자리 잇기.
상상만발극장1 <연극철지남>
글_정진웅
점 하나
공연 제목을 음미한다는 핑계로 꽤나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다가 뒤늦게 공연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공연은 8월의 무더위 속에서 진행됐고, 달이 바뀌면 더위가 물러가고 가을이 오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추석 연휴에도 내내 폭염주의보가 발령되었다. 철이 바뀌지 않는 기괴한 기후 속에서 신촌 거리의 '철 지남'을 곱씹어 본다.
상상만발극장1은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24에 참여해 8월 16일부터 사흘간 신촌 스타광장 일대에서 <연극철지남> 공연을 올렸다.
점 둘
공연 안내소로 가는 길. 예약 시간은 19시 20분. 저무는 해가 머쓱하게 씨익 미소를 띠며 당당히 얼굴을 들이미는 열대야 앞에서 이미 두 손 두 발 다 든 상태였다. 이 날씨에 야외에서 하는 공연이라니. 하지만 무엇이든 가능한 프린지페스티벌. 어차피 티셔츠는 종일 몇 번씩 젖었다 말랐겠다, 온몸으로 공연을 받아들일 준비는 돼 있었다.
연극이 철 지난 예술이긴 하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늘어놓는 연극인들의 자조는 심심치 않게 듣는다. 나의 연극을 향한 애정도 ‘그래도 세상은 연극이 구한다’는 자아도취와 ‘어차피 우리끼리만 보는 스러져가는 예술’이라는 자괴감 사이를 자주 오가며 요동친다. 그렇게 ‘연극철지남’ 이라는 띄어쓰기 없는 다섯 자 제목과 철새가 날아가는 포스터를 처음 보았을 때
“응~ 연극은 철 지난 예술 ㅋ“
이라고 누군가가 놀리는 것만 같아서, 그런데 실은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씁쓸해할 것만 같아서, 위로를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연극이 왜 아직도 필요한 것인가 하는 질문은 어쨌든 연극을 하겠다는 사람 모두가 나누어 진 짐이니까.
점 셋
되돌아보면 조금 불편한데 참 다정한 공연이었다. 처음의 낯섦과 어색함을 꾸준한 친절함으로 무마해 준 공연이었다. 아니, 무마를 넘어 마음을 활짝 열게 해주었다.
점 넷
현대백화점 신촌점 유플렉스 입구 앞 공연 안내소. 티켓과 함께 초록 민무늬 에코백을 받았다. 그런 다음 공연 시작 지점을 안내받았다. 길 건너에 보이는 일식집 앞. 그리로 걸어가면 공연이 시작될 것이라고. 관객은 나 혼자이고 신촌 거리를 걸으며 관람하는 형식이라고. 시작점이 어딘지 미처 잘 이해하기 전에 얼떨결에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약간 긴장이 되었다. 아무리 봐도 공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없는데.. 갑자기 무언가 일이 펼쳐질 것 같기도 했다. 무심한 거리의 사람들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공연 보러 오셨죠?”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놀란 마음을 숨기며 공연 시작 장소를 잘 이해 못한 것 같다고 대답하자 괜찮다고 본인을 따라오라며 안내를 해주었다. 안내해 주시는 스태프 치고는 굉장히 붙임성이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쉬지 않고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오는 데에 얼마나 걸렸는지, 날이 너무 덥지는 않은지. 그렇게 느닷없이 시작된 스몰 토크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쩜 스태프가 아니라 퍼포머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현대백화점에 들어갈 거라고 했다. 목적지를 모르는 걸음. 갑자기 시작된 처음 본 사람과의 대화. 어느새 그의 말의 주제는 ‘유리’라는 물질에까지 뻗어나갔다. 유리는 엄밀히 말하면 고체도, 액체도, 기체도 아닌 참 신기한 물질이라고. 그걸 ‘비정질’이라 부른다고. 유일한 관객으로서 그의 말에 적절한 표정과 제스처로 응하는 의무를 다하면서도 머릿속은 그 정보들을 공연의 맥락으로 이어보려고 다소 분주했다.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에 연달아 올라 우리는 꽤 고층까지 올라갔다. 그가 이끈 곳에는 커다란 ‘유리’를 통해 신촌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감상했다. 에스컬레이터 벽, 엘리베이터의 거울, 상품 진열장 등. 그러고 보니 지나온 길에 있던 많은 것들이 유리였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와 함께 다시 일층으로 내려와 아까 공연 안내소가 있던 쪽 입구로 나왔다.
점 다섯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나는 새로운 안내를 받았다. 아까 받은 에코백에 들어 있는 편지봉투를 열어보라고. 봉투에는 누군가가 손으로 급히 메모한 듯한 약도가 있었다. 이제 나 혼자 떠날 시간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덩그러니 광장에 서있는 나. 다다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어딘가 중요해 보이는 이 비밀 지도. 고개를 드니 거리에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이 내 레이더망 안으로 들어왔다. 저기서 누가 누구를 큰 소리로 부르는 게 왠지 내 이름인 것만 같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또 다른 사람이 갑자기 멈추어 말을 걸 것 같았다. 갑자기 지금 이 순간 신촌 바닥의 주인공은 나였다.
점 여섯
“⊙표시의 메시지를 찾아 모으세요”
지도를 따라가 첫 번째 표식을 찾았다. 지도와 같은 ⊙표시가 바닥에 그려져 있었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겨보니 쌓여 있는 플라스틱 의자들 위에 쪽지 하나가 의뭉스럽게 꽂혀 있었다.
옳거니. 지금 내 왼쪽에 몇 걸음 떨어져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저 남자. 최대한 자연스럽게 피우고 싶으셨겠지만 이걸 어쩐다, 나는 알아채 버렸다. 관객의 시선을 의식해 버린 어딘가 어색한 배우의 움직임. 그런 연유로 쭈뼛쭈뼛 쳐다본 것뿐인데, 그가 오히려 나를 보며 어리둥절해하더니 약간 기분이 나쁘단 듯 고개를 돌려 담배를 끄고는 멀리 가버렸다. 배우가 아니었나? 아니면 이것도 의도된 연출인가?
이 벚꽃 동산은 빛 때문에 팔리게 되어...
이건 무슨 말일까. 벚꽃 동산? 안톤 체홉? 도대체 이 공연 뭐지? 얼른 다음 메시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점 일곱
다음 쪽지에도 아마도 <벚꽃 동산>에 나오는 대사가 적혀 있었고 그 뒷면에 맥도날드 2층으로 오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실제로 쪽지가 붙어 있던 건물 맞은편에는 맥도날드가 있었다.
왠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돌이켜 보면 그날의 맥도날드의 풍경은 그저 지극히 맥도날드스러웠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거대한 이머시브 무대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2층에 오르니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는 자기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그렇게 만난 두 번째 퍼포머. 그는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앞에 마주 앉았다. 인사를 했지만 그는 다짜고짜 종이에 글씨를 써서 답했다. 맥도날드 쟁반에 까는 종이 뒷면이었다. 나도 수기로 답해야 했다. 그는 글씨를 적으며 장난스럽고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이런 일에 적응이 된 건지 이번엔 그 미소가 자연스럽게 내 장난기도 끌어냈다.
우리는 별것도 아닌 것들에 킥킥댔다. 날씨에 대해, 좀 더 자세히는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걸었는데 당신은 이토록 시원한 곳에서 편히 있었음에 대해. 갑자기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허구한 날 맥도날드에 죽치고 앉아 있던 시간이 떠올랐다. 야자 없는 날, 모의고사를 본 날, 누군가가 비밀을 말해주겠다고 한 날, 슬픈 친구를 위로해 주던 날.
그는 낙서할 때 자주 그리는 나만의 그림이 있냐고 물었다. 종이에 그걸 그려준 다음 그 사연에 관해 설명하던 와중에 어느새 종이가 꽉 차갔다. 그가 대뜸 종이를 더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갑자기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았고, 잠시 후 창밖에서 내게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고,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는, 이내 종이 한 장을 손에 들고 다시 나타나 허겁지겁 맥도날드로 뛰어오는 걸 보았다.
잠시 멍한 사이 그는 숨을 몰아쉬며 다시 내 앞에 앉았다. 방금 내가 본 게 뭐지? 창밖에 있던 사람은 같은 착장을 한 대역이었을 거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는 놀랍도록 민첩했다. 그가 가지고 온 종이는 처음의 지도보다 더 먼 길을 안내하는 지도였다. ‘미네르바’라는 이름의, 실제로 맥도날드 근처에 있는 카페의 기념 엽서였다. 그는 거기에 내 시그니처 낙서를 그려주었다. 그게 그가 내게 건넨 작별 인사였다. 얼떨떨하면서도 마법 같은 일이었다.
점 여덟
지도를 따라간 끝에 나는 미네르바 카페의 입구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 발견한 쪽지 뒷면엔 이번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걸려 오는 전화를 받으세요.’ 실제로 휴대폰이 들어 있던 호주머니께가 근질근질했다.
그렇게 세 번째 퍼포머는 내게 전화로 말을 걸어왔다. 이제는 지도도 없었고 그가 설명해 주는 대로 걸었다. 골목에서 나오면 누군가 내게 카메라를 줄 거라고 했다. 말대로 어떤 사람이 뿅, 하고 나타나 내게 작고 장난감처럼 생긴 디지털 카메라를 주었다. 나는 정체 모를 목소리와 이번에도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오묘한 친근함과 안전함에 속얘기 겉얘기 가릴 것 없이 술술 꺼내게 되었다. 먼 곳으로 떠난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나와 아무 상관 없는 낯선 이와 얘기를 나누듯. 내 두서없는 말을 듣던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는 내가 혼자 걸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을 소개해 주었다. 담장 넘어 보이는 꽃의 이름. 어느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만 잠깐 보이는 십자가. 그는 들고 있는 카메라로 내가 담고 싶은 것을 찍으라고 했다. 그는 자주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 주변에 어떤 것들을 지나치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우주에 있는 인공위성처럼 내 위치정보를 들으면 그곳에서 내가 볼 수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는 우주가 아니라 내 뒤에 있었다. 어느 지점에서 나를 잠시 멈춰 세우더니 뒤를 돌아보라고 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손을 흔들었다. 온라인으로만 알고 지내던 오랜 친구를 처음 만나듯 우리는 만났다.
어색하고 수줍게 길을 마저 걸었다. 이제는 시각적인 지도에도, 청각적인 설명에도 의지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롯이 그와 발맞춰 걸으면 되었다. 신기한 반가움이 다하고 적막이 마침 찾아오려 할 즈음 그는 내게 마지막 지도를 주고는 도착지까지 혼자 걸어가라고 안내했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뒤돌아 걸었다. 대체 마지막 지점에는 무엇이 있을지.
그런데 마지막 지점에 무엇이 있든,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작금의 산책에서 만난 세 명의 퍼포머가 전해준 다정함과 친절함에서 이미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도착지에 이를 때까지 그 충만함을 음미했다.
다음에 이 세 사람을 조우한다면 그때도 이런 느낌일까. 다음에 방문한 신촌은 어떤 모습일까. 언젠가 한 번 다시 이 길을 혼자 걸어보고 싶다.
한여름 밤에 각자의 방식으로 말을 걸어와 준 세 사람. 텁텁한 열대야에도 낭만이 있을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해 주었다.
점 아홉
어떤 연출가가 기억을 주제로 한 공연에 대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것을 들은 적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의 기억의 기억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신촌이라는 내 시간과 공간에 몇 개의 ‘그때-거기’의 좌표가 새로 찍혔다. 밤하늘에 뜬 별을 이어 별자리를 만들듯 신촌에 찍힌 나의 점들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까.
어떤 점들은 다소 멀어서 아직 잘 이어지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언젠가 그 사이에 새로운 점이 찍힌다면 뒤늦게, 또 예상치 못하게 어떤 모양을 띨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 한 번 더 달라질 그날 밤의 기억이 기대된다.
1) 연극철지남_온라인프로그램북 https://imagineatre.com/93 게재일: 2024년 8월 14일, 접속일 2024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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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진웅
팔꿈치의 활동범위라는 예술단체에서 연출, 작가, 드라마터그, 무대감독 등으로 일한다. 공공공간이나 거리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지는 극적이고 마법 같은 순간을 좋아한다. jinw214@gmail.com
작품 소개
상상만발극장1<연극철지남>
일시 : 2024. 8. 16.(금)-8.18(일) 17:40, 18:00, 18:20, 18:40, 19:00, 19:20 장소 : 신촌일대 개념, 연출, 퍼포머 : 조서연 공동구성, 퍼포머 : 김상훈, 이라임 공동구성 : 박해성 무대감독 : 김현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24 참가작 |
본 리뷰는 2024년 거리예술·서커스 창작지원사업 선정작-2024년 서울문화재단 거리예술·서커스창작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 <일상공간예술비평:잇몸 잘 쓰기>-의 일환으로,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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