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지도 위 파란 점, 그 아래 이야기 : 민수민정<GPS(Global Positioning Story)>

2024. 10. 2. 15:05Review

 

지도 위 파란 점, 그 아래 이야기

민수민정<GPS(Global Positioning Story)>

 

글_루시

 

사진: 우주동물, 제공: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작은 갤러리에 모인 당신들을 둘러본다. 이곳으로 목적지를 설정해 찾아왔을 사람들. 누군가는 지하철을 반대로 탔을 테고, 누군가는 한 정거장 먼저 내리는 바람에 오래도 걸었을 테다. 지도 위 파란 점이 우리를 쫓는 건지, 우리가 파란 점을 쫓는 건지도 모른 채로 이곳에 와있다. 파란 점은 곧 GPS. 시스템. 인공위성은 무미건조하게 우리가 길을 잃고 찾으며 이곳에 온 것을 본다. 

인공위성은 지금 우리를 이상하리만치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아주 먼 곳으로 떠나고 있다. 지도에는 표시할 수 없는 오랜 과거부터 만들어 온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GPS (Global Positioning Story)>, 민수민정의 이야기가 전시장의 흰 벽 위로 펼쳐진다.

 

공연 중 음악가는 연주하던 오션드럼과 레인스틱을 관객에게 나눠준다. ❘ 사진: 우주동물, 제공: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시스템이 허물어진 곳에서

 

미디어아트 콜렉티브 민수민정은 ‘특정한 경험 이후 남겨진 파편’에 세밀하게 집중해 미디어/사운드 아트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타국의 코로나19 봉쇄 상황에서 겪은 두려움, 그럼에도 짙게 남았던 짧은 환대의 경험을 우화로 그려낸 <어서 오세요, 아름다운 나그네여(2022)>, 삶에 깊게 남아버린 미움과 슬픔의 잔해를 친애하는 마음으로 그려낸 <남겨진 것들을 사랑하기로 해(2021)>가 그 예시다. 

철저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던 시절과 남은 의미를 찾아 풀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번 작업은 관객을 적극적인 방식으로 참여시킨다. 야외의 큰 구조물에서 이미지를 감상하게 만드는 대신, 민정의 이번 프로젝션 맵핑은 새하얀 벽체를 채우며 새로운 공간을 구성한다. 노래가 시작되고 관객의 손에 들려준 악기는 저마다 예측할 수 없는 소리를 내며 공간과 함께 숨 쉰다. 관객과 민수민정이 함께 눈을 맞출 때, 공연 전 나눠준 작두콩 차를 한두 모금 마실 때 우리는 신비로우면서도 따뜻한 공간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민수민정은 ‘나는 길을 자주 잃는다고. 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고.“ 관객에게 조심스럽게 첫 마디를 뱉는다.

도시와 사막과 우주를 지나 이 세계의 단편적인 장면들이 펼쳐지고, 리듬감 넘치는 추상이 우리를 낯선 곳 한중간에 놓아두는 동안 국적을 알 수 없는 악기들의 소리가 튀어나온다. 리듬을 계속 바꾸는 동안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야기 낄 틈 없이 이방인이 된 나’가 홀로 놓여 있다. ‘겉과 속까지 이방인이 된 나’는 혼란스럽다. 철저히 외부인이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다가도 지독히도 외로워지고, 타인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다르다는 걸, 혹은 같다는 걸 동시에 느낀다. ”당신도 길을 자주 잃을 것“이라는 믿음은, 주어진 길을 잘 걷고 있는 듯한 ‘타인’과 굳건히 느껴지는 ‘시스템’ 앞에 무너지고 다시 일으켜 세워지기를 반복한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미술관 밖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여기기도, 아니기도 했지만 민수민정이 만든 이 세계에는 원주민도과 구성하는 시스템이 없으니 모두 다 함께 이방인이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긴 에필로그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가 파란 점으로만 존재하는 지도를 바라보면서.

 

사진: 우주동물, 제공: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어린 이방인의 도시에서

 

내가 살고 있는 일상 속 공간을 낯설고 새롭게 보게 되는 게 거리예술의 미학이라면, 민수민정은 차근차근 그 길을 밟아왔다. 청주 중앙시장 상가 맘모스백화점의 사라진 과거를 주목하고 예술가의 역할을 고민하던 <방 안의 맘모스(2022)/맘모스를 잊는 시간(2023)>과, 신촌 일대의 사라진 예술 공간과 축제를 애도하던 <신촌투어 : 열리지 못한 축제들의 거리(2023)>는 지도와 목소리, 노래와 높이 든 깃발을 가지고 관객을 거리로 직접 이끌며 거리예술을 했다. 반면, 이번 작업은 관객을 물리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대신 민수민정이 보는 세계를 각자의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관객들이 모여있는 이곳은 신촌 기차역 앞 갤러리다. 신촌 기차역은 가장 오래된 서울 도심 속 역이자 이 지역에서 가장 빨리 서울역에 닿을 수 있는 통로이지만, 지금은 서울에서 가장 이용객 수가 적은 역이다. 신촌-이대라는 드넓은 대학 상권의 중심에 있던 이 역사엔 이제 북적임은 없고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무성한 영화관만 불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신촌은 예나 지금이나 ‘어린 이방인’의 동네다. ‘상경’이라는 단어를 여전히 우상화하는 오래된 도시에서 온 학생들에게 신촌과 서울은 이국이다. 기차를 타고 본가에서 올라오는 날이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서울로 향할 수도 없어 만원 지하철 손잡이에 몸을 매달던 날들이 내게도 익숙하다. 버스를 꽤 자주 반대 방향으로 탔고, 절망하면서도 해방감을 느꼈다. 어린 이방인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무수히도 복잡하다.

그런 기차역, 그 바로 앞 ”무료 전시“라는 이상하고 다정한 글씨를 내건 작은 갤러리. 그리고 우리와 민수민정. 이 모든 게 하나가 되던 순간은 연주하던 민수가 핸드폰을 들고 갤러리를 빠져나가 이방인이 사는 오래된 하숙집, 자취방을 거쳐 신촌이 한눈에 보이는 공원으로 향했을 때다. 화상 통화로 연결된 화면을 통해 흔들리는 걸음을 느끼고, 실제로 민수와 예술가들이 사는 신촌을 그의 시선으로 본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 위치하게 된 ‘이야기’를 생각하며 신촌을 두리번거린다. 지방 도시를 떠나온 나는 이곳에서 낯선 사람, 공간, 가치, 시간들로 움직여 왔다. 늘 용감하게 떠나와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마주했기에, 삶을 살아왔기에 우리는 다시 다 함께 이방인이다. 늘 모든 게 낯선 이방인처럼 거리예술로서 이 거리도 새롭게 보기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음악가는 핸드폰을 켜 관객을 비추곤 갤러리를 뛰쳐나간다. 목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신촌의 풍경이 펼쳐지고 그 위로 별 모양 오브제를 띄우며 공연은 끝이 난다. ❘ 사진: 우주동물, 제공: 서울프린지페스티벌

 

함께 길을 잃는 거리에서

 

긴 에필로그 속에서 왜 관객이 거리에 나가지 않았는지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늘 함께 걸을 순 없다. 거리는 여러 이유로 혹독하고 위험해지고 있다. 사라진 축제, 없어지는 공간, 내몰리는 사람들. 우리는 여러 이유로 걷던 거리를 많이도 빼앗겼다. 이런 세계를 함께 걷지는 못하더라도 서로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아준다면, 함께 길을 잃어도 보고 용기 내 탐험한다면 멀리 있어도 괜찮다는 걸 민수민정은 이야기하는 듯하다.

길을 잃어도 좋다고 말하던 민수민정은 이제 관객에게 함께 길을 잃자고 이야기한다. 두리번거리고 주위를 살피며 이방인이 된 서로의 손을 잡기로 한다. 텅 빈 갤러리가 빛과 소리로 가득 채워져 우주를 만들 때 별 조명이 내려앉은 자리를 보며 함께 길을 잃는다. Global Positioning System은 언제나 가장 최적의 길, 효율적인 길을 추천 경로로 내세울 테지만, Global Positioning Story는 아주 반대 방향으로 이동 경로를 만들어 왔다. 그런 서로를 이해하며 우리는 이방인이기를 기꺼이 선택한다.

 

멀리 있는 당신에게 내가 이 작품을 보는 시선을 보낸다. “나는 멋진 작품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에필로그 속 문장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이 멋진 작품 말고 중요하게 여긴 것을 “공연이 끝나도 삶이 계속된다”는 뒷문장을 곱씹으면서 찾아본다. 이 글에 무수히도 많이 적었던 “우리”라는 부드러운 발음의 대명사가 반짝이며 내 시선을 이끈다. 민수민정이 앞으로 만들 “우리-”로 시작하는 문장에 우리는 자주 목적지를 설정하지 않을까.

대사를 빌려 쓰자면 “나는 멋진 작품을 잘 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 글의 온점을 찍어도 민수민정과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될 테니. 멀리 있어도 우리 함께 걷자고 당신에게 전한다. 지금까지 나와 당신의 global positioning story, 지도 위 파란 점 아래 있는 이야기였다. 무미건조한 인공위성은, 그 시스템은 절대 알지 못할 비밀스러운 이야기다. 

 

 

필자 소개

루시

조금은 묘한 이야기를 미묘한 마음으로 씁니다. 한 권의 책을 만들었고, 오래된 이야기가 되고 싶어요.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를 사랑할 수 있기를.

 

작품 소개

민수민정<GPS(Global Positioning Story)> 



일시 : 2024. 08. 14 19:00, 08.15 15:00, 19:00

장소 : 갤러리아미디신촌(서울서대문구 신촌역로21 2층)
공동창작, 출연 : 이민정, 김민수
현장운영 : 골댕이, 루치, 사회상규, 열무, 하랑

 

 

본 리뷰는 2024년 거리예술·서커스 창작지원사업 선정작-2024년 서울문화재단 거리예술·서커스창작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 <일상공간예술비평:잇몸 잘 쓰기>-의 일환으로,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