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3. 14:13ㆍReview
벌어진 사이로 흐르는 진동을 향해갈 때
다이애나밴드<향하는 귀, 흐르는 걸음, 벌어진 사고>
글_자림
긴 여름이 지나간 홍제천의 시월은 스산하기보다는 시원했다. 보틀팩토리 문을 여니 사람들이 왼편 테이블에 모여 있었고, 시간대별로 나뉜 조를 표시하기 위해 색색의 리본을 잘라 가방이나 팔목 등 보이는 곳에 묶어두어야 했다. 그게 산악회 리본처럼 보여서 마치 내가 비공식적인 목적이 있는 탐험 모임에 들어온 것 같았고 MobMuPlat앱을 설치하며 그 비밀스러운 임무를 부여받는 것 같았다. 같은 색의 리본을 단 우리는 탐험대가 되어, 미지가 된 홍제천을 들으려고 나섰다.
홍제천을 산책하는 이들이 보기에 우리의 모습이 수상하긴 했을 거다. 주황색 모자를 쓴 이의 인솔로 삼삼오오 헤드폰이나 이어폰과 연결된 휴대전화를 휘저으며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이. 분명 거기에 ‘볼만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도 실제로 뭐하냐고 물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구간마다 설치된 정자에 제멋대로 놓인 의자들처럼, 우리는 이곳을 쉼의 장소로 이용하는 이들 곁에 가 앉거나 서 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나는 우리가 정말 은밀한 탐험대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운드워크의 권장 순서는 이랬다. 보틀팩토리에서 출발해 홍제천 곳곳의 구간과 지점에서 마주치는 소리에 초대되고, ‘노노’를 장착하는 ‘궁극의 듣기’를 체험하고, 미학관에서 전시를 관람한 후 다시 보틀팩토리에 돌아오는 것으로. 더불어 과정 중 언제나 흐르고 있는 환삼덩굴 라디오를 청취할 수 있었다. ‘노노’ 타임을 제외하고는 구간이나 지점에 머무는 시간이나 순서의 제약이 없었기에 우리는 같이 출발했지만 각자의 경험을 했다.
MobMuPlat앱에 설치한 프로그램의 나침반 방향에 따라 나름의 속도로 걷거나 멈췄다. 이미 벌어진 사건을 향해 가고 있으면서도 사건이 뒤에서부터 감싸오는 것만 같았다. 첫 지점에 다다라 뽕짝이 흐를 때, 자꾸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금인가? 싶어서. 하지만 나는 다른 이가 다른 시간에 경험했던 소리 안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겹친 지금의 소리도 함께 들었다. 그건 적어도 나에게는 지금일 텐데.
계속 ‘지금’이 빗겨나갔다. 〈뇌절 트랙〉을 들으면서 분명 일직선으로 걷고 있는데도 다른 곳으로 계속 새고 있었다. 그러다 다리와 연결된 콘크리트 언덕에서 고양이들과 놀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올블랙의 등산복을 입고 있던 그는 고양이 낚싯대를 휘두르며 노란 줄무늬 고양이 세 마리의 주목을 받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몹시 다정하달까 코믹해서 나는 들고 있던 기기로 사진을 찍었다. 프로그램에서 벗어나서인지 그 순간 트랙이 끊겨 버렸다. 나는 당황하며 다시 트랙을 재생해 보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궁극귀 ‘노노’와 ‘노노의 식솔들’은 새어나간 것마저 주의 깊게 찾도록 했다. 돌의 피부를 스치는 공기나 물 표면의 안과 밖, 풀과 아스팔트 사이, 하천 위로 흐르는 소음... 어디로 가버렸지? 보라색의 깔때기 귀로 주변을 주워 담는 내가 어떤 개는 못마땅해 왈왈 짖었다. 나는 난데없는 이방 존재 취급에 왠지 더 즐거워졌다. “여러분~ 이제 다들 여기로 모이세요~” 아마존 익스프레스 알바생처럼 노란 외투를 입고 있는 민옥이 명랑하게 소리쳤고, 나는 다시 그냥 인간으로 돌아왔다.
‘환삼’은 ‘환상’의 오타인 걸까? 검색 결과 ‘환삼덩굴’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것의 사진도 찾았다. 사진이 떠오른 기기 옆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같은 이미지가 있었다. 천변에 이미 넓게 펼쳐져 있던 것이다. 희주도 〈환삼덩굴 라디오〉 진행을 홀로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심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조곤조곤한 말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서 그가 정말 심심한지 심심하지 않은지 판단할 수 없었다. 순서를 매긴 시퀀스에 따라 정보와 감상, 이야기를 넘나들며 희주는 주파수를 방출했고 나는 간간이 그걸 수신했다.
기기를 통해 들려오는 농구공 소리와 지금 농구를 하는 사람들의 소리, 그리고 동행인의 ‘나도 농구를 좋아했는데…’ 하는 말은 먹고 있던 초코바(보틀팩토리를 나서기 전 모두에게 챙겨준 것이다)가 그랬듯이 동시에 다른 맛을 냈다. 연리지를 바라볼 때 흐르는 대칭적인 피아노 연주처럼 각각의 맛들은 서로 가까이 다가가 얽혔다. 얽힌 것들의 빈틈에서 발생한 소리가 미학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가만히 앉아 사물들이 내는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듣기만 하는데도 (엄밀히 말하면 찾고 들으며 걸었지만)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요되었다. 나는 이 걸음에서 무엇이 능동적이었고 무엇이 수동적이었는지 가늠할 수 없다. 몸의 구멍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에 친절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다만 홍제천을 ‘이런 방식으로’ 걸어본 적은 없었다. ‘이런 방식’이란 홍제천 곳곳의 존재와 사건을 온몸으로 감지하면서 걷는 것이다. 산책을 좋아해 자주 걸었다고는 해도, 내 걸음의 목적은 분명했다. 친구와 이야기를 천천히 나누기 위해서라거나 자전거를 타고 한강까지 달린다거나 잠시 환기하면서 공상에 빠진다거나 하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나를 끌어들이고, 내가 그 속에 빠져들도록 허용한 일은 없었다.
내게 이 걸음의 의미는 자리를 바꿔보는 일에 있다. 초대하는 이와 초대에 응하는 이, 상황을 주도하는 이와 수용하는 이, 드러나는 이와 찾는 이 사이를 횡단하며 기꺼이 얽히는 일이다. 얽힘을 느끼는 일이다. 빈틈이 생기고, 소리가 흐른다. 앉아서 듣는 이가 있다. 길을 잃을 일은 없다. 정해진 길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가 구멍을 드나드는 모든 것에 친절해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필자 소개
자림
무서워하는 게 많은 만큼 그것들을 알고 싶어 합니다.
피안으로 가고 싶으니까, 피안을 만들고 싶어요.
도망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웃으며 뛰어가고 싶고요.
그 안에서 실을 뽑아 엮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저는 자림입니다.
공연 소개
다이애나밴드 <향하는 귀, 흐르는 걸음, 벌어진 사고>사운드워크 일시: 2024.10.17-10.20 장소: 보틀팩토리, 미학관, 서대문구 홍제천 산책로 일대 전시: 다이애나밴드, 안민옥, 임희주 사운드 합성: 신원정, 안민옥, 이두호, 임희주 생각 합성: 최선주 그림 합성: 들토끼들 설치 합성: 박재형 도움 합성: 오다움 주최・주관: 다이애나밴드 협력: 미학관, 보틀팩토리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본 행사는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추진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4년 다원예술창작지원 사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
본 리뷰는 2024년 거리예술·서커스 창작지원사업 선정작-2024년 서울문화재단 거리예술·서커스창작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 <일상공간예술비평:잇몸 잘 쓰기>-의 일환으로,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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