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과천한마당축제3-완전소중 서커스

2009. 10. 12. 00:09Review

강말금의 2009 과천 한마당 축제 공연 보기  2

완전소중 서커스



어렸을 때는 공연을 보고 넋을 잃는 일이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일이 잘 없다. 참 잘 보고 나서도 돌아서면 늘 하던 걱정으로 되돌아간다. 오늘 밤 보낼 메일, 밀린 빨래, 잃어버린 통장, 내일 약속… (결혼해서 살림하면 더 심해진다는데, 쩝) 이번 과천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보고 나서 행복한 기운이 오래 지속된 공연이 두 편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 '2 Rien Merci'의 ‘아코디언 서커스’와 스페인 사람 'Yi Fan'의 ‘목적지 없는 여행’이다.


<아코디언 서커스>


‘별양동 쉼터’는 차가 잘 다니지 않는 거리 한복판에 있었다. ‘아코디언 서커스’가 약속된 네 시가 되어가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 아무 것도 준비되지 않았다. 일정표를 잘 못 본 건 아닌지, 공연이 취소된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멀리서 술렁거렸다. 두 명의 외국 사람이 잡음 나는 축음기와 찌그러진 드럼통을 끌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음. 하긴 하는구나.
그런데 저 모습은...... 노숙자들?

노숙자들, 홀쭉이와 뚱뚱이는 축음기와 드럼통을 빈 공간에 놓고 천천히 가버렸다. 조금 있다가 찌그러진 풍선 모양 아치를 질질 끌고 나타났다. 아치를 축음기 뒤에 놓고 또 천천히 가버렸다.
그렇게 주섬주섬 고물들을 갖다 놓는데 십 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별 것 아닌 것이었는데 이상하게 눈을 끌었고, 모습이 안보이면 궁금해졌다. 그들이 천하태평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나 같은 관객들이 하나 둘 고물들을 에워쌌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찢어진 북 등을 갖다놓았을 때, 고물들은 세트로, 노숙자들은 배우로, 우리가 에워싼 공간은 무대로 변해있었다. 배우들은 서로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고물을 피해 나란히 앉았다. 슬슬 자리를 보고 누웠다. 그 다음은? 으로 계속 눈을 못 떼게 만들던 그들.
그 다음엔, 잤다.

두 캐릭터는 친구다. 한 명은 키가 크고 말랐는데, 등이 완전 굽어있고, 목이 거북이처럼 빠져 귀가 어깨선에 걸린 모양이 되었다. 큰 눈은 대체로 멍하지만, 자신이 시선을 끌고 있다거나 상황이 이상하다거나 하면 튀어나올 정도로 커진다. 때로는 소심하게 주변을 살핀다. 그를 보면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헤드폰으로 음악 듣기, 혼자 놀기, 손톱 물어뜯기, 파리 한 마리와 잡힐 때까지 씨름하기. 그런데 그의 자폐증은 꽤나 쓸모가 있어서, 그들만의 고물 드럼 세트를 연주할 때는 신들린 사람으로 변한다. 
그가 맡은 역할은 주로 연주이다. 아코디언을 능숙하게 연주하고, 의자에 컵이나 낡은 고무호스 따위를 연결해서 만든 드럼세트를 기똥차게 두드린다.

뚱뚱이는 곰돌이 푸와 체형이 비슷하다. 그도 등이 굽었고 목이 나왔다. 푸처럼 귀엽지는 않은데, 소주 한 병 정도 먹은 노숙자의 포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만사 귀찮은 것 같다. 눈을 반만 뜨고,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저글링하던 공을 떨어뜨리든 말든 동요가 없다.
그의 특기는 저글링과 춤이다. 그는 공과 곤봉으로 저글링을 하지만, 공과 곤봉만 보이는 보통 저글링과는 다른 점이 있다. 그는 춤을 춘다. 단순한 몸짓에 가까운 춤으로, 그는 음악을 눈에 보이게 한다.

이 공연의 힘은 SYNC*이다.

홀쭉이와 뚱뚱이, 혹은 ‘신경과민’과 ‘천하태평’ 인 두 배우는 각자 개성대로 움직이면서도 동선이 맞아떨어진다. 잘 자리를 보고, 앉고, 눕는 것. 음식을 먹으면서 90도씩 천천히 도는 것. 어딘가 모자라고, 혼자만의 세계를 갖고 있을 것 같은 캐릭터들의 행동이 중요한 포인트에서 딱딱 맞아떨어질 때, 미리 짜고 연습한 것인 줄 알면서도 놀랍다. 그들은 공연에서 한 차례도 웃지 않는다. 한 차례도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모습은 정반대지만, 기운은 같다.


또 하나의 SYNC는 음악과 춤이다. 음악은 홀쭉이가, 춤과 재주는 뚱뚱이가 담당하기 때문에 이 또한 감각적인 두 배우 간의 SYNC인지 모른다. 뚱뚱이의 재주는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타기’ 때문에, 저글링 공을 다섯 개, 여섯 개로 늘릴 필요가 없다. 리드미컬한 그의 춤은 음악과 함께 공연의 속도를 만들어내었고, 그가 만든 리듬에 따라 우리는 응시하다가 웃다가 박수치곤 했다.


공연이 끝났지만 배우들은 빠져나온 목을 넣지 않았다. 캐릭터가 워낙에 배우들의 몸과 딱 떨어져서, 준비된 공연을 본 건지 진짜 노숙자들의 어떤 공연을 우연히 보게 된 건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매순간이 현재인 놀라운 공연이었다. 2000년에 만들어졌다는 저 공연에 연출이 따로 있다면, 배우들의 톤을 조절하고, 에피소드들마다의 시작과 끝을 분명하게 하며, 전체 공연의 리듬을 조정하는 데 있어 탁월하였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현장의 담당자는 배우들이기에, 10년 가까이 같은 옷을 입고 레퍼토리를 능숙하게 진행하는 배우들의 뛰어남에 무엇보다 박수를 보내고 싶다.

허술해 보이지만 치밀하게 계산된 공연. 고물 같지만 공들여 세월의 더께를 입힌 소품들, 나사 하나 풀린, 음험한 존재들의 능숙한 연주와 춤.


정말 응큼하고 매력적인 공연이었다.


<목적지 없는 여행>

목적지 없는 여행은 한 사람이 나오는 20분짜리 줄타기 서커스이다. 제목과 러닝타임이 내 스타일이었다. 공터에 약간 허술해 보이는 줄타기 세트가 세워져 있었고, 해가 지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작은 머리에 큰 안경을 쓴 어리숙한 인물이 나타났다. 학창 시절에 왕따 당했을 것 같은 느낌. FORCE 지수 0.
그는 마이크를 잡고 한참을 이야기했고, 나는 그에게 반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너는 나중에 아무것도 되지 못할 거야.’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그는 지금, 줄타기 광대 이 판이 되어있다. 먼 나라까지 와서 공연도 한다.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줄 위에 훌쩍 올라탔다.
그리고 사랑 이야기. 그는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떻게 만났고,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는 그녀와 자기를 표현하는듯한 장난감을 움직이면서 다시 줄 위에 올라탔다.
줄 위에 눕기도 했고,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앉기도 했다. 수줍고 자랑스러운 표정.


모든 것은 한국말로 진행되었다. 그것이 감동이었다. 자기 얘기를 그 나라 말로 한다는 것이 이 공연의 컨셉일지라도, 그 컨셉을 떠올린 사람의 마음이 예뻐서 감동이었다. 발음이 뭉개져서 알아듣기 힘든 부분도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철수하기를 기다려 그에게 다가갔다. 참 좋았노라고, 그런데 한국어를 할 줄 아시냐고 물었다. 그는 ‘저는 이 판입니다.’ 정도를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웃었다. 자기 사진이 담긴 엽서를 한 장 건네주었다. 한국이 참 좋다고, 내년 5월에 다시 온다고 했다.

내년 5월에 그를 찾아가면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오 년 십 년 후쯤엔 수줍은 표정에서 다른 표정으로 바뀌게 될까? 아기 얘기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착한 사람의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박수를 받자, 그는 되게 좋아하고 부끄러워하면서 퇴장했다. 가는 길에 국화 화분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를 들더니 안고 갔다. 자신에게 꽃다발을 주는 셈이군… 하며 웃었지만 이상하게 그 모습이 마음에 남는다.


나의 목적지 없는 여행 중에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나의 완전 소중 서커스.
 


*SYNC 
1.【영화·TV】 동시성(synchronization);동시 진행
2. 협조 관계

“다들 아시겠지만서도^^; 네이버 사전에서 발췌했습니다. 수중발레(씽크로나이즈드 스위밍) 같은 군무도 SYNC고, 영화 볼 때 화면하고 자막 맞추는 것도 SYNC고... 뭐 그런 뜻으로 썼습니다.”


인디언밥의 '필자발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개쏭과 강말금의 축제탐방기 2탄

지난여름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09에 이어, 이번에는 제13회 과천한마당축제를 다루려 한다. 두 필자가 4일간 과천한마당축제를 둘러보고, 눈에 띄거나 마음에 담은 작품들을 리뷰형식으로 보고할 예정이다.

 

과천한마당축제
마당극, 거리극, 야외극을 중심으로 한 야외공연예술축제로 시민들이 예술을 즐길 수 있는 큰 잔치이다. 예술의 아름다운 눈을 통해 삶을 바라보고 이와 아울러 '살아있음'을 기뻐할 수 있는 기회를 축제가 열어준다는 생각으로 열리고 있다.
2009. 9. 23-27 www2.gcfest.or.kr/

드 리앙 메르씨 <아코디언 서커스>
관객과 매우 가깝게 어울리면서 기발하고 엉뚱한 작은 서커스. 스위스 니옹(Nyon)의 팔레오(Pale o)축제 25주년을 기념해 2000년에 만든 공연.
드 리앙 메르씨(2 rien merci)는 1999년 극단 창단 후 거리예술과 서커스예술의 가교역할을 해왔다. 서커스 예술의 오래되고 사교적인 원형의 정신과, 거리예술의 꾸밈없고 불안정하고, 모난 정신 사이에서의 이중성을 결합하고 배합시키며 이들만의 독특한 정서를 만들어 낸다.

2009. 9.23-27 www.2rienmerci.com

이 판(Yi Fan) <목적지 없는 여행>
이야기가 있는 줄타기. 어렸을 적 불가능하다는 갖은 편견들을 극복하고 줄 위에서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광대 이야기
이 판은 진실성, 유머, 감수성이 풍부한 몸짓을 통해 신선한 물 한잔 혹은 운율이 있는 시를 읽는 것처럼 서서히 관객들을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2009. 9.26-27 www.yifan-cirque.com

글 | 강말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