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캐서린설리번+극단여행자 <영매>"관객의 욕망은 이 공연과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2010. 4. 20. 13:03Review


 

"관객의 욕망은 이 공연과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캐서린 설리번 + 극단 여행자
<영매 : Ouija!>



|홍은지

 



장례식 - 아, 이런, 누가 또 죽었다는 것인가?

최근에, 정확히 말하자면 2008년 2월 25일 이후 TV 뉴스 시간에 내가 가장 많이 본 장면은 장례식이다. 믿기지 않고 충격적이고 불쌍하고 분노가 치밀고 안타깝고 그리고 다시 삶이 이어지던 순간들이 하나의 패턴처럼 2년여 동안 반복되어 온 것 같다. 반복과 지속, 이것으로 죽음은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일어나 - 밥 먹고 - 나가고 - 먹고 - 일하다 - 돌아와 - 먹고 쉬다 - 잔다. 이 사이에 죽음의 소식이 삽입되어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이럴 수가.




무대는 장례식 공간이다. 조문용 화환, 거울(처럼 보이는 소품), 흙더미가 있다.
그 안에 결혼식 하객 복장을 한 사람들이 앉아있고 한 켠에 뮤지션들이 자리하고 있다.

잠시 후,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서로 대화를 하거나 관계를 맺으며 움직이고 있지 않다. 근원지를 알 수 없는 파생된 단어와 문장들이 소문처럼 무성하게 들려올 뿐이다. 먼저의 움직임이 다음 움직임의 이유가 되어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규칙에 따라 파편화된 말들이 기계적인 관계 속에서 단절적인 움직임으로 반복되며 그 상태가 주욱 이어진다. 비인격화된 인물들의 감정은 종잡을 수 없고 역할은 뒤섞이며 일관성은 없다. 코러스만 남았으니 감정이입할 캐릭터도 기승전결을 경험할 플롯도 없다. 인과관계 없이 분열적으로 해체된 이해불가의 단조로운 세계, 그것이 파생 반복 재생되는 것이 이 공간에 펼쳐진 세계이다. 단지, 한 켠에서 연주되는 음악만이 시선을 가지고 멀리서 바라보며 이들을 이끌어간다.

그럼 객석에 앉은 나는 언제, 어디, 누구, 무엇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왜? 이해, 해야만 하는가?


플롯과 캐릭터로 구축된 희곡의 세계는 세상 밖에 위치한 작가의 시선을 통해 관념적으로 이상화된 세계의 그림자를 이 세상에 드리워주는 것이라는 것, 그러므로 신(또는 이상)을 대리하는 작가가 창조한 세계, 작품은 이해되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 그것은 합리주의에 뿌리를 둔 서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 익히 알고 있는 사항이다.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다시, 누구의 장례식인가? 소문처럼 들려온 대사의 파편 중에 ‘절대 이성이 죽었다’는 말이 들어왔다. 그건 지난 세기, 모던의 시대, 합리주의에서 비합리주의로 넘어가던 시점, 예술이 지향하던 영원불변의 질서, 본질에 대한 추구, 가지계의 그림자를 모방하던 절대미를 향한 작업들을 내려놓고, 사유의 초점을 현상으로, 가시계로, 물질로, 변화무쌍한 카오스의 세계로 급선회하던 그 시점,

한마디로 정신줄을 놓아버린 그 시점의 이야기다.

인간의 인식작용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저 너머 완벽한 이상을 가리키던 작가, 연출가의 눈이 세상 밖에서 롱테이크로 제시되었다면, 이제 그 눈은 세상 안에서, 현상의 흐름 속에 핸드헬드로 따라다닌다. 작품은 저쪽 세계의 이해되어야 하는 어떤 것에서 이쪽 세계 안에서 경험되어야 하는 것, 읽혀져야 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왜? 전쟁의 광기를 자초한 인류가 스스로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전통적 사유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규명하기에는 불가능해졌고, 제대로 보여줄 수 없으니까. 이 세상의 리얼리티를 드러낼 수 없으니까.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현상이라는 널빤지 위에 접점을 찾지 못해 현실화되지 못한 기억들, 사유들, 흔적들이고, 그 위에서 부유하고 있을 따름이다. 현상이라는 널빤지와 함께 출렁대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이 공연이 드러내고 있는 세계가 보여주는 리얼리티라면, 여기서는 단조로운 기계적 패턴으로 그 출렁임을 간략화하고 있다. 대사+움직임 - 들숨 - 대사+움직임 : 이 패턴이 해체-분절-단순화-과장되며 반복된다. 마치 미니멀리즘/일렉트로니카 음악처럼 감각적인 부유상태를 유도한다. 단조로운 패턴을 가진 움직임/소리의 단위는 이 공연의 표현형태이자 내용형태이다.

표현형태가 표면성을 너머 의미를 담고 있을 때 우리는 표현 너머에 있는 것들과 만나고 대화하고 우리 안에서 떠오른 것들을 길어 올린다. 표현 형태가 내용형태를 대체할 때 우리는 단지 하나의 스타일을 봤다고 이야기한다. 생략은 작가가 자신이 쓰는 것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을 때 생략할 수 있다, 고 헤밍웨이가 말했다던데.




그럼 객석의 리얼리티는 무엇일까, 모방적 정확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믿고자 하는 관객의 강한 욕망에 관한 물음이다.


관객의 욕망은 이 공연과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극장에 들어서기 전, 내가 경험한 일상으로 잠시 돌아가 보면 세상은 여러 층들이 혼합되어 겹겹이 쌓여있고 동시에 존재하며 끊임없이 움직인다. 본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을 뿐, 현상과 함께 변화한다고 한다.

좀 더 주위를 둘러보면 오래 전에 죽었다고(죽으면 사라지는 줄 알았는데) 알고 있던 것들이 유령인지 좀비인지 여전히 돌아다닌다. 근대의, 전근대의, 혹은 그 이전의 소속물이라 여겼던 것들이 버젓이 우리 안에 섞여있다. 포스트모던 어쩌고 하면서 태도는 전근대적인 사람도 부지기수다. 가끔은 술도 안 마신 친구가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문자로 일상적 부유감을 자조/호소하기도 한다. 때론 부조리극을 하면 리얼리즘 극으로 오해받을까 걱정스럽다. 무대로부터 객석으로 죽었다 - 미쳤다- 나(너)는 누구인가- 같은 말들이 던져지면 리얼리티 밖에 있는 고색창연한 것을 마주한 느낌마저 든다.

공연의 형식이 담고 있는 시점의 리얼리티가 그랬던 것처럼, 이 공연도 세상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이 형식을 택한 것이라면, (이 전제가 내가 객석에 앉아 있던 이유다) 그래서 일각을 드러낸 것이라면,

생략된 빙산은 어떤 모습일까? 패턴이 리얼리티를 담보하기엔 우린 너무 복잡한 세상에 한가운데 있는 건가? 아니면 현상을 즐기고 무언가를 찾게 해주기에는 지나치게 간략화 된 패턴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위의 전제자체가 나만의 오해인가?

어지럽기만한 세상을 부유하다 객석에 앉게 된 순진한 관객의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 공연의 제목이 영매이기 때문이다. 영매는 산자와 죽은자를 연결시켜 죽은자를 산자들의 리얼리티 안으로 데려오는 자들이니까. 


 

Ouija! 영매
페스티벌 봄 + 캐서린 설리번 & 션 그리핀 + 극단 여행자

2010.4.9 ~ 18
정보소극장 

연극 <페르귄트>의 연극적 형식과 드라마, 무대미술 ▶  감성적이면서 기계적인 움직임 + 타악, 현악, 건반 연주와 리듬 + 구음과 합창의 화성  ▶ 연극 <페르귄트>를 해체와 재구성, 시각이미지화  ▶ 퍼포먼스 아트 <Ouija! 영매> 

한국 공연을 위해 제작한 이 작품에서 설리번은 한국의 극단 여행자의 기존 작품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한다. '원작'의 작은 몸짓이나 대사, 세트 등 원작의 구성 요소들은 새로운 언어적, 정치적 층위를 파생시키기 위한 재료가 된다. 설리번의 작업에서 연출과 사회적 관계의 재구성은 분리될 수 없는 동일한 과정이다. 


 

글 | 홍은지
연극연출가. 공연창작집단 은빛창고
그 동안 주로는 공연 문화 영역 안에서 사람들과 만나 함께 해 왔다.
이것저것 관심이 많고 다소 산만해서 여러 종류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게 즐거운데, 아무래도 소심한 몽상가인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