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정가악회의 낭독음악극 <왕모래> "모든 것이 다 맞아떨어지는 아름다운 순간"



정가악회의 낭독음악극 <왕모래>
"모든 것이 다 맞아떨어지는 순간. 아름다웠어, 정말"

|욤





오래 된 책을 읽다가 문득 책장에 벌레가 눌러 붙은 걸 보고 털어내려는데 털어지지 않았다. 쌀 톨 만한 벌레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림처럼 붙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인쇄 되어있었다. 그것도 글씨 하나를 더듬이로 살짝 가리면서. 책장을 접으면서 생각했다. 스펀지에 내면 별 몇 개나 받을 수 있을까. 그때 전화가 왔다. 해윤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없어! 당장 출동이야!”

아무런 정보 없이 갑자기 ‘왕모래’였다. 해윤의 차는 시커먼 터널을 뚫고 구부러진 노란 차선을 따라 무섭게 달렸다. 눈이 부셔서 선글라스를 꼈다.

“그래. 이번 임무는 뭐지?”

“왕모래.”

“그건 암호명인가?”

“아니 공연명이야.”

“왕모래의 기준은 뭘까? 자갈이 얼마나 작아져야 왕모래가 되는 거지?”

“손톱사이에 끼는 게 모래야.”

“확실한가?”

“아마.”

잠시 생각해보고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렇군.”

그런데 해윤이 내가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던 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만약에 손톱이 벌어져서.......모래라고 하기엔 너무 큰 어떤.......그래 자갈이라고 할게. 자갈이 낀다면.”

난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도 해윤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넌 어떻게 생각해?”

“넌 너무 멀리까지 갔어. 어떤 질문들은 그 궁금증 자체만으로도 위험할 수도 있어.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는. 뭐든 조심해도 모자란다고. 말을 아껴.”


“난 그저 궁금한 것뿐인데? 넌 안 궁금해?”

“나도 물론 궁금하지. 하지만 더 나아가선 안 될 것 같아. 뭔가 불안해. 너도 알잖아. 내 예감은 대부분 들어맞았다고. 우리가 더 알려할 수록 우린 더 위험해질 거야. 전에도 그랬잖아. 적어도 지금은 손톱에 왕모래가 끼는 상상을 할 때가 아니야.”


“지금까지 난 전혀 피해보지 않았는걸.”

“난 어딘가 끌려갔었지. 그들은 심한 고문 끝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조심해.’라고만 했어. 그 후로 난 매일 조심하고 있어. 횡단보도 건널 때도 파란불이라도 차가 다 멈춘 걸 확인한 후에, 노란 손수건을 높이 들고 건너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뭔 일을 당해도 내가 할 말이 없을 테니까. 난 극도로 조심해야 돼.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넌 지금은 안전할진 모르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않을 거야.”

“응. 차가 막히네.”

“응.”

“공연 시작까지 10분 남았어. 그런데 이 속도라면 2시간 후에나 도착할 거야.”

“그럼 술이나 마시자. 그리고 상상속의 리뷰를 쓰자. 소설처럼.”

“그래. 너나 실컷 써. 난 갈 수 있어. 지름길로 갈게.”

서울 시내의 차가 다닐 수 있는 모든 길을 외우고 있는 해윤은 빠른 속도로 최단 거리를 계산했다. 그런 해윤의 눈에선 빨갛고 노란 불빛이 새어나왔고, 귀에선 기계음이 났다. 그리고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방향을 틀어 돌진했다. 길이 없을 것만 같은 건물 틈으로, 이국적인 배경의 좁은 골목길로, 거대한 저택의 갈라진 벽 틈으로, 정원의 녹색 미로를 따라 멈추지 않고 돌진한 결과 어느새 강남의 LIG아트홀 앞이었다.

공연 시간이 3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시간이 없어. 넌 어서 표를 받아놓도록 해. 난 주차를 하고 올라갈게.”
해윤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외쳤다. 시간을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난 차창을 열고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려 낙법으로 착지했다. 착지는 완벽했으나 화단으로 떨어진 것이 실수였다. 재킷에 묻은 젖은 흙을 털다가 갑자기 온몸이 경직되며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낙법을 하다가 손톱에 왕모래가 낀 것이었다. 그것은 무지 아팠다. 그때 화단의 나무 뒤에서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스쳐지나갔다. “조심해.”

그렇다. 모든 것은 음모다. 손톱 사이에 왕모래가 낀 것도, 내가 낙법을 하리란 것도, 차가 막힐 거라는 것도, 해윤이 밥 먹으면서 티비 보다가 늦게 나온 것도, 모든 것이 거대한 조직의 계획 하에 있다는 걸 이제야 안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해윤을 의심하게 된 것은 나의 지나친 생각이었을까. 난 권총을 가져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도시에는 정글보다도 치열한 삶의 법칙이 있다. 자칫 방심하다간 먹혀버린다. 난 일단 상황을 지켜보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로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손톱사이에 낀 왕모래를 빼려고 노력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것은 오히려 점점 더 깊게 파고들었고 그 고통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날 정도로 거대했다.

다행이도 공연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표를 찾을 때, 직원은 의심의 눈초리로 날 쏘아보았다. 난 왕모래가 박힌 손을 내밀려다가 급하게 숨기고 다른 손으로 덜덜 떨며 ‘왕모래’ 티켓을 받았다. 재킷 안은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소름끼치도록 추웠다. 티켓의 좌석은 이상하게도 떨어져 있어서 해윤은 나를 지나쳐 두 자리 떨어진 앞에 앉았다. 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독안에 든 쥐였다.

공연 도중 갑자기 불이 켜지며 양 옆의 사람이 날 붙들고, 해윤이 뒤돌아 내게 권총을 쏘고서 비열하게 웃는 장면을 난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선 도망갈 수가 없다. 그동안 위험한 임무를 수도 없이 해보았지만 이번처럼 궁지에 몰린 적은 처음이었다. 앞에 앉아 태연한 척 뒤도 안돌아보는 해윤이 스파이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며, 급하게 자리를 뜨려했으나, 공연 안내 방송이 나왔다. 관람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이동을 삼가라는 절대적인 안내 방송이. 그렇다면 탈출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그래서 비상용 핸드폰을 꺼내 본부에 구조 요청을 하려는 찰나, 핸드폰 전원을 끄라는 안내 방송이 나와, 이를 악물고 핸드폰을 끄고 말았다.

그렇게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공연은 시작되었다.




왜 그런지 그때 난 눈물이 났다

무대 막이 열렸을 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대는 시냇물이 흐르는 실제 냇가였다. 도무지 세트라고는 상상 할 수 없게, 바위와 나무들이 무대 저 너머까지 태양빛 아래 펼쳐져 있었고, 이따금씩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왔다. 관객석을 냇가 근처에 지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실제의 배경이 강남의 한 빌딩 위에 펼쳐져 있으니 그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나는 선글라스를 벗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조직의 요원으로 의심되는 정장 차림의 남자들 역시 나처럼 선글라스를 벗고 무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냇가 바위들 틈에 평평한 모래밭이 있고 거기엔 칠이 군데군데 벗겨지긴 했지만, 견고해 보이는 나무 의자가 있었다. 얼마 안지나 한 할머니가 그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아주 오랜 시간동안 관객 한 명, 한 명의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시선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너무 오랜만의 미소라 얼굴 근육이 경련했다.

할머니가 책을 꺼내 무릎 위에 펼치고 돋보기안경을 썼을 때,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됐는데, 낭독이 시작되자 마치 머리맡에서 이야기하는 듯 뚜렷하면서도 그 음성은 잔잔하니 부드러웠다. 이따금씩 할머니는 책을 읽다 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관객들에게 말을 붙이기도 했다. 그 중 기억나는 대화는 할머니가 어떤 관객에게 “요즘 사는 거 어때요?” 라고 묻자 관객이 “사는 게 뭐 힘들죠.” 라고 대답했고 할머니는 걱정하듯 끌끌거리고는 “밥은 잘 챙겨 먹고?” 라고 물었다. 관객은 겸연쩍어하며 그런 편이라고 대답했고 할머니는 그럼 다행이라고 말했다.

왜 그런지 그때 난 눈물이 났다. 할머니가 있는 곳은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평화롭기만 하고 할머니는 이 현실의 관객들을 측은하게 보는 듯 했다. 그때 나와 내가 포함 된 이 현실이 어찌나 초라해 보이던지, 난 관객석을 빠져나와 무대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때, 손톱에 낀 왕모래가 생각나 찾아보니 흔적조차 안 남아있었다.

할머니가 낭독하는 책의 줄거리는 이러했다.

<<어느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예쁜 아낙이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서울로 도망갔는데 그들은 한시도 마음 놓고 지낼 수 없었다. 그들을 필사적으로 쫓는 자들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낙의 시어머니가 애지중지 키워오던 두더지들이었다. 그들은 두더지의 추적을 피해 여러 차례 집을 옮겨도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이사하고 며칠이 지나면 어김없이 마당 한가운데에 굴이 몇 개 파여 있었고, 그 후로는 자고 일어날 때마다 방바닥 장판이 움푹 들어간 부분이 생기는데, 장판을 거둬내면 딱 보기에도 깊어 보이는 땅굴 안에서 음산한 속삭거림이 들려왔다. 불안함에 잠을 못자는 아낙은 매일 밤 두더지들이 땅 파는 환각을 들었고 남자는 두더지를 잡는다며 밤에는 보초를 서고 낮에는 동네 문방구 앞에 있는 뿅망치 기계 앞에서 두더지 잡는 훈련을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이사한 곳은 뒷산 중턱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였는데......>>

할머니는 여기까지 읽더니 돋보기안경을 벗고는, 오늘은 피곤해서 다음 공연 때, 마저 읽어 주겠노라 했다.

“할머니. 그러지 말고 더 읽어주세요.”

“옛날이야기 더 해주세요.”

다들 아이라도 된 듯 그렇게 졸라댔지만 할머니는 우리를 진정시키며 조용히 타일렀다. 아쉽지만 공연은 끝이 났고, 박수대신 저마다 할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오랫동안 우리 한명 한명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눈인사를 받은 사람 중에 더러는 건강하시라느니, 또 찾아뵙겠다느니 큰 소리로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제야 앞에 앉아 눈물을 훔치며 팔을 젓고 있는 해윤의 모습이 보였다. 해윤에게 무언가 소리치려 했지만 막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는데 할머니가 일어났다. 그 순간 모두 침묵했다.

할머니는 시냇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잠시 후, 무대 옆 시냇물을 타고 작은 나무배가 흘러왔고 할머니는 그 배에 올랐다. 그리고 이름 모를 네모난 악기를 꺼내 손으로 만지작거리자 음악이 그곳에서 흘러나왔고, 반주에 맞춰 할머니가 노래를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 접해보는 신비한 음악이었다. 배는 물결을 따라 천천히 흘러가고 음악소리도 점점 멀어져갔다. 마침내 배가 무대 뒤쪽, 물살이 꺾이는 곳을 굽이돌아 커다란 바위 뒤로 사라졌을 때도, 희미한 음악 소리는 남아서 점차 멀어져갔다.

관객들은 한동안 객석을 떠나지 못하고 무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서 그저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그때, 손톱에 낀 왕모래가 생각나 찾아보니 흔적조차 안 남아있었다. 눈물에 다 씻겨 내려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공연 내내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그때 옆에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완전히 사라졌어요. 다신 돌아오지 않겠죠?”

난 대답했다.
“그렇겠죠. 냇물이 거꾸로 흐를 수는 없는 거니까.”

그 사람은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한숨을 쉬었다.
그때 음악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배가 물살을 헤치고 나타났다. 그 배엔 해윤이 타고 있었다. 객석을 보니 해윤은 그 자리에 없었다. 해윤은 뱃머리에 달린 자동차 핸들을 돌리며 제법 빠른 속도로 다가와서는 날 보며 말했다.

“일어나.”

눈을 떠보니 지하철 안이었다. 해윤은 말했다.
“이번에 내려. 늦었어. 서둘러야 돼.”

우리는 내리자마자 현실의 LIG아트홀을 향해 정신없이 걸어갔다.



다투어 좋은 걸 해주겠다고 나선 이모들에 둘러싸인 아이가 된 기분


균형을 잘 잡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렵기 때문에 균형이 잘 잡힌 것을 볼 때에 감동이 있다. 김연아의 연기나 불후의 명곡들 속 악곡구성, 음식의 간에도 균형이 있고 그 것이 잘 맞아떨어졌을 때 나는 마음이 움직인다.

정가악회의 ‘왕모래’가 그랬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텍스트, 너무 강해서 모든 것이 거기 묻혀버릴 것 같은 드라마를, 낭독과 음악과 연기와 무대가 균형 있게 나누어 풀어냈다. 공연을 볼 적에, 다투어 좋은 걸 해주겠다고 나선 이모들에 둘러싸인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본 적은 없지만.

봄이 온다온다 하면서 오지 않고 있는 것처럼,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우리의 다짐은 매번 다음으로 미뤄지고 있었다. 매진이라 30분전에는 도착해야한다는 에디터의 당부를 새겨들은 것과 관계없이 그 날도 어김없이 동시에 늦어버린 우리는 좌석이 남아있길 바라며 극장으로 바삐 걸었다. 다행히 앞뒤로 떨어진 자리가 남아있었는데 덕분에 처음으로 중간에 속닥거리지 않고, 극 중 자극에 대한 서로의 리액션을 확인하지 못하는 채로 공연을 봤다. 마침 그 날은 시각장애인 단체 관람이 있는 날이어서 여기저기서 배우들의 움직임을 파트너에게 설명하는 소리가 소곤소곤 나고 있었기에, 나도 옆 사람을 툭 치고 뭔가 소곤거리고 싶다는 충동을 계속 참아야했다.




균형 1. 무대

무대는 경제적이되 다양한 동선이 나오도록 설치되어 있었다. 8명의 악사가 4명씩 양 쪽에 사선으로 자리했고, 그 가운데 사다리꼴 모양의 빈 공간인 무대, 무대 뒤 편 상단에 스크린이 걸렸다. 악사의 등 뒤로는 커다란 발이 쳐져있었는데 이는 등, 퇴장의 여러 가능성을 만들어주었다. 또한 가렸으면서도 조금씩 보여주는 재미가 있었고, 때로는 영어 자막을 위한 스크린 기능을 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돋보인 점은 처절한 시대상이 담긴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무대를 간결하고 단정하게 만들어 드라마가 주는 과잉정서를 중화시켰다는 점이다. 무대를 모던하게 만드는 경향은 21세기를 사는 젊은 국악 공연의 필수 요소지만, 같은 극장에서 본 다른 비슷한 공연들과는 다르게 그 의도한 바를 모두 드러내며 활용해, 다양한 기능으로 공연의 재미를 만들어냈다.


균형 2. 연기연출

극은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주인공을 처음부터 함께 등장시킨다. 아이였던 주인공 뒤에서 어른인 주인공이 함께 춤을 추는 인트로를 마치고 아이 혼자 남는데, 어른 주인공은 무대 한 켠 악사석에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본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주인공이 어른으로 바뀌는 과정에 필연성이 생기는 것은 물론, 관객으로 하여금 아이 시절이 어른 주인공의 회상이며 그가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함께 느끼게 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갈 때 또 한 번 함께 춤을 추며 몸이 겹쳐졌다가 분리되어 이번엔 어른만 남게 되고, 마지막에 둘이 다시 하나가 되어 자기 삶의 그 처절함을 노래와 움직임으로 보여줄 때에 그 전형적이지만 균형 있는 구성이 빛을 발한다.

또 하나 인상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악사들의 연기이다. 무대를 꽉 채우고 앉아있는 8명의 악사들은 극 중간 중간에 혼자 조용히 일어나 퇴장했다가 극에 필요한 온갖 조연들을 연기한다. 그렇게 자기 역할을 한 후에는 다시 옷매무새를 고치고 악사석으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연주를 계속하는데 이러한 연출 또한 무거운 텍스트에 깔리지 않고 연기를 하는 것 자체를 희극적 요소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탁월했다.


균형 3. 음악

우리는 사실 지난 번에 같은 작곡가의 공연을 리뷰한 적이 있다. 그 때는 무대에 음악이 가려졌다고 썼다. 하지만 왕모래는 달랐다. 그것이 지휘자 없이 연주가 가능한 것이 신기할 정도로 섬세한 앙상블이 공연 내내 들려왔다. 물론 이는 완벽한 호흡과 연주테크닉을 갖춘 정가악회가 연주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작곡가에게 좋은 연주자는 날개를 달아준다. 왕모래의 음악은 떠오른 악상 그대로를 옮긴 것처럼 자유롭고도 정교했다. (머릿속에서 ‘이것은 불가능할테니 삭제’해야 하는 부분이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음악 역시도 텍스트에 묻히지 않고 전체적인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도, 지나치게 건조하지도 않았다. 아. 아직도 몇몇 장면의 음악이 떠오르는데. 모든 것이 다 맞아떨어지는 순간. 아름다웠어. 정말.


균형 4. 낭독

낭독극을 접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상상이 잘 되지 않는 부분이었는데, 결론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극을 볼 때 항상 아쉬운 것 중에 하나는, 글이 주는 분위기, 서술 방식과 어휘선택에서 오는 작가의 개성 등이 표현되지 못한다는 점인데, 극 중간 중간에 낭독을 함으로서 이러한 점들을 모두 살릴 수 있었다. 성우의 낭독은 정갈하면서도 드라마틱했다. 스크린 아래 조금 하수 쪽, 무대의 무게 중심이 실린 곳에 앉아 음악과 연기로 채워지지 않는 텍스트의 아름다움을 전달해나감에서 어느 한 부분 과한 것이 없었다. 낭독이라는 형식이 한계점을 가질 거라 예상했지만 오히려 큰 강점이 되어 왕모래를 살렸다.






<정가악회> 낭독음악극 '왕모래' (앵콜공연)
3. 22 - 3. 30 / LIG아트홀

국악실내악단 정가악회가 황순원의 ‘왕모래’를 낭독 음악극 형식으로 선보인 작품. 음악과 영상, 자막, 낭독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낭독 음악극’으로 재탄생했다.

"문학은 시대를 담는 그릇이다. 한국인의 삶과 존재 양식을 탁월하게 천착하고 형식화함으로써 한국 문학의 위상을 끌어올린 작가 황순원. 많은 사람들은 그를 ‘소나기’의 작가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서정작가이기 전에 그는 예민한 현실 감각으로 시대와 세태를 묘사하던 시대작가임을 ‘왕모래’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기획의도 中





  1.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드는 욤의 실험적인 리뷰! 너무 재밌어용.
    사 랑 해 요 욤!
    사 랑 해 요 연 리 목 ♡

  2. 전반부인 상상의 리뷰는 꼭 한편의 꽁트나 뭐 단편소설을 읽는 재미가? 또 하나의 '욤스타일'이 탄생하는 듯..ㅎㅎ

  3. 오옷, 좋은 평이 많네~ 리뷰읽으니, 공연 놓친 것이 참 아쉽네요. 욤만의, 유쾌통쾌한 폭풍간지 리뷰는 언제나 그랬지만 참 맛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냠냠.

  4. 재밌게 읽고 퍼갑니다~~^^ 매표소에서 살짝 뵈었던 사람입니다 ㅋㅋ

  5. 아아시는 연리목만 편애하네요.

  6. 사 랑 해 요 옴 브 레 ♡ 닭입니다. 꿩대신 왔습니다.^^

  7. 매버릭짱! (세월이너무지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