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마실「꿈꾸는 거북이」"그런데 — ‘과정’이 중요해지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2011. 3. 2. 12:26Review

극단 마실「꿈꾸는 거북이」
그런데 — ‘과정’이 중요해지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글_ 강여사






1.

‘달리기’를 원하는 거북이 엉뚱이에게 누군가 다가와 알려준다. “저기 저 먼 곳에 사는 토끼라는 애가 그렇게 달리기를 잘 한대.” 이 말을 들은 엉뚱이는 토끼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한다. 그런 엉뚱이를 말리는 엄마와의 갈등, 이것이 첫 번째 에피소드이다. 여차저차 힘들게 엄마를 설득한 후, 엉뚱이는 홀로 길을 떠난다. 산을 넘고 넘어 가는 길에 베짱이를 만나고, ‘오래된 시계’를 만난다. 그들은 엉뚱이의 가방을 탐내고, 잘 달리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엉뚱이의 몸을 망가뜨린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일어나 토끼를 만나러 떠난다. 힘든 고비 끝에 마침내 토끼를 만난다. 그러나 토끼를 만났다고 해서 당장 달리기 시합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봄 ․ 여름 ․ 가을 ․ 겨울 사계절이 지나 다시 봄. 엉뚱이는 토끼와의 달리기를 위해 오랜 시간 기다린다. 그 힘든 기다림 끝에 토끼와의 시합을 하게 되지만, 엉뚱이는 너무나도 쉽게 토끼에게 지고 만다. 엉뚱이는 좌절하며 서럽게 운다. “결국 난 안 돼. 난 달리기를 할 수 없어!”

 

이것이 <꿈꾸는 거북이>의 줄거리다. 무언가 허전하다. 그렇다. 왠지 ‘그러나’ 혹은 ‘그런데’가 붙어야 할 것 같다. 연출가는 후자를 선택한다.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진다.

 

그런데 그 때, 펑펑 쏟아지던 엉뚱이의 눈물이 강과 바다를 이룬다. 무대 위에는 어느덧 바다색의 푸른 물결이 휘감겨 돈다. 느릿느릿 걸어가던 엉뚱이의 팔과 다리가 바다의 자유로움에 감겨 부드러워 진다. 그 안에서 엉뚱이는 전에 없던 자유로움을 느낀다. 반면 토끼는 갑작스런 물살에 기우뚱 몸의 중심을 잃는다. 엉뚱이는 그런 토끼를 자신의 등에 태우고 유유히 바다를 항해한다.

 



극중극 형태를 취하는 <꿈꾸는 거북이> 속 ‘꿈꾸는 거북이’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신의 능력을 깨달은 엉뚱이가 토끼와 함께 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림자극으로 이루어져 갑작스러울 수 있는 상황 전개에 유연함을 더해준다. <꿈꾸는 거북이>는 이렇게 ‘연극의 언어’를 최대한 이용한다. 이 연극은 무대라는 미적 공간을 오브제를 통해 유연하게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가령 예컨대 빨래바구니가 거북이 등껍질이 되고, 빨래줄에 걸려 있던 옷들이 나무가 되고 산이 된다. 인형과 그림자극을 통해 동화적 느낌을 풍부하게 살리기도 한다. 무대 옆에서 라이브로 연주되는 음악과 지브리쉬도 극에 생생한 음악성을 더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극의 중후반으로 갈수록 지루함 차곡차곡 쌓인다.

극은 네 개의 에피소드가 점층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각 에피소드가 진행되지 않고 안에서 반복적으로 맴돈다. 물론 반복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의 틀에서 동일한 이야기가 소용돌이치듯 반복되어, 전체적으로 보자면 패턴의 반복에 갇힌 채 네 개의 에피소드가 나열된 느낌이다.

 






2.

이러한 지루함과 함께 이 연극은 어딘가 불편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소위 ‘어린이극’이라 불리는 것에서 큰 문제의식 없이, 아니 오히려 ‘긍정적’으로 다루어진 이야기였다. 그런데 나는 늘 이런 이야기들이 불편했다.


거북이 엉뚱이는 달리고 싶어 한다. 거북이에게 ‘달린다는 것’은 자신의 불가능에 도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엉뚱이는 이를 이루기 위해 길을 떠났고 마침내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전에 엉뚱이는 엄마와의 갈등부터 시작하여, 베짱이, 오래된 시계, 토끼의 숱한 거절과 시합에서의 패배라는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들은 결코 아름답게 그려질 수 없다. 엉뚱이는 그 안에서 많이 울었고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이 연극에서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앞서 말했다시피 결코 아름답게 그려질 수 없으며, 낭만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낭만적으로 포장’되는 단 하나의 계기가 있다.
‘그러나’ 혹은 ‘그런데’가 출몰하는 순간이다. 결말이 긍정적인 변화를 겪게 될 때, 과정도 훌륭함과 낭만으로 포장된다. 어딘가 불편한 이 말이 생생히 작동하는 건 극 중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여기 현실이다. 이러한 ‘극적인 스토리’를 우리는 사회에서 종종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낭만이 과연 건강한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어린이극을 볼 때마다 불편했다. 이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런데’(혹은 ‘그러나’)라는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극장 밖을 나와서도 당신은 “과정이 결과보다 정말 중요하다”라고 말할 ‘용기’가 있는가? 결과에 관계없이 오로지 ‘과정’만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난 지금 이 말이 쓰라리게 다가온다. 이것은 극장 밖 세계에 길들여진 나의 속물성 때문인가. 극장 안과 극장 밖 세계의 괴리로 이러한 연극에 대한 신뢰감이 점점 휘발되어 간다.




지금-여기를 사는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물론 미래에 있을 알지 못할 결과보다 지금-여기 내가 처한 현실, 즉 과정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우린 종종 고개를 들어 미래를 꿈꾼다.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이 시간 끝에 서있을 때 ‘행복해하는 나’의 모습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혹시 이러한 불확실한 미래에 저당 잡혀 현재의 열정을 착취당하는 건 아닐까? 그로 인해 지금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눈을 가리고, 현실의 부조리를 은폐하려는 것은 아닌가? 지금 내 현실의 고통이 ‘합당’한가? 자신이 좋아한다는 것을 한다는 이유로 너무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우린 의심해봐야 한다. 좋아한다는 것을 이루기 위한 고통과 상처가 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나?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이루어나가는 과정 또한 결과만큼 건강한 것이 좋은 사회 아닐까. “좋아하는 일하는데 그 정도 고생쯤은 당연하지.” “그 정도 생각도 안 했어?” 우리는 친구들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이런 말을 건넨다.
그리고 이 연극도 어린이들에게 이러한 교훈을 건네준다. 우리는 언제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치러야 하는 고통을 당연한 대가로 인식하게 된 걸까.


과정 속에서 겪었던 고통이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는 건 그 결과가 보상해주기 때문만은 아닌지 나는 끝없이 물어보게 된다. 오늘 날, 이 거친 생존의 레이스에서 ‘살아남는 자’는 소수임을 우린 알고 있다. 소수이기에, ‘결과’는 더욱 중요해진다. 그리고 이젠 그 살아남는 소수마저 선택되어진 자들이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말이 하고 싶었다. 세상아, 흔치 않은 ‘성공’의 예로 끝이 보이지 않는 과정 속에서 억압당하는 이들의 고통의 현재진행형을 그럴싸한 낭만으로 포장하지 말아달라고. 오늘 날, 낭만은 기만이 되었다.


내가 너무 부정적인가.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엄마, 거북이 왜 저렇게 자꾸 울어? 왜 자꾸 아파?”하고 자신의 아이가 묻는다면, 어머니인 당신은 아이에게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을까. 그 때도 아이에게 “거북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려니깐 그렇지.”라고 답할 수 있을까.

 


극단 마실 - 꿈꾸는 거북이
2011 0208 - 0227 대학로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2008년 문화일보홀에서 <이히히 오호호 우하하>라는 공연명으로 초연되었고, 관객들의 호응으로 '동화나라 상주 이야기 축제'와 '제 5회 아시테지 겨울축제'에 초청되었던 작품이다. 2010년 관객과 더 즐겁게 만나기 위해 <꿈꾸는 거북이>로 재구성하였다.
기존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우화인 '토끼와 거북이'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로 아이와 어른 관객 모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연이다.

www.masil.biz


필자소개 _ 강여사
연극이 좋아 시작한 연극에 대해 '무엇을 위해, 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늘 부딪힌다.
연극과 문화예술로 사회와 만나기 위해 천천히 움직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