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도시의 자화상, 안에서 보기 vs 밖에서 보기 - 두리반 도시영화제 「테이크 플레이스」,「용산, 337가지로 표현하기」

2011. 3. 23. 11:55Review


도시의 자화상, 안에서 보기 vs 밖에서 보기
- 두리반 도시영화제 「테이크 플레이스」,「용산, 337가지로 표현하기」

글_ 아키꼬

 

두리반 도시영화제 (사진제공: 박김형준)




Prologue

<테이크플레이스 Take Place>, <용산, 337가지로 표현하기 : 촛불방송국 ‘레아’>는 한 달 전에 열린 두리반 도시영화제의 마지막 상영작이었다. 과연 영화제가 마무리 된 이 시점에서 <테이크플레이스>와 <용산, 337가지로 표현하기>의 리뷰가 의미가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나 도시개발은 오늘도 진행되고 있으며 제2의 용산이라 불리는 두리반의 싸움 역시 지속되고 있다. 늦었지만, 도시가 만들어내는 허상과 야만성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기에 <테이크플레이스 Take Place>, <용산, 337가지로 표현하기 : 촛불방송국 ‘레아’> 리뷰 역시 유효하다 믿기로 했다. 더욱이 이 두 작품은 ‘거대 도시가 만들어낸, 자본과 도시행정, 폭력에 저항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담은 영화제의 주제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밖에서 본 도시, <테이크플레이스 Take Place>

유명한 고흐의 자화상을 보며 우리는 항상 생각한다. '한쪽 귀를 자르고 결국 권총자살을 한 고흐는 자화상을 그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하고. 고흐의 자화상은 웃지도, 울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흐를 보는 사람은 저마다 다른 감정을 갖는다. 자기 안에 존재하는 고민과 질문을 발견하기도 하고, 잔인한 사회가 억누르는 개인의 삶을 만나기도 한다.

 

테이크 플레이스 Take Place (박용석, 2009)


<Take Place>는 영화라고 하나 오히려 미술관의 작품에 더 어울릴 법하다. 서사도 없고, 주인공도 없다. 소리 없이 혹은 숨소리를 배경으로 사람이 등장하고, 골프연습을 하고, 축구를 하고, 잠을 자고, 연인들은 대화를 한다. '몸은 중요하지 않아, 정신이 중요한 거야'라는 대사가 삽입되었던 한 장면에서는 유치함에 손발이 오글거려 실소가 터져 나온다. 여러 개의 에피소드가 18분으로 구성된 <테이크플레이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어떠한 서사적 방법과 도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등장하는 인물이 배경에 어울리지 않는 골프, 주거, 축구 등의 행위를 함으로써 공간과 행위의 어긋남을 회화적으로 보여준다. 어긋남은 매번 화면에 등장하는 배경 '폐허'에 집중하게 한다. 이를테면 70~80년대 영화 속 여주인공의 대사 톤으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정신이 중요하지, 육체는 중요하지 않다'며 술집으로 나선 여자의 말을 그대로 옮긴 화면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재개발지역의 폐허는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한다. 시대는 변했지만 과거, 애초에 거주하던 이들을 배려하지 않고 이뤄진 폭력적인 개발과 자본과 국가의 투기에서 밀려난 난장이들의 삶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원주민들이 떠나가고 새로 입주하게 될 이들의 삶도 언제 다시 무너져 내릴지 알 수 없다. 마천루의 주상복합빌딩이 폐허 위에 세워지고, 새로운 복합문화시설이 오픈을 한다 해도 개발이라는 이름아래 언제 폐허가 될지 알 수 없다.

 

운동장의 기억을 잃고, 시장의 기능을 사라지고, 포크레인이 집의 벽을 허무는 순간 그곳에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폐허가 되는 도시의 모든 공간은 이미 잠재적 의미의 폐허인지도 모를 일이다. 시장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이든, 골목길마다 서려 있는 주민들의 삶은 언제든 허물어질 수 있는 모래성과 같은 존재다. 김 씨가 이 씨가 되고, 이 씨가 박 씨가 되는 등기부등본의 이름뿐. 사각의 콘크리트는 도시에서 끊임없는 재생산과 무한팽창 중이고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이게 현재 이 도시의 자화상이다.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라 좌절했던 황지우 시인의 고백처럼 사람은 없고 자본의 논리만 존재하는 서울은 모두 폐허다.




안에서 본 도시, <용산, 337가지로 표현하기 : 촛불방송국 ‘레아’>

2009년 1월 20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남일당 건물 옥상에 설치된 망루에서 농성 중이던 철거민 5명,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용산참사’로 부른다. 2여년의 시간이 지나 어느새 2011년이 되었다. 사건의 유족들은 참사가 발생한 지 355일 만에 합동 장례식을 치렀고, 2010년 12월엔 사건 22개월 만에 참사의 현장이었던 남일당이 철거되었다. 그리고 최근 대법원에서는 용산참사로 기소된 용산철거민 7명에게 징역 4∼5년의 실형을, 다른 2명에게는 집행유예가 확정됐다. 한편 강압적이고 비인권적 진압으로 참사를 낸 책임으로 사퇴했던 김석기 전서울경찰청장은 최근 주(駐)오사카 총영사에 임명됐다. 정부와 협상 타결이 1년이 지난 현재 유족과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줄곧 요구해온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생계 보장 약속' 등은 여전히 표류 중이다. 그리고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과 함께 용산참사 당시 느꼈던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도 조금씩 잊혀졌다.


시간이란 게 원래 양날의 검을 가지고 있다. 뜨거웠던 감정을 잊게 만들지만, 치유하기도 하는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시간의 힘이다. 저 하늘 위로 5명의 철거민의 생명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울분을 토했던 2년 전에는 개발과 자본과 현재 정부의 야만에 사람들은 피를 토할 듯 개탄하고 분노했지만 대부분의 과거의 사건이 그러하듯 어영부영 지나가 버렸다. 그럼에도 용산참사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사건의 당사자 유족과 철거민들은 남겨진 세상을 지키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용산, 337가지로 표현하기 : 촛불방송국 ‘레아’>는 참사 이후에도 용산을 지킨 이들의 기록이다.

 

<용산, 337가지로 표현하기 : 촛불방송국 ‘레아’>은 용산참사 그 이후의 기록이다. 기록은 기억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억하기 위한 것인가? 용산참사에서 자행되었던 개발을 둘러싼 폭력과 야만, 철거민들의 처절한 투쟁과 희생 혹은 용산참사 유족들의 눈물 등 담아야 할 기록은 많다. 참사 직후의 철거민의 ‘죽음’에 포커스를 맞춰 유족의 절절한 눈물을 보여준다면 울컥하는 감정을 극대화될 것이다. 정부와 경찰, 개발건설사 그리고 용산을 둘러싼 도시재개발 과정을 고발한다면 용산참사 직후에 느꼈던 분노와 날선 비판의식을 갖게 할 것이다. 하지만 <용산, 337가지로 표현하기 : 촛불방송국 ‘레아’>는 극적인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 대신 하루하루 싸우며 살아가는 용산철거민들의 일상을 담담하게 담고 있다. 추운 겨울 시청 앞에서 시위를 하고, 단식투쟁을 해도 묵묵부답으로 회피하며 방관하는 정부, 호프집 레아에 시민들의 동참을 이끌어내려 했던 공간 ‘낙지(樂地)도서관’을 강제로 철거하는 상황에도 삶을 지키려는 이들의 강직한 마음과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뿐이랴, 강제철거의 공포 속에서 눈물짓는 철거민이 아니라 미사를 드리며 마음을 다스리는 모습, 남일당 식당에서 먹는 밥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이들, 촛불방송국 ‘레아’의 라디오 방송에서 신나게 노래 한 자락을 뽑아내는 어느 위원장님의 소소한 일상은 따뜻한 미소마저 짓게 한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아픈 기억들을 잊으려한다. 분노, 절망, 좌절, 슬픔 등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기억을 지속적으로 감당하는 것은 인간에게 너무나 고통스럽고 사람을 쉽게 지치게 한다. 인생은 단거리질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라고 하지 않나. 싸우려면 체력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악착같이 밥도 먹고 몸도 마음도 움직여야 한다. 마냥 울고 있다고, 화내고 있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5명의 희생자가 나왔으나 용산참사 이후 2년이 지났고, 정부와의 보상협상은 극적 타결 1년이 지났지만 변화된 것은 없다. 이게 현실이다. 철거민과 유족들과의 그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스스로 힘을 내야 한다. 그리고 싸움의 과정이 즐거워야 한다. 특히 긴 싸움일수록 과정에서 사람이 지치지 않아야 한다. <용산, 337가지로 표현하기 : 촛불방송국 ‘레아’>는 용산참사 유족과 철거민의 즐거운 싸움을 담아내고 있다. 격렬한 대립의 스파크 대신 남일당과 용산 철거민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이 시대의 철거민의 아픔과 희망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혹은 욕망하는 돈과 명예, 권력에서 힘을 얻는다. 반면 철거민을 비롯한 대부분의 일반 시민은 돈, 명예, 권력 중 가진 게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무례하고 불온한 사회지도층에 맞설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비정하고 부도덕한 도시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건 바로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 같이 흘리는 눈물과 웃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희망과 용기…. 사람이 희망이고, 용기이며 힘인 것이다. 그리고 <용산, 337가지로 표현하기 : 촛불방송국 ‘레아’>에서 그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두리반 도시영화제
2011 0220 - 0222   @홍대 앞 작은 용산 두리반
기획 리슨투더시티

지도가 매일 바뀌는 서울, 기억이 없는 도시·알츠하이머 도시 서울을 유지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망각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일까?

70년대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 88년 상계동 올림픽, 2009년 용산, 그리고 지금 홍대 두리반까지, 철거의 공식에는 변한 것이 없다. 60·70년대에는 개발 독재 때문에, 80년대도 독재 때문에, 90년대는 IMF 때문에, 2000년대에는 신자유주의가 본격화 되었기 때문에 서울은 야만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생겨나면, 도시가 도시의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것인가?

거대 도시를 유지하지 위하여 보여서는 안되는 사람들은 가끔씩 도시의 허상을 깨고 밖으로 나온다. 이 영화들은 거대 도시가 만들어낸, 보여서는 안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보여져서는 안되는 도시의 이야기이다. 자본과 도시행정의 폭력에 저항하여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투쟁은 때로 상처 그 자체이다. 하지만 두리반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실패자들이 두리반을 예술로서 생명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균열, 사막의 오아시스 두리반. 그 속에서 서울을 살아있게 하자.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의 이웃.

cafe.daum.net/duriban
listentothecity.org/2011/666


필자소개
아키꼬
현실과 로망의 경계에서 길을 잃은 30대입니다.

요즘은 무모하지만 민폐는 아닌 라이프스타일을 연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