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코끼리들이 웃는다 <두 도시 주물이야기>

 

 

<두 도시 주물이야기>

장소를 입고, 장소를 읽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기

코끼리들이 웃는다

 

글_김민관

 

1. ‘장소 제한적 프로젝트’ : 상호 얽힘과 유목적 거주의 삶의 방식

특별한 지령을 듣고 입정동을 찾아간다. 이러한 찾아감의 행위 자체는 이미 장소 특정적이다. 일상의 복잡한 편차를 고려해 문화 관람 스케줄을 조정하여 편리한 교통수단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제도화된 극장 시스템의 무형의 상품 유형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수많은 보이지 않는 예술, 은밀한 시공간에 펼쳐지고 있는 예술은 그 찾아감의 행위 자체가 특정한 관객의 자리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코끼리들이 웃는다’(이하 ‘코.웃.다’)의 <두 도시 주물이야기> 프로젝트를 찾아 갔던 소수의 예술 향유층은 소위 그 안에서 타자가 된다. 곧 이 장소 특정적인 프로젝트의 일환은 특정한 장소에서 벌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 자체에서 출발하며 그 장소를 벗어나서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장소 특정적이다.

 

 

입정동의 거울상으로서 이 프로젝트는 거꾸로 입정동을 반영해 낸다. 이러한 상호 얽힘의 프로젝트는 대체로 근대와 맞물려 쇠락하거나 급변한 공간을 대상으로 지역적·장소적·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출발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하며 또 그것들을 아카이브해, 이것을 예술 행위의 과정적이고 사료 접근적인 가치 중심으로 재편하여 동시대적 예술로 새롭게 표상하는 전시 기반의 프로젝트들과는 그 성격이 상이하다.

그 ‘상호 얽힘’이란 일종의 커뮤니티 아트 차원에서의 관계 맺음으로, 이곳의 시공간을 점유하며 이를 대상화하는 대신, 이 장소들의 특정한 시간의 형식과 그것들이 합산된, 복잡하고도 느슨한 연결망 안의 한 지점에 접속하여 이 안에서 수많은 일상을 보내며, 프로젝트 전반을 기획하고 관장한 기획자 이진엽을 비롯한 프로젝트 팀의 (비)물질적 노동의 수행과 관련을 갖는다.

어쩌면 최후의, 그리고 가장 완벽한 형식으로 여겨질 수 있는 공연은 입정동에서 주물을 만드는 ‘아저씨’들의 모습을 재현하며 그들의 일상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것에 가깝다. 여기에 외부의 시선, 곧 어떤 비판적·해석적 성격의 시선이 일부 첨가된 바는 이들이 자주 시켜 먹는 ‘다방 커피’의 배달 종업원의 엉덩이를 치고 뺨을 맞는 희극적 장면으로 치환한 것 외에는 크게 없다.

물론 노동 장면의 압축적인 편집은 중간 중간 담배나 한숨을 쉬는 것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면서 자연스레 컨베이어벨트에 몸을 맡겨 기계처럼 반복된 일상을 수행하는 근대의 전형적 노동자의 형상에 대한 은유로 여겨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노동자 형상을 비롯해 영혼을 거대 자본 시스템이 형성하는 노동에 탈환당하며 그에 무기력하게 숨을 소진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마임 형식의 극으로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 공연을 생각하기에는, 바로 이 공연이 벌어지는 장소 안에서, 그리고 이 장소에 진정 기반을 두고 있는 몇몇 이들과 함께 있는 이 순간에서 부적절한 것임이 감지된다.

이러한 노동의 맥락은 이 장소 안의 특수한 삶의 형태이며 금속을 주무르던 대장장이의 특별한 연금술의 역량과 근대를 ‘주조’하고 근대를 거쳐 그 이후에도 기계나 과학의 발명이 가능하지 않은 주물만의 한정된 그래서 특별하고도 특정한 영역의 성격과 연관된다. 주물을 만드는 노동에 대한 매뉴얼이 전시장에 마련되어 있기도 한데, 극의 실제 노동의 재현을 통해 금속 주물 대신 뽑기 과자가 생산된다.

 

 

2. 유목적 거주와 상호 얽힘의 장소 특정적 프로젝트

이 장소에서만 가능한(실제 이 장소를 벗어나 미술관에서 이후 한 번 더 작업이 펼쳐졌지만, 물론 이는 장소가 가진 맥락을 제한하여 말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가깝고, 미술관이라는 또 다른 장소와 그것과 관계 맺는 관람객과의 관계를 통해 작업의 맥락이 변화된다) 이 극은 곧 관객 역시 그 장소와의 상호 얽힘을 통해 이곳의 타자로서 작업을, 그리고 이곳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은 실은 이 작업이 그들의 삶의 특수한 노동 형식을 재현하기까지의 수많은 시간의 접촉으로부터 출발한다.

상호 얽힘은 그리고 이 장소 특정적인 작업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며 또한 이 안에서의 삶의 형식을 발명할 필요가 있다. 이진엽의 스스럼없는 아저씨들과의 대면은 이 극의 연장선상에서 이 프로젝트가 예술 작품이기 이전에 이곳 안의 어떤 삶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드러낸다. 극은 그런 의미에서 프로젝트의 결과물에서도 그리고 프로젝트 전반의 과정에서도 일부일 뿐인 것이다. 앞선 ‘아저씨’라는 호명은 바로 이런 결코 나하고는 직간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그럼에도 임시적으로 이웃이 된 것 같은 착각을 주는 이 공연의 장소를, 또 그 안의 사람들을 소재화·대상화하지 않는 차원의 어떤 뒤섞임에서 자연스레 튀어나오는 (이진엽에 감응된) 어떤 무의식적 표현이다.

 

‘코.웃.다’는 ‘이동형 주물공장’으로 명명한, 대형 캐비닛을 카트에 올려 끌고 다니며 이동식 극장 시스템을 구현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상 극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두 개의 짐은 그것을 카트에서 내려놓고 펼쳐 놓았을 때 하나는 ‘전시-극장’이 되며, 하나는 극의 오브제들을 담은 채 무대 배경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이 두 캐비닛은 전자는 수평으로 밀 수 있게 바퀴가 장착되어 있어 이동시 수월한 편이며, 후자는 캐비닛의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캐비닛을 눕혀 밀고 끄는 행위가 앞뒤에서 조응되어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는데, 이동은 프로젝트의 일부이며, 이 수고스런 이동 행위 자체가 실제 공연보다 더 힘들 정도의 크나큰 노동의 행위로 포섭된다.

‘전시-극장’은 측면에 영상의 프레임을 제공하고, 6개의 서랍을 펼침으로써 전시 공간으로 연장되며, 그 서랍들에는 갖가지 공구들과 한일 주물 공장 안을 찍은 사진들의 축소판이 담겨 있다. 사진들은 돋보기 렌즈로 비춰볼 수 있고, 높낮이가 제각각인 서랍들에 맞춰 몸의 위치를 조율하며 그에 근접해야만 한다. 또한 한일 주물에 대한 용어들의 비교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특수 캐비닛의 발명은 단순히 자료를 나열한다기보다는 엄선된 모음의 공구 상자이자 한정된 영역의 공간 안에서 그것에 접속하는 형식까지 창출한다는 점에서(그러니까 관객은 이곳을 그저 보는 게 아니라 ‘들여다봐야’ 한다) 특정한 관객으로서의 자세를 만들며, 곧 대상 바깥에 있는 관람객이 아니라 공간 안에 있는 관객,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극장을 만들기에 이른다. 앞선 극이 입정동의 시간을 압축했다면, 이 전시는 입정동의 풍경과 일상의 이미지들을 공간적으로 압축한 형식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캐비닛-카트’가 있어야 할 곳은 어떤 특정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곧 바퀴 달린 카트는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는데, 이는 갖가지 주물 공장 아저씨들과의 특별한 시간대의 반복된 만남과 그로 인한 각인된 약속의 지점들이 생겨나게 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입정동의 연결망에의 프로젝트 접속이 시공간의 분배에 기초해 있음은 다름 아닌 유목-정주적인 이 임시 극장/짐에 동반되는 거주 형식과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극장은 이틀 동안 계속 옮겨 다니며 이곳저곳에서 공연을 치러 냈는데, 이는 다양한 장소 특정적 공연이기 위한 작위적 설정이라기보다는 실제 이들을 위한 주물 공장으로서 장소는 없으며, 단지 임시적으로만 주물공장들의 틈에서 그곳을 빌릴 뿐이라는 데서 어쩔 수 없이 출현하는 형식으로 봐야 한다. 그렇지만 이 ‘어쩔 수 없음’은 제한된 부분이라기보다 평소 이 입정동 전체와 느슨하게 또 긴밀하게 연결·접속하는 치고 빠짐의 고도의 커뮤니케이션이 전제되어 있음과 또한 연결되며, 이 캐비넷-카트의 이동은 평소 수많은 아저씨들과의 친숙한 대면을 계속해서 반복 출현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아저씨들은 도시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고정된 공간에서 은밀하게 주물들을 생산하며 드문드문 소수의 주물공장 아저씨들을 위한 공연으로, 이 끊임없는 옮겨 다님의 짐은 이틀 동안 극장을 위한 장소로 변신하게 된다. 애초 ‘장소 특정적’이라는 말은, 그리고 특정한 예술 향유층으로서의 관객이 타자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시공간의 특수한 분배가 이곳 안의 시간의 흐름을 따르며 그에 맞춰 이동하는 ‘코.웃.다’의 특정 시간과 장소에 접속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곧 이는 한편으로 이 프로젝트가 이 안에서 출발되었고 또 생성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이들을 위해 장소 특정적인, 무엇보다 장소 제한적인 소수의 결과물들만을 갖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점은 꽤나 특이하고 어쩌면 특별하다. 결국 결과물이 예술가의 객관적 상관물로 대상화되지 않는 이 프로젝트는 유목적 거주 방식으로 이 주물 공장 아저씨들에 접속하며 그들 자체를 보여주게 되는데, 주물을 직접 다루는 것과는 다르지만, 뭔가를 생산하는 이로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곧 프로젝트는 한편 극으로의 완성을 꾀한다기보다는 극은 프로젝트의 일부이면서, 이 프로젝트가 이 안 여러 곳에서 자연스럽게 펼쳐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게 극의 전제 조건이자 어떤 완성의 측면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는 특별한 이방인에서 이웃으로서 정체성을 용인 받게 되는 시간의 궤적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3. 지속되는 프로젝트, 그러나 그 장소에서 온전히 소진되는 장소 특정적 예술

이러한 과정은, 그리고 이 지역은 장기 프로젝트의 일부이다. ‘코.웃.다’는 일본을 우리 주물 공장과 비교 차원에서 리서치하기 위해 방문했으며 거기서도 같은 공연들을 치러 냈다. 다만 그 보여주기의 방식은 크게 상이하다. 입정동 공연은 광장의 요소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골목을 빽빽이 채운 작은 공장들이 이룬 환경 속에 매우 비좁고 또 도로와 떨어진 골목 중간에서 주로 조용한 시간에서 공연했지만, 영상을 보면 일본에서는 대체로 모두가 공유 가능한 빈 시간에 그들을 모아 비교적 큰길에서 공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본에서의 영상 기록물은 공연·전시와 함께 프로젝트의 과정들, 이진엽의 과정 일지 등을 보여주는 입정동 안 임시 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이는 매끈한 전시 형태로 ‘포장’된 것이라기보다 어떤 자연스런 기록의 축적을 임시적으로 모아 두고 그것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 특별한 매개 장소로 기능하게 하고 지나가다 느슨하게 접속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주물공장의 환경을 비교한 사진들, 용어들의 차이에 대한 언급은 앞선 전시-극장에서도 볼 수 있는 부분인데, 주물의 일본식 용어 사용이 일제 강점기나 그 이후의 지속된 영향일 수 있음을 추정해 그것을 살피며 근대 이전을 추적해 나간다거나, 거꾸로 일본에서 받은 우리 주물 공정 방식으로부터의 영향을 살펴본다거나 하는 식의 연구는 이후 너무 학술적이지 않으면서도 흥미롭게 접근될 수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두 주물 공장의 문화의 차이를 언급하는 부분이나, 두 문화의 뒤섞임의 일면이 만들어지거나 하는 부분은 미미했다고 보인다. 무엇보다 특정한 지역에서의 삶과 직업 양식을 반영해 내고, 그 안에서 삶의 형식을 발명하는 데 더 큰 비중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장소 특정적인 작업에 한해서 예술은 결과로 남겨야 하며, 또 남겨진 것들보다는 그 과정 자체가 얼마나 그 장소의 삶의 방식과 근접 조우하며 삶 자체의 방식을 고스란히 다시 제공하게 되는가, 또 그 속의 일부가 되어가며 기존의 예술가 정체성의 변화 과정을 겪는 과정 자체가 얼마나 심도 있었는가에서 그 결과의 가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입정동을 재현함에 있어 그것과 철저한 거리를 벌리며 그 바깥의 결과물을 산출하는 데 최종 목적이 있는 대신, 그 안에서 삶(=작업)의 방식을 발명하고, 그 안에서 산출되는 결과물을 그들에게 하나의 약속의 결과로서 제시하고자 한 작업의 장소 특정성은 다름 아닌 장소를 특정한 시간만 일시적으로 전유하는 대신, 장소 안에 장소를 발명하며 특정한 장소로 주조해 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몇 년간 주물 공장의 일상과 삶을 탐색해 온 ‘코.웃.다’의 이진엽의 예술가적 욕망이 향하는 바는 주물 공장 자체에 대한 매료와 함께 마치 그 속에서 주물로서 용해되는 어느 지점에 닿아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끈덕지며 또한 그 결과물을 산출하는 데 큰 욕심이 없어 보인다. 이는 주물이 비-예술의 영역이 아닌 (우리 삶과 비교해서) 삶의 (특수한) 영역인 동시에 예술 그 자체인, 곧 예술의 확장된 영역 안에서 포착한 삶의 한 부분임을 인지하는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의 소재를 갖고 뭔가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주물이 곧 예술이라는 아이디어 고안이 작업일지의 비교적 앞에 위치하고 있음을 사료해 본다면, 이는 더욱 분명해 보이는 부분이라 할수 있겠다.

 

 

*사진제공_코끼리들이 웃는다 (사진촬영 : 남지우)

**코끼리들이 웃는다 웹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elephantslaugh.com

 

 필자_김민관 (mikwa@naver.com)

 소개_공연예술 프리랜서 기자 및 자유기고가. 문화예술 분야에 전반적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현장을 쫓아다니며 기록 중. 온라인 뉴스채널 http://artscene.co.kr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