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라크 연극 <아버지를 찾아서>

2013. 11. 15. 02:02Review

 

신과 거지와 장총과 브레히트를 싣고 트럭은 달린다

이라크 연극 <아버지를 찾아서>

연희단 거리패

 

글_오세혁

 

사회적으로 건설적이지 못하다면

추상적인 무대가 무슨 소용이며

이 세상의 비뚤어지고 어리석은 모습만을 비춘다면

그 좋은 조명기구들이 무슨 소용이며

아무리 훌륭한 연기력이라도

우리에게 x를 u라고 속이는데 쓰여진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브레히트

 

 

“싫다! 안 돼! 믿을 수 없어! 믿고 싶지가 않아! 녀석은 형제다!”

신을 닮은 아버지가 있다.

신을 닮은 아버지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다. 아니,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믿을 수가 없다. 세상이 이리도 악하게 변했다는 것을.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가 자기를 배신했다는 것을. 그 형제는 정말 형제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고 시아파와 수니파일 수도 있고 항미파와 친미파일 수도 있다. 그들은 모두 한 뱃속에서 나왔으니까. 한 뱃속에서 나온 누군가가 신을 닮은 아버지를 배신했다.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그래서 신을 닮은 아버지는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을 거부했다. 기나긴 침묵에 잠긴 채 잃어버린 왕국의 영광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할 뿐이다.

신을 닮은 아버지는 이 지독하게 변한 인간의 세상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수많은 인간의 조건을 박살내 버렸다. 신을 닮은 아버지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남매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언제나 하늘에 가장 가까운 표정으로 기품과 위엄을 잃지 않던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자녀들은 집을 팔아 차를 사서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간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을 핸들을 움직여 이리저리 피해가며, 차문 밖의 지독한 현실을 애써 외면해 가며, 이들은 어떻게든 아버지를 다시 신처럼 고귀한 모습으로 돌리려 애쓴다. 남매의 눈에는 신을 닮은 아버지만 보일 뿐이다. 그 외의 세상에는 눈 돌릴 겨를이 없다.

아니, 눈 돌리고 싶지 않다.

 

“차를 훔친 녀석은 도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버지까지 훔친 녀석은 스스로 자기 인간성까지 훔쳐 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남매는 차를 도둑맞는다. 차와 함께 아버지도 도둑맞는다. 차를 훔쳐가는 김에 아버지도 훔쳐간 것인지 아버지를 훔쳐가는 김에 차도 훔쳐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나라에서는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이 ‘매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차를 매매하기 위해 도둑이 나타난 건지, 아버지를 매매하기 위해 도둑이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남매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이 땅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들은 ‘신을 닮은 아버지’와 가장 반대되는 사람들을 본다. 바로 ‘야차를 닮은 사람들’이다.

경찰은 쉴새없이 들어오는 민원 처리를 모조리 구겨버리고 찢어버린다. 납치당한 아버지 따위는 그에게 서류 한 장 따위의 사소한 일일 뿐이다. 청소부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눈물 흘리는 딸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려 한다. 하지만 그 손길은 25000디나르라는 돈을 그의 손에 쥐어줘야만 받을 수 있다. 거리 곳곳을 누비는 걸인들의 두목은 17개 구역을 24시간 총괄하며 3교대로 구걸을 시키고 있다. 구걸을 효과적으로 시키기 위해 그는 대수롭지 않게 걸인들의 손목을 자른다. ‘동정심’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어느 부위라도 상관없이 자르고 찢고 구멍을 낸다. '신을 닮은 반신불수의 아버지'가 구걸을 하기에 최고의 동정심 상품임을 그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매매’하고 ‘임대’해서 ‘이윤’을 얻는다.

 

 

“어림도 없다 이 더러운 녀석! 나도 수입원을 지키는 각오는 되어있다. 여기서 나를 죽이지 못하면 이 늙은이의 대갈통부터 때려 부숴 버리겠어!”

남매의 눈에는 이들이 인간이기를 거부한, 너무나 비인간적인 사람들로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만나는 걸인 노파에 비하면 이들은 오히려 인간적이다. 이 노파는 그 누구보다 더 억척스럽게 구걸을 하고 억척스럽게 폐지를 줍는다. 아버지를 매매하는 현장에서 그녀는 열사람의 경쟁자를 제치고 억척스럽게 아버지를 임대한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카트에 태워 돌아다니며 억척스럽게 구걸을 한다. 중풍에 걸린 노파 흉내를 억척스럽게 내면서. 그녀는 이 땅의 가장 지독한 ‘억척어멈’이다.

신을 닮은 아버지와 악귀를 닮은 억척어멈이 하나의 카트에서 함께 머문다. 함께 구걸을 하며 함께 살아간다. 이 놀라운 현실을 남매는 믿을 수 없다. 어찌 아버지가 저 억척어멈과 함께 하는가. 하늘에 가장 가까웠던 아버지가 어째서 밑바닥에 가장 가까운 노파에게 끌려 다니는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어째서 아버지는, 아니 인간은, 왜 이토록 비인간적인 세상에 놓여 살아가야 하는가.

 

"나도 언젠가 아버지였다. 너처럼 아버지를 찾아 헤메는 자식이 없어서 내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어 버렸지만 이제 네가 아버지를 찾으니 내가 아버지라는 걸 깨닫게 되는 구나"

하지만 생각해보자. 이들은 정말 비인간적인가? 이들이 비인간적이라면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비인간적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었는가? 신을 닮은 아버지는 왜 이토록 무기력한가. 신을 닮은 아버지가 이토록 무기력한데, 왜 남매는 그렇게 필사적으로 그를 돌보는가. 지금 이 땅은 전쟁 중이다. 강대국의 전투기들이 이 땅에 무차별적인 폭격을 퍼붓는다. 강대국의 관료들이 이 땅에 무차별적인 경제 규제 폭격을 퍼붓는다. 강대국의 기업들이 이 땅에 무차별적인 상품 폭격을 퍼붓는다. 지금 이 땅은 강대국의 온갖 비인간적인 폭격들이 무차별로 퍼부어지고 있다. 이 무차별 비인간 폭격으로 인해 이 땅의 모든 것은 황폐화 되었다. 황폐화된 땅에 사는 인간들이 어찌 황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야차를 닮아가는 세상에서 어찌 인간들이 신을 닮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이들은 지독하게 변한 세상을 닮아 지독하게 변해간다. 하루하루를 지독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선량함과 자비심과 눈물 따위는 기도도 안 들어주는 신 만큼이나 불필요한 것이다. 이 비인간적인 세상에서 이들은 스스로를 비인간의 갑옷으로 무장한다. 하지만 이 지독한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그들은 딱 한순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때 아버지였고 한때 어머니였던 그들은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는 아버지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는, 도무지 지금 인간 같지가 않은 남매를 만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아버지였던 시절과 어머니였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약간의 인간다움이 돌아오게 된다. 물론 이들의 인간다움은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것은 이들이 야차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야차처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네 어머니는 하늘에 있지 않아!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 리어카를 끌고 헤매 다니지! 내가 바로 너희 어머니야 이 멍청한 자식아!”

자 이제, 우리가 저들을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비인간적인 전쟁과 장사꾼들 속에서 의도적으로 비인간적으로 변한 저들을 말이다. 평범하지 않은 세상에서 평범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평범함은 누구의 비 평범함을 밟고 확립했는가. 시골에 지은 원전과 송전탑으로 도시의 불빛을 빛나게 하는 우리는. 건물의 경비부터 화장실의 변기에서 거리의 폐지까지 노인들의 땀방울로 쾌적해지는 우리는. 직장에서는 불평등한 대우로 분노하면서 식당에서 밥이 조금 조금 늦게 나온다고 호출 버튼을 사정없이 눌러대는 우리는. 우리의 형제일지도 모를 전화 상담원과 마트 직원과 AS기사들에게 온갖 폭언과 쌍욕을 퍼붓는 우리는.

가장 밑바닥의 억척어멈이 전재산을 털어 신을 닮은 노인을 산다. 신을 닮은 노인은 카트에 앉아 비로소 자기의 몫을 해낸다. 그리하여 비로소 신을 닮은 아버지만 바로 보았던 자녀들이 거지로 살아가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하늘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남매가 이 땅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들은 억척어멈을 어머니로 인정해야 한다. 악착같은 힘이, 가난이, 슬픔이, 그들을 낳았다고 인정해야 한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것에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고? 글쎄, 그건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당신은, 오늘 이 힘겨운 하루를 마친 후, 마음속에 누구를 담아서 집으로 돌아가는가. 신을 닮은 아버지? 인간을 닮은 어머니? 아니면 둘 다?

 

"연극이 폭탄보다 더 위력이 있다는 걸 깨닫기 바라네"

이 놀라운 이야기는 이라크의 젊은 극작가가 썼다. 이야기의 맨 처음에서 배우는 이런 대사를 한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소지품은 체코제 장총이었지만 이제는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가 담겨있는) CD속의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연극이 폭탄보다 더 위력이 있다는 걸 깨닫기 바란다는 말과 함께.

정말 연극이 폭탄보다 위력이 있을까? 알카에다가 되려고 했던 청년은 왜 브레히트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이들이 이라크의 곳곳을 유랑하며 펼치는 연극은 전쟁의 그늘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얼마만큼의 햇빛을 줄 수 있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그들은 어떤 곳을 누비며 어떤 연극을 펼치고 있을까. 왜 연희단 거리패는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땅에서 저 머나먼 이라크 작가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저 한 웅큼의 대사 때문이 아닐까.

"보시다시피 지금 우리 형편이 이렇습니다. 단 둘이서 떠돌아 다니면서 연극을 한다는게 한없이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한 푼이라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발적으로 한 푼 내실 분은 극장 문을 나가시면서 통로 왼쪽편에 있는 그릇에 던져 주십시오. 우리가 노골적으로 한푼 줍쇼! 하지 않을 테니까요. 자 그럼 이제! 살인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이 세계! 어디선가 존재하고 있을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사진출처_극단 연희단 거리패 제공

**연희단 거리패 웹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stt1986.com/

 

 필자_오세혁

소개_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에서 작가, 연출, 배우로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