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8. 15:51ㆍFeature
[전국 연극인 젠더감수성 ] 6. 2020 연극의 해 젠더감수성 워크숍 전주편 참여후기
모아름드리(워크숍참가자)
2020 연극의 해 사업 중 하나인 <전국 연극인 젠더감수성 워크숍 : 연극x젠더감수성, 대체 뭔데?>는 연극 안의 젠더감수성이 무엇인지 함께 알아보고 토론하고, 직접 글을 쓰는 과정입니다. 전국의 7개 지역에서 진행되는 워크숍은 강의와 토론의 의미를 넘어 각 지역에서 비슷한 고민과 불편함을 가진 동료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새롭게 연대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단어 ‘젠더감수성’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젠더감수성’이 있는 작품은 어떤 작품일까요? 이번 연재는 워크숍에 참여해주신 안산, 광주, 대구, 부산, 춘천, 대전, 전주지역의 연극인들이 보내주신 원고로 이루어집니다. 주최/주관 2020연극의해집행위원회 주관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
제작년 전주에서 <2019실패박람회IN전주> 행사가 치러졌었다. 그러니까, 전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200여명의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이 특별한 주제 없이 필드에서 겪은 ‘실패’를 말하는 자리였다. 기획, 국악, 클래식, 시각예술, 생활문화 등 다양한 분야가 실패를 이야기 했고 나는 연극인들이 말했던 실패를 선명히 기억한다. 그것은 이미 연극계에서 이렇다 할 자리를 꿰차고 있는 자들의 리그를 말했고, 진보하지 못하고 고여 있는 수업방식을 말했고, 가스라이팅을 말했다. 성추행을 말했고, 현실과의 충돌을 말했고, 그렇게 연극계를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을 말했다. 경각심과 심각성을 느꼈지만, 몇 차례 들은 이야기라 크게 놀라진 않았다. 오히려 놀랄 일이라기보다 언제까지 이렇게 고여 있어야하나 고민해야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전주는 이래야하나, 언제까지고 부끄러워야하나.
그래서라고 말하고 싶다. 젠더감수성워크숍 포스터를 보았을 때, 전문연극인이 아니어도 참여할 수 있냐고 묻고, 참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 이유가. 내가 연극 콘텐츠 생산자는 아니지만 소비자로서, 또는 참여자나 관계자(내가 일하는 곳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연극동아리 활동을 이어가고 있어서 가끔 공연에 스태프로 투입된다)로서 깨어있고 변화를 꾀할 수 있는 게 어떤 부분이 있을까.
워크숍에 참여하기 위해 읽어 와야 하는 숙제가 있었다. 이강백의 봄날. 희극을 찾아 읽은 게 몇 년 만이더라. 비전공자이기 때문에 배경지식과 사전정보를 촘촘하게 조사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지문을 읽어나가며 문학적으로 분석한다고 글 위에 형형색색의 볼펜으로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그어놨을 텐데 읽어 내려가면서 영 속이 불편했다. 풍속이라는 미명하에 어린 아이를 성적으로, 도구로 취급하는 모습이 불편했고, 소중한 생명을 단지 겉모습으로 혐오하며 죽이려는 모습이 불편했고, 이리 저리 복합적으로 불편해서 이 작품을 이랬다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있는 단어는 ‘불편하다’ 뿐이었다. 그 날 워크숍에 참여해서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서 다른 참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판소리를 하는 참여자의 입장에서, 배우의 길을 이제 막 걷는 사람의 입장에서, 공연을 올리는 기획자와 연출자의 입장에서 다양한 불편의 의견을 나누었고 여러 작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선의 폭이 한층 넓어질 수 있었다.
사실 워크숍 장소에 가서 나는 무척 놀랐다. 나도 행사와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사람이지만 세부적인 것들까지 꼼꼼하게 챙긴다는 점에서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주에서는 열리는 웬만한 큰 행사도 이렇게 행해지는 걸 본적이 없어서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날의 느낌과 생각을 일기에 적었다. 아래는 그것의 일부이다.
‘워크숍을 신청하는 양식에 불필요하게 성을 물어보지 않는 것. (성)파악이 필요할 시, 남성, 여성뿐만 아니라 '제 3의 성'이나 '밝히기 어려움'의 선택지를 넣는 것. 알아서 다과를 준비하거나 일방적으로 회식장소를 통보,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신청 받을 때 미리 식이지향이나 알레르기가 있는지를 물어보고, 그 음식점을 찾아 알려주는 것. 아이스 브레이킹을 진행하면서 서열, 위계를 형성할 수 있는 나이를 묻거나 출신이 드러나는 것을 조심하는 것. 참여자 중에 있든 없든 시각장애인을 위해 강연에 속기사분과 동행해 연사자의 말을 바로 글씨로 읽을 수 있도록 타이핑 하는 것. 소수인 사람들이, 주류에 짜 맞춰지도록 강요를 받거나,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하는 것. 도시에 사는 비장애인, 이성애자, 성인, 선주민의 시선에서 벗어날 것. 기획자로서 많은 것을 느끼고 더 깨어있어야겠다 느낀 하루. 연극 극본과 영화의 장면, 포스터, 클리셰, 상영기준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분석하고 실컷 이야기를 나눈 오늘을 잊지 말아야지.’
워크숍 강연을 통해 언어습관을 교정하였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가장 질이 나쁜 악은 바로 ‘무지’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 말을 진심으로 믿는다. 말은 정신을 지배하기에, 말하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 언어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출산(産)률 아니고 출생(生)률, 자(子)궁 아니고 포(胞)궁, 유모(母)차 아니고 유아(兒)차...... 일상에 이렇게 많은 성차별적 단어가 녹아들어 날 삼키고 있었다니, 앞으로 단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내가 또 다른 성차별적 단어를 쓰고 있지 않은지 성차별 단어채집 스터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단어뿐만 아니라 전자제품이나 악기에도 남성의 기준이 들어가 있었음에 무척 놀랐다. 어쩐지 추웠던 에어컨의 표준 온도, 작은 내 손을 탓하며 끊임없이 찢었던 피아노의 1옥타브, 손목이 시큰거리던 핸드폰 크기와 무게. 왜 이렇게 남성들 위주일까. 우리도 힘이 있고 싶다. 힘을 가지고 싶다. 내 안의 욕망이 꿈틀댄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렇다면 남성 위주의 서사에서 벗어난 여성 중심의 작품들은 어떨까? 여성이 성적으로 소비되지 않고 탄탄한 서사를 가진 작품은? 얼마 전 네이버에서 ‘정년이’라는 웹툰을 보았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여자이고, 남자는 조연으로만 드물게 나왔는데, 성차별을 철저하게 깬 작품으로 뜨거운 평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나는 여성이지만 남성들의 시선에 익숙해진 바람에 이 건강함이 어색하였다. 하지만 나 역시 곧 여성 위주의 서사에 적응하길 바라고, 워크숍에 참여한 참여자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이처럼 멋진 작품들을 만들기를 바라본다.
워크숍을 한 문장으로 적자면 이렇게 적고 싶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워크숍에 필드에서 뛰는 배우들이 많이 오기를 바랐는데, 코로나가 약해진 기간에 공연이 한창이어서 그런지 오히려 참여비율이 낮아서 아쉬웠다. 여담이지만 이 워크숍을 참여하던 당시, 남자친구는 강연인지 아니면 강연에 참여하는 나인지를 달갑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이유는 차치하고 여하튼 몇 번의 설전 끝에 그 사람과 틀어졌다. ‘때문에’라고 해야 할지, ‘덕분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의 구원자로 인하여 홀로서기를 할 수 있었다.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워크숍을 기획하고 준비한 모든 분께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다. 이젠 전주에서 만들어가는 젠더감수성워크숍과 다양한 개인행동, 시민행동이 촉발되기를 바라며 나 역시 움직이고 변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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