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26. 00:02ㆍReview
1.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 연극의 배경은 ‘감포’라는 작은 마을이다. 허구의 지명이 아니라 경북 경주시에 있는 마을이며 연극은 그 마을을 그대로 가져왔다. 마을 앞바다에 문무대왕릉이 있고 문무왕의 전설이 아직 살아있는 마을이 감포다. 고유지명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은 흔하지 않다. 아마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있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지구가 마을처럼 가까워졌다는 말일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교통수단의 발달은 마을을 해체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을은 점점 커져서 도시가 되었다. 도시가 되면서 마을이 가지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도 사라졌다. 사라진 것들 중 하나가 ‘이야기’다. 사람들의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하나씩 품고 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 사연을 공유하고 있거나, 그 사연을 귀 기울어 들어 줄 이웃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죽마고우가 이웃에 살고 있는 마을,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이웃이 있는 마을이 감포다. 그래서 감포에는 이야기가 있다. 분이의 이야기가 있고, 덕이와 열수의 이야기가 있고, 설씨와 단씨의 이야기가 있고, 미천과 한사장의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가 있을 수 있는 것은 그 이야기를 공유하고,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감포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감포 자신도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데, 문무왕의 수중릉 전설과 만파식적의 전설이 과거의 이야기라면 핵 폐기장이 들어서는 것은 현재의 이야기다. 감포의 문제가 곧 자신의 문제가 되는 마을 사람들은 전설을 품듯이 핵 폐기장을 품어야 한다. 그러나 전설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었지만 핵 폐기장은 사람들을 분열시킨다. 문무왕의 전설은 사람들의 이타심을 상기시키지만, 핵 폐기장은 사람들의 이기심을 상기시킨다. 연극 ‘감포 사는 분이,덕이, 열수’는 어쩌면 이야기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감포의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연극의 주인공을 감포라고 한다면 너무 큰 비약이 될까?
2. 사람 냄새는 어떤 냄새일까?
코로 맡을 수 없는 ‘사람 냄새’란 것이 있다. 코로 맡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맡을 수 있을까? 감각 기관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마음, 정신 일까? 이건 너무 추상적이다. 조금 구체적인 것은 없을까? 마음이 일어나는 곳? 혹시 경험이 아닐까? 있을 땐 몰랐지만 잃어버리고 나서야 소중했던 것임을 깨닫는 경험. 그래서 그 냄새는 ‘고향의 냄새가 그리움’이듯이 그리움이 아닐까? 어린 시절, 이해타산 없이 관계를 맺었던 친구들, 그 친구들의 냄새처럼 지금은 맡을 수 없는 냄새. 이것은 그리움 아닐까?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에는 이해타산이 없는 관계들이 있다. 자식을 죽인 열수를 자식처럼 키우고 있는 분이.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부모를 죽이고, 자신을 반편이로 만든 분이를 엄마라고 부르는 열수, 반편이 열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15살 때 거둬들인 분이를 엄마라 부르는 맹인 덕이. 자식인 연호를 자신의 전부로 알고 사는 설씨. 분이의 죽마고우로 아픈 아내를 뒷바라지하는 이장 단씨. 분이와 같은 야채장사를 하면서 분이와 경쟁하지만 분이의 상처에 아파하는 미천.
이해타산이 아닌 다른 것이 이 관계들을 형성한다. 그것은 감정이다. 특히 분이의 감정은 복잡하다. 열수에 대한 감정은 자식을 죽인 미움과 기른 정이고 덕이에 대한 감정은 연민과 기른 정이다. 설씨에 대한 감정은 자신을 양공주로 팔아넘긴 설씨 가문에 대한 한의 투영과 자신을 돌봐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버틀러에 대해서는 그리움과 미움이 있다. 이 외에도 각각의 인물은 시시때때로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연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관객들이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러한 감정의 변화를 관객들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이 없이 맺는 관계가 많다. 그 관계 속에서 감정이 싹트면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된다. 그러나 미움이 생기면 관계를 끊어버린다. 친구는 원수가 되고, 연인은 남남이 된다. 그러나 ‘감포’에는 원수 같은 친구가 있고, 미운 연인이 있다. 감정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쌓인다. 마치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이 쌓이듯이. 그리고 그것이 사람이 사는 법이라고 얘기한다.
감정이 쌓이듯이 이야기가 쌓이는 마을, 덕지덕지 누빈 감정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마을, 그리움이 쌓이는 마을, 그래서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다.
3. 사람 ‘사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일까? 쉽다면 왜 자살하는 사람이 생기는 걸까?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건강하게 사는 것’도 있지만 ‘잘 사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잘 살아’와 ‘못 살아’의 기준은 무엇일까? 돈일까? 저마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얘기할 가치가 없는 걸까? 꼭 잘 살아야만 해야 하나. 그냥 살면 안 되는 걸까? 그냥 산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까? 그냥 산다는 것은 무책임할 수 있겠다. 적어도 삶의 의지는 있어야겠다. ‘감포’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이 삶의 의지가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분이, 덕이, 열수가 가지고 있는 삶의 의지가 다른 인물들과는 조금 다르다.
분이는 앉은뱅이이고, 덕이는 맹인이고, 열수는 반편이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타인의 도움이 절실하다. 이 절실함은 이들이 외치는 ‘복 받아 가이소!’로 나타난다. 이들은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육체로 깨닫고 있다. ‘나’는 타인의 타인이지 ‘타인’이 아닌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래서 타인에게 진심으로 ‘복 받아 가이소!’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이 절실함이 극에 달하는 장면이 있다. 맹인 덕이가 자신들을 해하던 깡패에게 눈물을 머금고 ‘복 받아 가이소!’라고 외치는 장면이다. 이들에게 ‘복 받아 가이소!’는 운명이다. 이들의 삶의 의지는 타인을 향해 있다.
반면에 극 중의 다른 인물들은 타인을 위해 복을 빌지 않는다. 이장 단씨는 아픈 아내의 쾌유를 빌고, 설씨는 자식을 낳아 달라고 빌었고, 지금은 그렇게 나은 자식이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길 빌고 있다. 한 사장은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 목적이고, 야채 장수 미천이 역시 자신의 안위가 우선이다. 이들이 복을 비는 대상은 동해의 용이 되었다는 문무왕인데, 대왕암에 내리는 볼을 본 사람은 소원성취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 이들의 삶의 의지는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
이 극에는 여러 가지 불이 나온다. 분이 가족이 들고 다니는 초롱등불은 탈무드에 나오는 ‘맹인의 등불’을 연상시킨다. 자신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걸어둔 등불. 타인을 향한 등불이다. 그리고 문무왕의 수중릉에 내리는 등불, 이 불 역시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는 문무왕의 살보시를 상징하는 등불이다. 이것 역시 타인을 향해 있다. 그리고 문무대왕릉의 불이라고 착각했던 설씨 아들, 연호의 분신자살도 역시 타인을 향한 불이다. 타인의 복을 비는 불은 아니지만 게이의 사랑을 이해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불이고, 죽은 연인을 따라 죽어가는 사랑의 불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불의 이미지에 찬물을 끼얹는 핵 폐기장. 핵 폐기장이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필요한 불을 주고 남은 찌꺼기가 모이는 곳이다.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자 버려지는 찌꺼기가 모이는 곳. 이해타산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상징한다. 돈을 위해 핵 폐기장을 받아들이는 마을 사람들. 소원성취를 위해 문무대왕릉의 불을 (말 그대로) 이용하는 마을 사람들. 이러한 이기심이 문무대왕릉의 불을 연호의 분신자살로 바꾼 것이다. 이제 불은 사람을 살리는 불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불이다. 이것은 ‘사는’ 이야기가 아니라 ‘죽는’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사는’이야기가 ‘죽는’이야기로 변했기 때문에 설씨가 분이를 죽인 걸까? 연호의 커밍아웃을 듣고 쓰러졌던 설씨가 찾아 간 사람은 분이다. 연호는 설씨의 삶의 의지였다. 가문을 이어야만 한다는 삶의 의지가 연호의 커밍아웃으로 무너지듯이 그렇게 쓰러졌던 설씨다. 처음에는 분이를 죽일 마음으로 찾아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설씨는 반편이 열수가 아빠가 된다는 분이의 말을 듣고 분이를 죽인다. 가문이 끊어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던 설씨는 아빠가 되는 열수의 소식에 자신의 불행을 더 비관했는지 모른다.
타인의 행복에 대해 시기와 질투가 심한 사회다. 왜 그럴까? 자신의 복을 빼앗겼다고 생각해서일까? 빼앗고 빼앗기는 사회. 먹을 수 있는 파이는 정해져 있고, 그것을 먼저 빼앗는 사람이 이긴다는 경쟁의 사회. 설씨는 분이가 애지중지하던 한복의 비밀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낸다. 그 편지는 록키의 아버지인 버틀러가 보낸 편지다. 설씨는 분이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일까? 아니면 타인의 삶의 의지를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죽어가는 분이가 복 받으라고 외친다. 그것은 ‘죽어’가는 이야기를 살리는 말이다. 그리고 분이의 죽음에 부응하듯이 문무대왕릉에 불이 내린다. 그 불은 설씨의 아들, 연호가 분신자살하는 불이다. 연호의 불은 자신의 복만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이기심에 죽어가는 불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이기심을 불사르는 불이기도 하다. 문무왕의 살보시를 재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조금 비관적으로 해석하자면 살보시를 강요하는 사회의 재현일 수 있겠다.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해 복을 빌면 그것을 일깨우는 살보시의 불은 다시 피어오를 지도 모른다.
4. 한 폭의 풍속화.
‘감포 사는 분이,덕이,열수’는 한 폭의 풍속화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면 구석에 있는 사람들도 제 각각 다른 행위를 하고 있다. 이 극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하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맺어지는 관계 속에서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연민과 측은 속에 해학이 있는 풍경이다. 이 해학은 대사에서 유발되기도 하지만 풍속화의 인물들처럼 배우의 행위에서 풍기는 웃음이 진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마치 살아있는 그림을 보듯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이야기를 품고 있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연극공연이었다.
작 | 손기호
연출 | 손기호
배우 | 우미화, 장정애, 조주현, 윤상화, 홍성춘 등
일시 : 3. 16(월)~ 5. 17(일) / 화-금 8시, 토 4시 7시30분, 일 4시, 월요일 쉼
장소 : 대학로 선돌극장
티켓 : 일반 20,000원 / 학생 15,000원
예매 : 인터파크 1544-1555
문의 : 선돌극장 02) 747-3226
필자소개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 |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이디푸스 리뷰 : 권력의 이중성 (1) | 2009.05.11 |
---|---|
'불가사리' 컬렉션 No. 1 : '홍대에서 넓은 미술관 광장으로 나오다' (1) | 2009.05.08 |
선물 같은 시간, <F+놀이터프로젝트_'말없는라디오'편> (2) | 2009.04.29 |
이오네스코의 의무적 희생자들 - 이오네스코의 부조리 (0) | 2009.04.29 |
발전의 궤도에 위치한 눈에 띄는 창작의 세 가지 방법 (1) | 2009.04.20 |
연극 <모범생들>, 그러나 완성될 수 없는 '모범생들' (3) | 2009.04.20 |
딩딩하지 않은 동동한 Ding's Project 전시 (0) | 2009.04.20 |
[가상리뷰] <연극- 개와 인간> "휴머니스트와 도그니스트의 만남" (0) | 2009.04.19 |
[리뷰] 자주 만나고 싶은 도둑 - 유홍영 고재경의 「두 도둑 이야기」 (1) | 2009.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