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5월 레터] 생애라는 시간 너머

2024. 5. 13. 02:47Letter

 

 

두 달에 한 번은 레터를 쓰려고 마음 먹었는데 뭘 했다고 5월 중순이 다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만원 조금 넘는 돈을 세 번 썼을 뿐인데 통장에서 5만원이 빠져나간 것처럼 시간이 숭덩숭덩 지나가고 있습니다. 레터는 핑계고, 사실은 돈을 벌어야하는 나이가 그러지 못한 채 지나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 시간을 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독립예술웹진과 어울리지 않게 돈 얘기로 레터를 열어 사과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최근엔 혜화동1번지에서 하는 안전연극제의 두 작품을 보고 왔습니다. 트렁크씨어터프로젝트의 <뻐끔뻐끔>은 초연을 봤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더 작아졌음에도 근사해진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창작집단 여기에있다 작품도 일상공간에 대한 익숙하고 낯선 감각을 일깨워주었어요. 그 사이엔 전주국제영화제에도 다녀왔습니다. 인디언밥 편집위원 답게 한국단편경쟁을 보고 싶었는데 티켓팅이 정말 쉽지 않더군요. 안산국제거리극축제에서도 멋진 작품을 만났고, 더글로우 페스티벌에서 슬램도 하고 좋은 음악에 감동도 받고 왔습니다. 그러고보니 지난 레터 이후에 호주에서 애들레이드 프린지 페스티벌과 브룬스윅 뮤직 페스티벌도 다녀왔네요. 하고 있던 일들에서 의도치않게 하차했지만 팔자 좋게 놀러다니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찾고 공연이나 전시를 보고 글을 쓰는 시간은, 잠을 자고 밥을 해먹고 식기를 닦고 몸과 방과 옷가지를 깨끗이 하는 데에 쓰는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습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었더니 가사에도 더 많은 시간을 써야했습니다. 남는 시간은 그동안 써뒀던 노래를 편곡하는 데에 썼습니다. 돈을 벌지 못하는 지금 이 시간을 알차게 쓰고 싶어서 음악을 열심히 해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믹싱과 마스터링같은 후반 작업에 쓸 돈이 없고, 기약없이 객원보컬을 섭외할 수도 없어서 그대로 멈춰버렸습니다. 강박처럼 일하던 날들 끝에 겨우 쉴 시간을 가졌으면서, 막상 그 시간을 잘 써야한다며 불안해하고,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은 폄하하면서, 통장 잔고를 보며 셈을 하는 모양이 퍽 우습습니다. 

 

호주의 바다. 저 너머에 남극이 있다

 

애들레이드에서 본 작품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이 하나 있었습니다. <An attempt to lose time>(시간을 잃기 위한 시도)라는 작품이었어요. Miranda Prag라는 영국인 창작자의 1인극이었습니다. 어쩐지 무대가 버거워보이기도 했는데...그럼에도 전 아주 좋았어요. 그는 산업사회가 수많은 시간들을 'the' time으로 만들어버렸다고, 자긴 시간을 잃는 시도를 해보겠다고 말하는데, 결국 산업화 이후 이 사회가 우리에게 생산성을 어떻게 강요하고 있는지 그것이 개인과 환경 모두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향하는 작품이었거든요. 공연이 끝나고 숙소로 가는 길, 무서운 어둠과 더 무서운 폰 배터리 방전 앞에서 하늘을 보며 걸었습니다. 밤하늘엔 북반구에선 볼 수 없는 별들이 떠있었습니다. 불쑥 생애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슬픈 노래 대신, 영원같은 시간을 상상하는 사랑 노래를 쓰고 싶어졌어요.

 

독립예술가로 살기로 결심하고, 산업에 복무하거나 기금특정적 예술을 하기보다 프린지나 인디언밥에서 작업하기로 했던 마음이 그런 것이었을까요? 돈을 벌어야하는 나이가 그러지 못한 채 지나가고 있지만,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제 안에 있으니 저는 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서 해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낭만과 버무려져있지만 사실 생애라는 게 별 것 아니라면 당연한 답인 것 같기도 합니다. 내일은 서울퀴어퍼레이드 업무를, 모레는 페미니즘 연극제에 올라갈 작품의 PD일을, 글피엔 곧 발매될 싱글 작업을 할겁니다. 다음 레터는 마치 만원 조금 넘는 돈을 세 번 벌었을 뿐인데 통장에 5만원이 쌓인 것처럼 세상이 5만원어치 쯤 멋있어졌다는 얘기를 써보겠습니다.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위원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