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10. 00:19ㆍReview
스페이스 캔의 '가능'으로서의 공간
가능공간 스페이스 캔은 성북동에 자리하고 있다. 대학로 다음인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리되 약도가 없으면 찾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막상 도착했을 때 눈에 띈 건물이 크고 특이했다. 막연히 성북동 비둘기란 시를 떠올리고, 대학로에서 그럭저럭 걸어갈 만한 지점이란 사실, 그리고 소시민들의 평범한 동네에서 꽤나 큰 저택들이 군데군데 있는 몇 가지 이미지들이 상충되며 머릿속에서는 스페이스 캔의 지정학적 위치를 나름대로 그려 내고 있었다. 오다가 몇몇 사람들에게 미술관의 위치를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고, 얼마 앞둔 위치에서야 누군가에게서 아 그게 미술관인 거 같은데 하는 말을 듣고 찾아갈 수 있었다. 그 사람도 뒤늦게야 스페이스 캔이 미술관일 수 있겠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미술계에서는 미술관이나 갤러리 대신 아무래도 주로 전시를 위주로 하는 공간임에도 대안공간이니 스페이스니 하는 표현들을 통해 자신들의 공간을 새롭게 정의하며 출발하는 흐름이 부쩍 늘어가는 것 같다. 아무래도 단순한 전시 차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매체의 수용과 장르의 만남, 그리고 공간 자체에 대한 실험 등이 그 이름에서부터 대안적인 성격의 단어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그런데 가능공간은 또 뭔가. 참 비현실적인 추상적 단어라는 생각이 들지만, 가능이란 말로 어떤 것도 용납될 수 있는,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하기보다 시도 자체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거나 공간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실험해 나가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보통 공연계 내에서 연극이나 뮤지컬의 상연 장소는 그 공연 자체와는 분리된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 무대는 극장 안에 들어가 상연이 시작되면서, 즉 조명이 밝혀진 다음에서야 그 깊이와 현실을 드러내게 된다. 그냥 통틀어 극장으로 일컬어지고, 장소 자체에 대한 정체성의 고민에서부터 출발해서 공간의 특성에 맞춰 전시 역시 그와 한 궤를 그려 나가는 미술계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여기서 극장은 모호하게도, 상연이 되는 지정학적인 위치와 늘 변화되는 무대 모두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공연들은 주로 무대에 대한 고민은 크지만 그것을 감싸고 있는 장소 자체의 정체성까지 고민하며 가지 않는 경우들이 많을 것 같다. 주로 대관 위주의 대학로에 국한되어 바라본 것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두 계의 차이는 있어 보인다.
장소 특정적(?)인 낭독 공연_"옥상에 사는 물고기들"
지난 7일 오프닝 날에 찾아갔던 캔캔프로젝트 Can! CAN Projcet “Show me your potential”역시 전시와 퍼포먼스, 낭독회, 영화 상연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갖춰진 꽤 흥미를 끄는 전시였다.
오프닝으로 상연된 "옥상에 사는 물고기들"은 낭독이었지만, 단순히 연극의 전초전이나 과정적 단계를 밟아 나가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직접 연주를 하며 참여하고 극의 연출 역할을 맡았던 차지량은 캔캔프로젝트에서도 전시를 함께 했던 작가이기도 했다.
부담 없이 그네들 스스로 즐겁게 임한 연극은 관객에게도 큰 긴장 없이 자연스레 옥상에서 진행됐다. 다닥다닥 붙어 앉아 그들을 마주한 연극은 옥상 자체에서 가상의 공간을 상정하여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좋을까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가능공간에 대한 대안적 제안을 하는 듯했다.
내용은 소박하고 순수했다. 낭독공연이라는 형식은 굳이 대사를 다 외워 육화시켜 발화하는 연극의 체계에 따르지 않으면서 그만큼의 시간을 줄이고, 대본 자체의 가능성을 우선 실험해 보기 위한 의도에서 출발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반쯤은 낭독공연이고, 연극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는데, 우선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인디 영화로 워낭소리를 이어 파란을 일으켰던 영화 "똥파리"의 여주인공 김꽃비가 카페의 종업원으로서 출현하며 전체적으로 내레이션을 하는 화자의 역할로 극을 바라보고 있었고, 필자 뒤에서는 양익준 감독도 공연을 구경하고 있었다.
미디어의 힘이 큰 것인지 독립영화가 어느덧 상품의 가치를 띠고, 그 속에 출연한 배우들은 새삼 스타 같은 친숙하면서도 신기한 느낌이 전해져서 일순간 그런 내 자신에 실소를 던졌다. '다 똑같은 사람인데.' 어쨌건 간에 이런 아담한 공간에서의 소탈한 모습의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긴 하다.
“이런 건 어떨까요? 물고기들이 물살을 타고 하늘로 올라오는 그런 장면을 말이죠.
그러니까 기다랗고 큰 대형 천에다가 그리는 건 어떨까요?
무지개 빛 색깔을 띤 물고기. 건물의 외벽 입구부터 옥상까지 이어질 수 있게 천을 내리듯 걸어두는 거예요.
그럼 마치 물고기들이 옥상으로 올라오는 것처럼 보일 것 같은데.”
- 장편 <조형해상도시>의 일부, 옥상에 사는 물고기들 2007. 1. 차지량
옥상에 사는 물고기들은 그들의 이상향, 유토피아를 지향하고 있었다. 대본을 읽는 김꽃비, 그리고 대본을 보지 않고 연기를 하는 그 외 배우들, 김꽃비라는 책 속의 화자가 지니는 하나의 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와 배고픈 예술가들에게 남은 음식들을 모두 개방하는 퉁명스러운 새로 들어 온 여종업원에 의해 카페는 희망에 찬 모두가 잘 사는, 곧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꿔 나간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순수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지 않은 세계를 뒤집어 보거나 나름 배고픈 예술가들이 자본에 호소 내지 제안하는 대안 경제의 삶일 수 있었다.
종이비행기들을 날려 옥상 너머의 세상으로 눈을 돌렸고, 동시에 생선 구운 것을 돌려가며 조금씩 맛보게도 했다.
마치 판소리의 고수처럼 연주자들은 연기에 추임새를 넣듯 간혹 잘 한다고 하여 끼어들기도 하며 차지량은 극 속의 인물도 아닌 모호한 위치에서 이것이 극임을, 그리고 공연되고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안 그래도 개방된 극을 더욱 열어젖혔다. 실제 갑작스레 연주를 멈추고 무대에 올라 후반에 낭독다운 낭독의 연기를 보여 주기도 했다. 연주 집단과 배우들(사실 구분할 수 없이 모두가 하나의 장을 형성했다.) 사이에서 어쩌면 잡음일 수도 있는 동선을 빚는 데 말이 새어 나오기도 했고, 그네들 간의 동료집단으로서의 공동체 의식들이 드러났다. 즉, 그들만의 어떤 연극을 지향하고 있지만, 그것이 기존의 모습과 같을 필요가 없음에서, 그리고 어쨌건 간에 그것이 그들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들이 좋았다. 오래 이 느슨하거나 끈끈한 모임으로서 낭독 공연을 계속 이어나갈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이 오히려 어설프거나 완성도에 치우치지 않은 이 소박한 작품들을 부담 없이 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물론 앞서 말한 연기를 한다는 느낌, 그리고 대사를 읽는다는 느낌은 조금 더 제했으면 하는 바람을 첨부해서.
김민관 mikwa@naver.com
공연예술 분야 자유기고가, 現다원예술 비평풀(daospace.net)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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