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당신의 의지 섞인 눈빛을 따라..

2009. 4. 10. 08:0007-08' 인디언밥

<북> 당신의 의지 섞인 눈빛을 따라..
  • 김민관
  • 조회수 752 / 2007.10.11

 [리뷰] 당신의 의지 섞인 눈빛을 따라..-김윤정 <북>



이 공연을 소개하는 건 북의 공연자 김윤정을 따라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김윤정을 해석하는 내 자신의 생각을 인식하고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이 작품을 봄에 있어 인식과 사유를 강조하는 이유는 공연이 사유의 주체로서의 관객의 입장을 형성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제 공연이 진행될 것입니다!’

이 공연이 무용 위주의 적어도 무용수가 주가 된 공연이라는 최소한의 것을 안다면 처음부터 무대 위에 뒤돌아 서있는 여성은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약간의 관객의 웅성거림, 시작 전의 열기가 채 가라앉지 않기에 그 궁금증에 대한 시선이 고스란히 그녀를 향하게 되고, 공연의 시작은 그것을 인지하고 감내한 그녀와의 마주침에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녀가 무언가를 보여줄 차례이다. 그렇지만 여자는 우선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시선을 보내는 것에서 출발한다. 단지 불특정 다수가 아닌 객석 한 층씩을 거쳐 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무대 한 쪽으로 비켜선 뒤 무대 뒤를 바라보는 동시에 영상이 투사된다.


허공중에 유영하는 우주선이 보이며 지구 밖을 날아가며, 배열, 분리, 이탈, 그리고 쭉 날아간다. 일종의 정교한 체계의 기계는 유기체로서의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데, 하나의 몸통에서 여러 다른 몸통들이 분리되며 다시 분리된 몸통이 가공할 속도로 날아갈 때, 일종의 프랙털처럼 우주선은 구조 속에 체계를 이루고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한편으로 많은 것들을 담은 지구는 그것을 벗어나며 단지 표면화되어 나타날 뿐이다.

마치 공연 전의 사전 프레젠테이션의 형식을 갖춘 이 영상이 공연 내에 어떠한 연관을 맺을지 두고 볼 일이지만 이제 그 우주선의 양태처럼 ‘따로 또 같이’ 우리는 저마다 이제 그 공연의 ‘세계’를 유영해야 하는 것이다. 장엄한 모험이 될 것까지는 없지만 적어도 새로운 여행의 설렘과 우주의 미아로서의 실존 사이에서 하나의 엔진을 장착하게 된다.


시선두기를 통한 대화의 과정

친절하게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관객의 시선을 보는 그녀는 손을 뻗고 고개를 젓고 다시 아래를 본다. 호흡의 유순한 이어짐과 이완되는 몸에서 마음을 추스르는 일종의 여유로운 동작으로도 보이지만 그녀가 둔 시선은 소멸되지 않고 그녀의 몸을 따라가게 된다. 김윤정은 공연 내내 시선두기의 중요성과 의미를 부각시킨다. 시선이 향하는 곳이 중요하기보다 시선을 두고 있는 행위에 더 주목하게 됨은 그녀의 시선이 끼친 영향이 지속되는 것이라면, 이제 그녀의 움직임을 통해 두드러지는 그녀의 몸은 엉킨 실타래 마냥 풀어야 할 것이 된다. 온전히 그녀에게로 전이된 관객의 시선이 그녀의 몸을 따라 움직이고, 그녀는 그 시선을 빗겨가지 않고 차분히 움직임을 진행한다.

그녀의 시선으로 말미암은 ‘친절하지만 어딘지 친절하지 않은’ 공연은 관객을 혼란과 지루함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든다. 관객을 향하고, 다시 자신의 움직이는 몸에 집중(시선을 두는)하는 그녀의 시선에는 관객이 그녀를 보고 있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고 관객이 또 그런 그녀의 생각을 느끼는 서로의 상호작용적인 얽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몸을 재료 화하며 일종의 이야기들을 꺼내는 화자와의 대화로도 볼 수 있다.


부수적이지 않은 청각의 작용..

또 하나의 친절한 요소는 영상을 본 이후 본격적으로 움직임이 펼쳐질 때부터 끝까지 지속되는 여자의 내레이션에 있다. 동시에 불친절함은 그것이 영어이기 때문이다.

친절하게도 단순하게 느린 동작들로 진행되는 그녀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의미를 파악할 것인지 그것의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느끼고 뭔가 언어 텍스트에서 그 의미를 전해 듣고자 할지는 전적으로 관객의 적극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갈등으로 지속되는 자연적 반응들의 일부이다.

무대의 주체로 서 있는 여자, 그리고 '보임'의 절대적 근거를 두고 있는 공연에서 청각은 이미 녹음된 것으로서 그녀를 대변하는 하나의 목소리이겠지만 생각들의 건조한 나열로 짐작되는 텍스트는 온전히 따라가게 되기보다 간간히 들려오며 보임에 파고든다. 보임은 '들림'에 잠식당하기도 하고, 들림은 그녀의 몸에 몽롱한 의식을 덧대 이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몸에 의해 형성되는, 시선과 시선의 마주침에서 생성되는 막은 청각의 자장 밑에 있기도 한데, 생각보다 단조로운 대사 역시 몸의 언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의식을 만들고, 하나의 구조를 만듦이 인상적이다.

처음 비교적 뚜렷하던 영어들은 중간에 머릿속을 맴돌며 몽롱한 의식을 만들고, 배경음악 또한 없는 공연에서 공연자와 더불어 하나의 주체로서 성립하는 목소리는 몸의 언어에 대한 음악적인 리듬을 선사하기도 한다. 반면 목소리의 약간의 잦아듦이 조명의 아웃과 함께 공연의 마지막을 대리할 때 목소리는 다시 의식으로서의 힘을 가졌음을 체감케 한다.

어느 정도 단어를 알아듣는 사람과 완전히 문장들을 다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그 중간 사이에 영어 듣기 실력의 차이는 여러 경우의 수를 낳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무의식적 작용에 가까운 청각, 뚜렷한 시각 사이에서의 어찌할 수 없는 한편으로 자연스러운 배합과정의 구조를 만들게 되고, 이는 저마다의 사유과정의 문제로 환원된다.


몸에 관한 사유

이제 다시 본론에 해당하는 몸으로 돌아오게 된다. 청각이 그녀의 사유, 녹음된 것으로서의 이미 형성되어 있는 지워지지도 바뀌지도 않을 사유였다면 실질적으로 펼쳐지는 몸의 움직임은 앞서 말한 것처럼 또 다른 사유, 즉 직접적인 소통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처음에 뒤를 돌아 있던 그녀는 여러 차례 무대에 대한 직접적인 눈을 벗어난다. 직전에 시선을 관객에게 뒀고, 움직임을 거둔 뒤, 뒤돌아 윗옷을 걷어 자신의 몸을 전시한다. 그녀의 시선이 의식과 사유를 형성하는 측면이 있다면 이 순간에 이미지화된 몸은 단지 몸 그자체로서 존재하며 지난하게 무대를 가른다. 온 몸의 시선을 저항 없이 받으며 움직임을 지속함에서 우리는 단지 몸이라는 실체를 보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다시 관객과 마주한 그녀의 시선에서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몸의 움직임 역시 공연자와 관객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교통 안에 이뤄지지만 소리와 마찬가지로 즉흥이 아닌 이미 주어진 것을 보는 측면이 크다.


그녀가 보인 등과 뒤 자태는 소통을 맹목적으로 끊는 것이라기보다는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소통이 다시 이어질 것에 대한 기대를 부른다. 한편으로 관객을 향하거나 관객을 거부하며 무대 뒤로 갈 때는 소통과 단절을 이야기해볼 수 있다. 움직임은 시선과 멈춤, 그리고 다른 동작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무용의 테크닉을 보여주기보다 하나의 ‘움직임’을 펼쳐냈다는 것을 솔직히 드러낸다. 모든 것은 전체적인 흐름으로 연결되기보다 그녀의 시선이 개입된 멈춤에서 오는 단절을 통해 각각의 맥락들 안에서 구체화될 뿐이며, 어떤 해석의 지점이나 감정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보는 것의 행위성을 부각시키는 안무가는 또 하나의 소통의 일환으로 관객에게 손을 내민다. 팔을 돌리다 동작의 손을 멈춘 채 있고, 뒤 돌아 가서 무대 벽에 뻗은 손동작 후에 허공을 쥐고 온 손에서 그것을 허공에 다시 놓으며 관객에게 그것을 전하는 움직임을 취한다. 여기에는 무엇이 담겨 있지 않음에도 그것을 뚜렷하게 표명하는 그녀의 의지 섞인 몸짓에서 관객과의 거리를 의도적으로 소멸시키고자 함이 드러난다.


‘Bach, music..’ 등의 단어들이 명확하게 들릴 때 즈음, 그녀는 이번에 지휘하는 동작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 동안의 정적인 움직임과는 달리 조금은 역동적이 되는 동작은 손에서 시작해 보폭을 둠으로써 확대되지만 전체적으로 지휘라는 개념을 가지고서 점층적인 상승작용을 보이고 있다. 일단 소리의 리듬을 구체화시킨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이지만 여전히 눈을 흩뜨려 놓을 만큼의 현란함, 공연자 스스로의 자의적 기호들이 나타나기보다는 연주자들을 안정시키고 이끌어가는 지휘자의 역할처럼 그 속에 질서들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독특한 것은 실상 무대에는 음악이 없다는 것이며 그녀 스스로 음악적 리듬을 만든다는 점이다.


읽힐 수 있는 작품을 향해..

보통의 막의 전환 이후 등장하는 무용수라는 존재는 순식간에 무대를 채우며 시선을 곧 움직임으로 전이시킨다. 그의 등장은 곧 앞으로 환상의 이야기를, 또 다른 세계 층위를 무대 위에 펼쳐놓을 것을 선언적으로 표명하는 것일 게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관객의 시선을 감내한 채, 일상복을 입고, 조명이 그대로 켜진 채로 영상 때의 한 번의 블랙아웃을 제외하고는 끝까지 켜진 조명 속에 입을 다물고 관객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은 그 스펙터클한 세계를 허물어뜨리고 솔직하게 자신을 현시한다.

결국 직접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일단 몸을 몸 자체로, 움직임을 움직임 자체로 보여준 일련의 행위는 가감 없이 관객과 마주하며 관객의 사유를 이끌어낸다. 특별한 무용 테크닉과 서사의 부재, 관객과 공연자 사이의 막이 걷힌 채 우리는 단순히 표현을 보고 즐기는 것의 안락함에만 젖어있을 수는 없다. 보통은 자신만의 시공간의 구조를 갖고 가는 여타 공연과 달리 김윤정은 관객을 직시하며 ‘지금 여기’에 함께 있음을 관객에게 인지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관객을 보는 시선은 관객에게 보여줌에 대한 인식을 스스로 내포한 채 명확한 이미지들을 생성해내는 것이다.


북(book)이 읽히고 해석되는 것이라면 몸의 언어를 통해 명료하지만 실상 그렇지 않은 청각을 통해 전해 진 그래서 모호한 (영어로 된) 언어 텍스트가 하나의 의문으로 남는다. 그것을 배제하거나 우리말로 바꿨을 때 공연은 정말 단순해질 것인가? 오히려 해석의 문제에서 복잡해질 것인가? 과연 청각을 통해 어디까지 정보를 제공하려고 했는지는 김윤정 자신의 의도로 혹은 하나의 실험 차원으로 귀결되는 문제로 남는 것이다.

공연자와 관객의 대화 형식의 공연은 주체적인 관극의 형태를 창출하며 열린 지점의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다. 또한 몸을 텍스트 화하는 그녀의 행위는 추상적인 무용 공연의 소통에 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 고찰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즉각적인 수용자의 인식과는 별개로 특별히 형성되지 않는 내용은 단지 보고 교감하고 인식하는 과정에서의 소통과는 또 다른 이야기다. 일차적으로 관객이 공연자와 분리된 존재가 아닌 주체성을 획득함이 하나의 실험이자 커다란 가치를 지녔다면 그리고 이것이 너무나도 큰 ‘친절함’으로 독창적인 ‘공연’의 눈이라면 다음에는 그녀의 내밀한 사유가 내용의 한 축이 되어 풍부한 해석으로 나아갈 여지를 조금 더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보충설명

* 2007년 9월 28일-30일 디아더 씨어터 : 10회 서울변방연극제 참여작
* 서울변방연극제 www.mtfestival.com
* 사진제공_사진작가 이도희

* 무용수이자 안무가 김윤정은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무용학과에서 공부하고, European new dance develop center in Arnhem, the Netherlands를 졸업하였다. 2001년 danceweb 비엔나 탄즈 페스티발에서 연수/공연을, 2006년 신진예술가 선정작 를 쇳대박물관 스튜디오에서 발표하여 내러티브를 제거한 순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2007년 국제교류 해외 레지던즈로 프랑스 PAF 상주 작업을 진행하였고 웹진 인디언밥에 연재되고 있는 후용공연예술센터의 레지던시 참여 작가 중 1인.

필자소개

필자 김민관은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넘치는 관심으로 예술축제 모니터링 활동 등 장르를 넘나들며 공연 및 예술축제 리뷰를 상당분량 생산해내는 인물. 현재 아츠 객원기자로도 활동 중. 공연에 대해 단순한 취미 생활을 넘어 미학적 접근과 철학적 통찰력, 공공성적인 측면 등 여러 지점에서 시선을 넓히고자 노력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