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논리 너머의 것, "죄악의 시대"展 (3)

2010. 2. 23. 15:16Review

죄악의 시대 (3)

글 ㅣ 개쏭


-비명과 이명

 



죄라는 것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삶이란 깃들 곳 없이 차오르고, 마치 차올라 넘치는 대야의 물처럼, 수도꼭지가 영 잠기질 않고 끊임없이 물을 쏟아내는 것이다. 넘치고 넘치고 넘치고 이제는 대야를 채우려는 것인지 넘치는 바닥을 물로 채우려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런 때가 왔다. 그렇게, 뭘 살아가려는 건지, 뭘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 채 삶은 진행이 된다. 그렇게 진행된 삶이, 그렇게 어디에도 깃들 수 없게, 또다시 아무 곳에도 어우러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삶이 살아지는 그런 순간, 혹은 그렇게 깃들 수 없는 순간, 올라선 의자의 다리가 흔들린다. 몇일 전부터 아슬아슬했던 그 다리 한짝이 지금, 두 발 모두 의자 위에 올라선 지금에야 의자를 고치지 않은 후회가 밀려온다. 아니, 고치기보다는 버리는 게 나았던 것일까, 얼마동안은 더 쓸 수 있겠지 하며 넘기던 그때의 마음이, 의자다리가 휘청거리고 자신의 다리도 휘청거리는 그 짧은 순간, 한번 휘청, 하며 헛숨을 들이킬 그 짧은 찰나에 기억이 나고 후회가 되는 것이다.

아마, 죄의 순간은 이러한 순간일 것이다. 가장 차고 넘칠 때, 흔들리는 무언가 처럼, 가장 차올랐을 때, 그때 한 방울의 물이 더 떨어지는 때처럼, 그 더해진 물방울을 눈치 채지 못하고-혹은 눈치를 챘더라도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한 방울 한 방울을 더해 어느새 그 더해지는 물방울이 굵은 물방울이 되어버릴 때, 물을 담은 자신이라는 통은 그 무게에 못 이겨 휘청, 하는 것이다. 단 한 번의 휘청거림, 이 휘청거림은 이제 도미노가 쓰러지듯 또 다른 휘청거림을 낳는다. 이제는 아무 손도 댈 수 없다. 끊임없이 좀 더 강하게 휘청거리고 다시 휘청거리고 그 휘청거림이 멈춰지는 순간, 쓰러져 구르다가 멈춰지는 순간에야 자신이 휘청거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쓰러지는 순간은 한 순간. 오직 한 순간이다. 그리고, 순간은 자신이 순간에 서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서야 자신이 휘청거렸다는 것을 알 뿐인 것이다. 죄의 순간은 그런 순간이고, 그런 순간이기에 죄는 순간이 지나간 시간 속에서야 이야기될 수 있다. -아니, 실은, 알고 있다. 그 순간에도, 자신이 쓰러진다는 것을, 자신이 휘청거리고 있다는 것을, 다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손을 놓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저 자신이 쓰러져간다는 것을 느낄 뿐이라는 점에서 휘청거리는 순간은 그저 휘청거리는 순간일 뿐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휘청이는 순간에 느끼는 휘청임에 대한 지각은 그저 임종을 맞는 친지 앞에서 올리는 1시간의 기도와도 같은 것이다. 그저,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은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신의 힘과 능력이 닿지 않는 그 죽음의 영역 앞에서, 자신의 것들을 내려놓고 그저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를 마주한 이의 시간이다. 길고 오래고 지루하리만치 천천히 지나가는 시간-그러나 눈을 감았다가 뜨면 단 1분, 숨을 참고 있었던 물속의 1분과도 같은 그런 순간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약탈하는 이도 약탈당하는 이와 마찬가지로, 약탈되는 것을 잃는다. 약탈은 오직 약탈만을 낳고, 약탈이 그러하듯, 범죄는 범죄만을 낳는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펼쳐진 마른 벌판, 그리고 그 위로 불어올 미지의 바람, 몸을 송두리째 떨리게 만드는 바람 뿐.




나는 죄인이다. 죄를 범한 이를 범죄자라 부른다면, 나는 범죄자다.

나는 다른 이의 생명을 약탈했다. 다른 이의 힘을 취하고, 정신을 취하고, 목숨을 취했다. 그것들은 무엇보다 소중할 다른 이의 가슴 깊이 깃들어있는 것들, 동시에 그 가슴 깊이에서 그의 온몸에 깃들어있는 어떤, 소중한 것이다.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없는 그러한 것, 나는 그러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서 취했다. 허락이나 동의도 없이 취했다. 나는 그래서, 약탈자이며 범죄자이다. 말로 풀어내면 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아름답고 모호한 말로서만 풀어내는 나는, 그러한 의미에서 끝까지 치졸한 범죄자이자, 약탈당한 이를 끝까지 약탈하는 악인이다.

그러한 범죄자이기 이전, 나는 나를 위한 나의 신에게-아, 그래. 나는 약탈자이기 이전에서부터 신조차도 나를 위한 신으로 여겼다. 숭고와 희생의 가면을 쓴 체-내가 잘 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지극히 나를 위한 기도이자 자신의 무지를 신의 전능으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거짓이자 오만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자기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그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그러한 기도였다.
그러나 범죄자인 이후, 나는 신에게, 이제는 누구의 신일지 누구를 위할 신일지도 모른 체,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신이시여, 내가 빼앗는 다른 이들의 숨만큼, 나를 용서하지 마옵소서.
신이시여,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의 죄를 죄로서 여기시고, 나를 용서하지 마옵소서.

 

지독한 범죄자들은 자신의 죄를 알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의 죄를 신 앞에서 숨기려하지 않는다. 어떤 회개와 소생의 번제도 바치지 않는 것이다. 범죄자는 자신이 지켜야할 자신이라는 상을 잃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을 위해 거짓말하지 않는다. 자신이라는 통에 무언가가 넘쳐흘러 쓰러지도록, 포기하지 않은 무언가, 자신의 이기, 그 이기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자신의 이기를 흐트러뜨리는 어떠한 것도 -법도 윤리도 질서도-그 자신의 이기에 손상이 가지 않는 한 따르지 않는 것이다. 이제 그의 범죄자로서의 삶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분명해진다. 지독하게 살아가는 것. 범죄자로서 살아가는 것. 선악과를 먹은 최초의 인류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바라본 것처럼, 범죄는 자신의 본 모습을 알게 해주고, 그 대가로 평안의 삶을 영원히 앗아간다.

그리고 이제 범죄자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아담은 하와 앞에서도 최소한의 옷을 입어야한다.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그 거짓말은, 자신의 이기를 손상 받지 않기 위한 무도회의 가면이다. 그 거짓을 다른 이들이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다. 하나의 가면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로서 자신의 벗은 몸을 가릴 수 있기에.

그리하여 범죄자에게 남는 것은 수만장의 가면과, 그 가면 속 탁한 공기 안에서 부패되어가는 자신의 상처뿐이다. 이제 상처 입은 하나의 종족이 탄생한다. 이 종족은 오직 한명의 인간으로 구성되어 세상에 잠시 발을 디뎠다가, 그 한명의 질긴 숨이 끊어질 때까지 지속한다. 벌거벗겨 질 때마다 자신의 피부를 손톱으로 긁어 뜯어 피로 얼룩을 내어 벌거벗은 자신을 가리는 종족이 탄생한다. 이 종족을 만날 때는 그의 가면이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방패라는 것을 알라. 그의 가면이 상처를 감싼 붕대라는 것을 알라. 수만장으로 겹쳐 감싸진, 뜯어도 뜯어도 가면만 나올 뿐인 경극 배우 같은 이 종족이, 그리도 필사적으로 가면을 내세우는 모습에 안심하라. 그러한 모습이 결과적으로 당신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것에 안심하라. 가면 무더기가 감겨있는 목덜미를 잡아당겨 그 종족의 맨 몸을 보려는 순간, 당신의 심장에는 타인의 손톱이, 가면을 벗어던진 그 종족의 예의바르게 다듬은 손톱이, 박혀 들어가는 것을 볼 것이다.



숨을 가다듬는다. 우유를 듬뿍 넣은 뜨거운 커피를 타고, 그 컵의 온기에 식어버린 손가락을 덥혀본다. 컵 주둥이 위로 올라오는 수증기에 코를 담가 봐도 좋다. 설혹 인스턴트커피의 비린내가 코털을 자극할 지라도 100°c가 넘는 온기는 조여진 심장을 조금이나마 느슨하게 풀어줄 것이다.

그렇게 숨을 고르고, 다시 전시 ‘죄악의 시대’에 눈을 돌려본다. 온갖 범죄자들의 비명이 울리고 있는 그 전시에 조용히, 하지만 확실히 눈동자를 마주하고 바라본다. 전시자들은 전시물을 통해서 이 비명이 전달되기를 바랬고, ‘그들’의 비명이 전달되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비명은 자신 스스로에게 전달이 되었을 것이다. 그 비명은 말할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있고, 그들을 목 조르는 것 또한 그들의 비명의 이유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범죄의 목소리라는 것까지, 아마도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 전달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바라고 한 전달이었을까.
‘그 믿음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들의 적들에게 던졌던 이 질문을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던져본다.
비명을 전달해서 어쩌겠다는 것일까. 혀가 잘린 설운 사람들의 비명을 되찾아서 무엇하겠다는 것인가. 그 비명이라는 것은 상처와 고통일 수밖에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비명을 외치겠다는 것은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그 목소리를 들으라는 것을
들린 그 목소리는 통한다는 것을
그 목소리는 통한다는 것을
비명은 꽉 막힌 귀를 뚫고도 들린다는 것을
심장을 가리운 수십장의 판넬을 통하여 들린다는 것을
마치 저 멀리 지나가는 기차의 울림에 부르르 떠는 쇠기둥의 공명과도 같이
전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대게 보이지 않는 이 눈금들 사이에서의 은근한 강요들에 몰리곤 하는데,
그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젖을 그어버리고 소리없는 붕어의 입이 되어버린 자들이 있다.
어떠한 소리를 내어도 그것이 하나의 시늉으로 전락하고 만 설운 사람들처럼 말이다.

사적비극의 서’는 이러한 시늉의 부끄러움과 고달픔에서 출발한다. 단지 그것이 어느 작은 개인의 지나친 윤리로 비쳐져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스스로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자들, 소리없는 자신의 비명을 들어야만 했던 자들에게서 새어나온 탁탁한 호흡이어야 한다. 다만 나는, 행여 나의 입에서 이들을 사회의 피해자라 분류하는 방정맞은 언사로 그들의 공기를 더럽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또, 이들을 보편적 아이러니로 회유하는 무뢰인의 입과도 닮지 않기를 간절히 또 바란다. 차라리 나 역시 붕어의 입으로 전락하기를.

(사적비극의 서 中)


아직, 무엇이 만들어질지는 모른다. 그 비명이, 그 외침이, 공명이 되어 전해진들, 무엇이 나타날지는 모른다.
아직은 모른다. 이때를 예비하여 썼던 것일까. 그리 오래진 않은 어느날, 이 알 수 없음에 대해서 쓴 낙서를 통해 이 길고 지리한 글을 끝맺는다. 나의 글, 나의 비명이 탁탁한 호흡이었기를.


어머니, 나에게 어머니라 부를 분이 있다면, 어머니,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도 쉬는 숨을 어제도 내일도 쉴 것이라는 것은,
내가 쉬는 것이 아니라 물결치는 공기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폐가 꿈트린단 것은, 그런 것은,
힘들다는 말로만 다하기에는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머니, 내게 나의 고통을, 나의 추하고 비릿한
속의 속의 모습까지 거리낌없이
말해도 되는, 모두 알고 있을 존재가 당신,
어머니라면, 그런 어머니가 나에게
있다면, 당신, 어머니에게 말해보고 싶습니다.
아무런 문법으로도 구성될 수 없는
뒤틀리는 목구멍의 ‘소리’를, 말이 아닌
그저 소리를, 뱉고 싶습니다.
아니, 뱉는 것도 아니고, 내가 뱉으려 뱉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스며나올 겁니다. 아무리 두손으로 입을 막고 코도 막아 아무 소리도
세나가지 않게 막아본다해도
내 목청 주변의 땀구멍들에서, 솜털이 삐져나오고 남은 자리,
땀과 기름이 삐져나오고 남은 자리에서 그 소리들은 세어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뱉는다기보다는
그 삐져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당신의 귀와, 그 귀에 뜨거운 피를 뿜어온 당신의 심장에게,
과거를 담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을 담는 순간으로서의 소리에 반응하여
자신도 소리를 내는 오전의 새 혹은
전철의 진동에 저 멀리에서도 부르르 공명하는 쇠기둥처럼,
나의 소리에 당신의 소리를 더하기를 바래봅니다.
그 소리가 나를 무엇으로 이끌지는
아직은 오지 않을 시간의,
아직은 오지 않는 지금의 나를 죽이고 새 왕좌에 오를 미래의 나
혹은 그 소리와 당신과 나와 그리고 또 다르게 울릴 나의 소리의 것으로 남겨두고,
지금은 그저 당신의 미세한 울림을 담기위해 발바닥 아래 당신과 내가
밟고 있는 판자에 가만히 손가락을 대어봅니다.



<죄악의시대>

장소 대안공간루프
일시 2010.1 15 - 2010.1.31

오늘날 매체는 저옛날 무당처럼 제의를 주재한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현대는 초자연의 신비가 제거된 시대라는 것. 그렇기에 제의가 연출되는 무대는 일그러진 난쟁이 꼬마들이 아웅다웅 할 수밖에. 신비는 고사하고, 희극이 연출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 같은 제의는 결국 오락에 가깝다. 매체는 각본도 쓰고 연출도 하며, 입맛에 맞게 범죄를 요리한다. 당연하게도 개별적 범죄를 일으켰던 사회적 인과관계는 희석되고, 일회적 볼거리만 양산된다. 여기에 권력의 입김이 들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 오락과 도덕은 그렇게 통일된다. ■ 김상우

8명의 작가와 8명의 연구자가 참여하여,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범죄에 대한 생각과 성찰을 작품과 에세이 등으로 풀어내었다. 이 전시는 범죄와  관련한 내용을 소개하고,  국가와 시대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 요즘의 세태를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