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10. 10:56ㆍReview
< 조선·연정·스캔들 호야 >
‘연극’을 보여드립니다.
1) ‘호야’는 연극이다.
극장 무대 위에 사각형의 작은 무대가 있다. 이 작은 무대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배우들은 연기를 한다. 연기를 하지 않는 배우들은 작은 무대 바깥에 앉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린다. 앉아 있는 동안에는 부엉이 우는 소리, 새벽닭이 우는 소리,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 바람이 부는 소리 등을 내면서 음향 효과에 일조를 한다. 앉아 있는 배우들의 뒤에는 악사들이 있다. 악사들은 배경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고, 천둥소리를 내는 기구를 흔들기도 하고, 궁녀가 되어 왕의 칼에 죽기도 한다.
‘호야’는 연기를 하는 배우와 연기를 하지 않는 배우를 함께 보여준다. 큰 무대 안에 가상의 작은 무대를 설정하고, 그 작은 무대를 중심으로 등장과 퇴장을 보여준다. 퇴장한 배우 뒤로 악사들도 보여준다. 심지어 무대 밖에 있는 해설자도 보여준다. 해설자가 해설을 하고 배우들은 지문을 대사와 함께 들려준다. 지문까지 읽어 주는 배우들 앞에서 누가 감히 “ ‘호야’는 연극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 ‘호야’는 연극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요소들을 숨김없이 보여 주었다. 이 점이 하 이상하다. 연극의 요소들을 무대 위에 고스란히 보여주니까 예사 연극이 아니라 색다른 연극이 되었다. 색다르고 이상한 연극. 그리고 희극적이다.
등장인물 9명중에 세 명이 죽고, 심지어 악사들도 죽는 비극이 왜 희극적일까?
첫째. 사람이 죽고, 고문을 당하는 장면에서 배우는 지문을 읽는다. 그리고 이 지문을 읽는 행위 때문에 긴장된 순간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둘째. 방금 전에 눈물을 흘리며 연기를 한 배우가 퇴장을 하면서 눈물을 닦고 다음 연기를 위해 준비를 하는 장면이 여과 없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배우는 눈물이 연기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관객의 몰입을 가볍게 해준다.
셋째. 가상의 작은 무대 주위에 있는 연기하지 않는 배우들의 연기 아닌 연기와 연주하지 않는 악사들의 존재는 ‘호야’가 연극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일깨워준다. 너무나 연극적이라 연극적이지 않는 이 낯선 경험이 긴장감보다도 더 강하다.
넷째. 연극 중간 중간에 암전대신에 배우들이 모두 작은 무대로 나와 ‘달리기’를 하는데, 이 달리기의 이미지가 연극을 가볍게 해 준다. ‘달리기’는 얼핏 보면 그 속도감 때문에 긴장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분명 걷는 것과는 다르게 ‘달리기’는 공중에 떠 있다. 그리고 ‘달리기’는 무엇인가를 안고 가는 것이 아니라 떨쳐버리는 이미지가 강하다. 죽도록 달린 후에 느끼는 그 가벼움과 가쁜 숨은 무거운 현실로부터 조금은 가볍게 떠 있을 수 있는 순간이고 살아있음을 새롭게 인식하는 순간이다.
다섯째. 악사가 죽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장면이 가장 희극적이라고 생각한다. 왜 악사가 죽어야 했는지? 왜 그 순간 악사는 궁녀가 되어야 했는지 이것은 수수께끼가 아니라 미스터리다.
‘호야’는 분명히 ‘연극’이다. 너무나 연극적이라서 낯설고 독특한 연극이 되었다.
2) ‘호야’는 사랑이다.
사랑을 표현하는 말들 중에 눈먼 사랑이라고 있다. ‘호야’는 이 눈먼 사랑으로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고, 광기에 찬 공포를 연출하기도 한다.
왕은 살해를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의심한다. 이 의심 많고 두려움 많은 왕은 사랑을 하고 싶어도 사랑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왕은 사랑받고 싶어 한다.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의심 많은 왕은 사랑도 의심하기 때문이다. 내시 상선은 왕에 대해 진심어린 충정과 애정을 갖고 있다. 그래서 왕의 잘못된 길을 갈 때는 죽음을 각오 하고 간언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눈먼 사랑’이 아니다. 왕은 상선을 아버지라 여기지만 상선은 왕을 왕으로 여긴다. ‘호야’의 인물들은 모두 왕을 왕으로 여긴다. 어머니인 대비 역시 왕을 아들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 바라본다. 귀인 어씨만이 사랑을 하지도 받지도 못하는 왕을 가엽게 여기지만 이것 역시 ‘눈먼 사랑’은 아니다. 왕이 바라는 것은 왕이 지닌 권력을 보지 않는 ‘눈먼 사랑’이다. 금수들도 나누는 그런 사랑을 가장 바랐던 인물은 왕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자겸과 귀인 어씨의 사랑은 두말할 필요 없이 ‘눈먼 사랑’임에 틀림없다. 운명을 거역한 사랑이지만 두 사람의 사랑 역시 운명이다. 운명이 운명을 거역하고 있다. 운명은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어쩌면 두 사람은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순간에도 한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눈물을 흘리는 순간 그들은 또 다른 운명을 거역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거역하는 것. 죽음이라는 운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다. ‘눈먼 사랑’의 아름다움은 운명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똑바로 보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중전은 왕처럼 ‘눈먼 사랑’을 원하는 여자다. 욕심 없는 ‘눈먼 사랑’을 원하지만 이미 운명에 의해 왕의 여자가 되었다. 귀인 어씨도 왕의 여자가 되었지만 귀인 어씨가 운명을 거스른 반면 중전은 운명에 순종한다. 중전이라는 위치가 귀인 어씨가 가진 위치 보다 더 무거웠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진 위치로 인해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하는 중전은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인해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왕과 짝을 이루고 있다. 중전의 곁에서 어머니처럼 보살피는 박상궁과 왕의 곁에서 아버지처럼 걱정해주는 상선을 함께 본다면 이 둘의 모습은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해진다. 어쩌면 궁녀 박 상궁과 내시 상선의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는 중전과 왕의 관계를 은유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네 명이 짝을 이루고 있듯이 한자겸과 귀인 어씨와 대립 항을 이루고 있는 것이 부제학과 대비다. 부제학과 대비는 서로의 이익으로 뭉친 관계다. 그 이익은 왕이 지닌 권력을 나눠 갖는 것이다. 이 둘의 음모는 일종의 역모이고, 역모를 한다는 점에서 이 둘의 관계는 천명을 거스르는 관계다. 사랑이 운명을 거스르듯이 욕망도 운명을 거스른다. 이 둘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을까? 사랑과 욕망. 사랑에 눈멀 듯이, 욕망에도 눈멀 수 있다. 작가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호야’를 보면서 나는 사랑과 욕망의 구별이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사랑’이 아니라 ‘눈먼 사랑’이라고 지칭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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