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하_는_전_시(Ha-neun Exhibition)』, 갤러리라는 것에 들어서 던지는 물음들

2010. 10. 8. 16:56Review



『하_는_전_시(Ha-neun Exhibition)』, 갤러리라는 것에 들어서 던지는 물음들

 

안국역 갤러리 175에서... ‘하는’ 것에 대한 의문

 

글_김민관




‘하는 전시’는 곧 벌어지고 있음으로서 내지는 수행함으로서의 신체의 출현 내지 기투(企投)로, 기존의 액자 내지 오브제나 설치 구조물의 정적인 물질 환경에 의거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빈 공간에 놓인 신체의 작동과 배치‧수행은 공간과 결부되어 공간의 의미를 생성한다.

역설적으로 공간은 신체를 묶어두고, 이 빈 공간이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하는 당위를 부여하고, 움직임을 통해 하나의 전시되는 대상으로 변모하여 공간의 불투명성을 감추며 제한하는 은밀한 억압 기제로 작용한다.


신체는 오브제와 주체의 어느 중간에 있고, 관객 역시 갤러리로서의 이곳 정체성을 안고, 갤러리라는 이곳의 현재성을 입고, 관객으로서의 시선과 위치를 쉽게 지우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 전시는 성공할 수 있을까? ‘한(did) 전시’가 아니라 ‘하는(doing) 전시’로서 새로움을 일깨울 수 있을까? 시간예술의 궤적을 입고 신체적 현상이 부각되는 퍼포먼스로서 영민함을 부여하는 장점이 고스란히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일상에서 갤러리로 : 통과 의례


 


최은진_틈下





먼저 전시장을 돌아 빌딩 아래 보통 쓰이지 않는 입구를 통함으로써 일상에서 갤러리로의 통과 의례를 거친다. 관객과 함께 공모하며 이를 명시하는 ‘장현준’[「미녀는 이슬만 먹지 않는다」]은 의도적 전략으로 이 지점을 가져온다. 먼저 전시장 바깥에서 멀리서 봉투를 뒤집어 쓴 ‘최은진’의 모습[「틈(下)」]이 지나가는 시민과 이질적으로 상충한다. 어떠한 발화도 꺼내놓지 않는 초라한 자아는 권위를 상실한 슬픈 괴물의 초상이다.


사실 역할은 분배되고 변신을 거친다. 모든 것은 연극적 상황에 다름 아니며 갤러리 체험이라는 특정한 현실 상황에 들어가서 그것을 이해하고 반추하는 과정을 거쳐 간다. 곧 그가 배우고 무용수다.







 









 

무대가 현현되는 방식, 틈으로서의 전시장

 

서영란_ 곡(哭 울다,노래하다) 오페라




‘서영란’[「곡(哭 울다,노래하다) 오페라」]은 사다리를 하나 놓고 공간을 획정지음과 동시에 음악에 입을 맞추거나 그와 동반하는 몸짓으로 노래 바깥에서부터 몰입하여 노래를 지정하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그 음악을 타고 흘러나오게도 했다.

유희적 방식의 놀이는 폐쇄된 공간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하나의 선택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관객의 시선은 결코 차단하기 힘든 적당하지 않은 편하지 않은 거리 안에 놓이기에 오히려 자신 안에 침잠하는 방식은 어쩔 수 없는 출구 전략으로, 제 4의 벽을 형성하는 데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장현준_작가 구모씨의 미술 생활



네 번째 작품 역시 장현준[「작가 구모씨의 미술 생활」]의 용변을 보는 자세로 두 튼실한 허벅지 근육을 내세우며 앉아 앞을 보며, 곧 작품이 앞에 있음을 상정하며 제 4의 벽은 너무 쉽게 산출된다. 이는 얼마나 쉽게 전시가 신체로써 발현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대신 얼마나 쉽게 시선과 몸짓으로 환영이 산출되는가를 가리킨다.

 

이곳은 무대인 것이다. 그럼에도 무대가 공간이자 이 갤러리의 부분들임을 인지하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게 획득된다. 곧 무형의 공간에서 신체의 궤적이 만드는 데 따라 붙는 벽과 벽에의 직접적인 의존, 공간의 산출에 따른 즉흥의 창작 방식은 곧 이 빈 공간을 인지시키며 인위적으로 이 폐쇄성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것에서 직접적으로 연기가 산출됨은 극 속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는 아마도 극 바깥에서 의도된 것이고, 극 바깥에서 해독되는 것이기에 뭔가 낯선 인식을 선사한다.

 



 

 

 

 


언캐니한 공간 속에서...

 


방법 1 : 치고 빠지는 방식

 

극과 극 사이에는 전시장 기둥 벽에 다음 공연의 제목과 러닝타임을 써놓은 종이를 붙임으로써 순서를 지정해둔다. 곧 시간에 따른 퍼포먼스는 일종의 무형의 것을 창출해내는 방식으로 갤러리 동선을 치환한다. 작품은 철저히 형체 없이 예고된 바이고, 인터렉티브적 자율적 동선 대신 놓아둔 놓인 방식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곧 정돈되지 않은 듯 자유로운 작품들은 정돈되어 눈앞에 펼쳐진다.













 



최은진_틈上




최은진은 최대한 무형의 움직임과 정체를 산출코자 한다. 그녀는 공간에 입혀지거나 극과 극 사이의 순간적인 출현으로 형체를 지우고자 한다. 어둠 속에서 벽에 붙어 쪼그려 옹알거리고 갈등하는 듯 보이는 앙증맞게 펼치는 동작들[「벽과 기둥의 방」], 갤러리 사무실 카운터 공간에서 누워 벽과 일체화되어 그것에 의식을 이전하며 펼치다 갤러리 바깥으로 불현듯 나가버리는 모습[「틈(上)」], 처음 출현에서 자신을 지정하지 않는 오히려 천연덕스러운 모습의 연출[「틈(下)」]은 해프닝적 요소를 찰나적 인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한 방편으로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방법 2 : 자신을 비우는 ‘작두 타기’적 발화


서영란[「사이비 메들리(似而非 medley)」]의 문화적 기억들의 발화, 거의 몸의 흔듦과 익숙한 노래의 기표들을 아우르며 무의지적이거나 수행적으로 빠져나오는 기억들의 흔적으로 혼란의 장을 만든다. 그녀의 기억 속에 표상되는 것들(이미지, 심상 등), 의도 차원에서 그에 관한 문화적인 근간의 계보를 좇아가며 표현의 차원에서 중층적 층위를 이루는 몸의 한 단면을 펼쳐 보이는 것, 이는 일종의 무의식적 지층을 따라가는 한국 사회의 인류학적 보고쯤 되겠지만, 낯선 친숙함의 언캐니로 귀환되며 복잡한 경계들의 접합의 미궁에 빠뜨리게 한다. 되돌아가자면 그녀는 앞선 「곡(哭 울다,노래하다) 오페라」에서도 자신에의 침잠이 일종의 일상의 한 지점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방식으로서 드러내고 있었고, 따라서 무대와 일상을 혼재시키며(언캐니한 모습으로) 자신을 포함한 이전의 무대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방법 3 : 관객을 인도하기

 

장현준은 실제로 프로젝트적 전시를 처음 구상한 것과 동시에, 도슨트 역할로 처음 관객을 인도하는 것(사실상 앞서 말했듯 이는 작품으로 구성되었다)에서부터 시작해 동선을 안내하고, 인도하는 역할이 공연 전반을 꿰고 있다. 이는 두드러지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하나의 은밀한 권력으로 작동한다.


또한 이 셋의 공연자는 이 텅 빈 공간에서도 자신들의 공간을 수여하고, 이 안에서 중간 중간 은밀히 거주한다.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은밀히 드러낸다. 곧 이들은 이 프로젝트의 시현 기간 동안 이 안을 임시적으로 점령한 주인으로서 상정된다. 곧 미술관 내 지킴이(카프카의 『심판』에 은유적으로 등장하는 문지기와 상응, 권력을 위임 받아 곧 경계 안에서 그 권력 자체가 되는 것)는 관객 자신이 시선과 행위의 제약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게 만드는 초자아적 실체의 존재로 자리하는 것, 장현준의 역할은 의도치 않게 그러한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유지되는 방식을 은밀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드러나지 않는 스태프적 진행자로서의 행위에 무엇보다 그의 행동이 기반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장현준_전시 놀이

 

그의 「전시 놀이」라는 작품 역시 그러한 관객이라는 대상과의 대면을 염두에 두는 맥락에서 조금 더 직접적인 인터렉티브적 소통으로 이루어진 작품의 완성으로 나아간다.


곧 앞 사람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으로 규칙을 상정하고, 이를 말이 아닌 표지판으로 보여주고, 장현준은 관객의 동작을 따라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관객 앞에 위치해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고(곧 표지판은 수행적 발화이자 그것의 연속적 궤를 만든다), 전시장의 너른 공간으로 유도하며 이어 자신이 관객 뒤에 서서 관객에게 우선적인 행동의 판단의 몫을 넘긴다.


곧 참여하는 자로서 관객은 관객으로 머물지 못하고, 곧 대상으로의 관찰이라는 거리두기를 작동시키지 못한다. 물론 이 광경을 바라보는 관객으로서는 둘의 조응이 하나의 대상으로 분리되지만, 둘의 이동 범위가 여러 변수를 띠고 있기에 참여를 눈앞에 두거나 긴장이 어느 정도 형성되는 부분이 있다.







 



갤러리(미술관)가 체현하는 관객

 

그렇다면 거리두기라는 관객의 시선이 기존 갤러리에서 관객의 입장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소라 치부할 수 있는가? 작품이 아닌 작품들의 배치, 전시장의 구조에 맞춰 관객의 의식은 작품이 아닌 작품들의 계열체를 보며 일단의 배치들의 흐름이 만드는 스토리에 의해 구축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을 자연 던져볼 수 있다.


그렇다면 투명함으로 포장된 기실 불투명한 갤러리(폐쇄된 백색 공간)로서의 공간성은 얼마나 많은 부분들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갤러리 일상’의 시공간을 구현하고 있는 것일까?


이 전시는 퍼포먼스 이전의 무대를 고민하게 하는 측면과 함께 관람객의 의식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는 기제로서의 갤러리를 들여다보는 경계들의 중층적 층위에서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하는전시

2010 0818-0829
갤러리175

장현준 최은진 서영란

Talk to Her_갤러리에게 말 걸기 ● 우리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장소'에서 시작된다.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갤러리175는 작고 큰 미술 공간들이 밀집한 인사동과 사간동을 잇는 중간 지점에 자리한다. 젊은 작가들의 신선하고 실험적인 예술적 시도들을 지원하는 이곳은 100여 개가 넘는 상업 갤러리와 전시 갤러리들의 무리에서 떨어져 마치 하나의 섬처럼 존재하며, 그 나름의 독자적인 목소리와 색깔을 갖는다. 갤러리는 '전시'라는 예술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작가와 관객들을 작품을 통해 만나게 해 주는 가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현대 미술의 중심에 서 있어 왔다. 그러나 '갤러리'라는 명찰을 떼어 놓았을 때, 즉 '전시'와 '미술 유통' 등의 기능을 벗어난 독립 된 공간으로서 그것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까. 한 공간의 장소성은 그 공간을 '누가', '어떻게', '어떤 의미'로 규정하고 유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갤러리가 원하는, 이 공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우리는 이곳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번 전시에서 갤러리는 단순히 예술 작품들이 놓여 질 흰 벽과 기둥, 바닥을 제공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갤러리 자체가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이며, 화두로 작용한다. 그리고 작가들은 더 나아가 '갤러리'라는 형식으로 규정되어지기 이전에 하나의 순수한 공간으로서 마주하게 된다. 즉, 현대 미술의 맥락 안에서 읽혀지는 갤러리175만이 아닌 일상의 장소로 들여다보고, 공간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려 한다. 모든 장소는 그 나름의 고유성을 갖는다. 갤러리 현판을 내리고, 흰색으로 치장 된 가벽을 벗겨내고 난 후에 그곳에 결국 남겨지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갤러리에게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 | 김민관
mikwa@naver.com
공연예술 프리랜서 기자 및 자유기고가
문화예술 분야에 전반적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현장을 쫓아다니며 기록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