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8. 18:13ㆍReview
남편에게 버려지고
아들에게 버려지고
신에게 버려지고
사회에서 버려지고
저자에게조차 버려진 여자
극단 실험극장 <이오카스테>
글_ 개쏭
오이디푸스를 기억하는가.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맺어진 아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눈을 뽑고 왕좌를 버리고 방황하는 남자. 소포클래스의 책을 펼쳐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오이디푸스는 친숙한 이름이다. 프로이드를 통해, 각종 인문학 서적을 통해 그의 이름은 쉽게 들려온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를 기억하는 당신, 혹시 그의 어머니의(아니, 아내라고 해야할까) 이름을 기억하시는가. 그녀의 이름은 이오카스테이다. 이 글에서 계속 나올 이름이니까 이쯤해서 오이디푸스의 엄마라든가 마누라라든가 뭐 그런 식으로 기억해두자.
실은 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이름을 통해서 벌어지는 별 사건이 없으니까. 그녀는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중요한 소재이지만, 오이디푸스처럼 고민하고 방황하는 생생한 인물로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결혼해서 살다보니 엄마였다, 라는 이야기에서 오이디푸스의 괴로움은 그 스스로 눈을 뽑고 늙어서까지 거지로 방황을 하는 식으로 구체성을 갖고 다뤄지지만, 이오카스테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것이다. 그녀는 원작 속에서 단순하게 다뤄진다. 그녀가 표현한 유일한 적극적인 반응은 두 번째 남편이자 그녀의 아들이 진실을 알아내자 자살하는 것뿐이다. 이오카스테가 죽었습니다. 자살하셨습니다. 부인께서는 남편에게서 남편을, 자식에게서 자식을 낳게 한 이중의 결혼을 슬퍼하셨습니다. 허나 그 다음에 부인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나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원작 속의 이오카스테의 행동에 대한 언급이다. 물론 많은 대사와 행동들이 있긴 하다. 그 반응들이 좋은 아내로서의 반응일 뿐이지만. 수동적이고, 남편을 위해 헌신하며, 그렇기에 진실을 앎에도 최대한 거부하려고 한다. 아니, 최소한 남편이 모르게 하려고 한다. 좋은 아내이기 때문에. 그래서 원작 속에서 그녀의 슬픔은 외면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의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오이디푸스를 위한 코러스같은 존재로서 드러난다. 원작 속 그녀는 진실을 알고자하는 오이디푸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오 불행하신 분 오이디푸스여, 그대가 누구신지 결코 알게 되지 않기를!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영웅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에서 유일한 주인공은 그이다. 그러나 그의 *도덕적 승리(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스스로 눈을 뽑아 처벌함으로써 도덕의 편에 선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링크를 통해 따로 다뤄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 글은 오이디푸스를 위한 글이 아니라 이오카스테를 위한 글이기 때문이다.) 곁에 보이지 않은 비극을 맞게 된 이들은 가려버린다. 연극 이오카스테는 이 비극의 암전 속에 가려 보이지 않는 여인, 이 비극적 사건의 또 한명의 중심인물, 이오카스테를 주인공으로 내새운다. 오이디푸스의 아내이자 어머니이며, 자신의 자식의 자식을 낳아준 어머니. 어떤 악행도 스스로 저지르지 않았으나 상황과 우연에 의해 사회적 도덕 속 악인이 되어버린 여인. 연극은 그녀가 겪었을 상황마다의 감정선을 유려한 신화적 언어를 통해 풀어낸다. 연극 ‘이오카스테’의 그녀는 허무히 종말을 맞이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얽매고 목을 매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갈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저주받은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신, 오이디푸스의 어머니나 아내가 아닌 그냥 이오카스테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연극 속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신들이여, 이제 이 가련한 피조물의 분노를 보라! 나는 그 무력함으로서 분노하노라! 운명의 이름으로 인간을 희롱하라! 그러나 나는 너희의 정의도 운명도 권세도 부정한다! 더는 너희에게 호소하지 않을 것이다! 자비도, 파멸도!
극 중 그녀가 생동하기 위해서는 원작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몇가지 요소를 부각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그중 첫 번째가 그녀의 전남편이자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인 라이오스이다. 원래는 희곡 중 한번도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주변 사람들의 회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그이지만 ‘이오카스테’안에서는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의 등장은 그의 갓난쟁이 아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를 취할 것이라는 신탁과 함께한다. 라이오스는 이 저주스러운 신탁 앞에서 아들을 마주보기 괴로워하고, 아들이 자신을 죽일 운명을 두려워하고, 아들이 아내를 취할 것에 증오한다. 결국 그가 택한 삶의 방향은 왕으로서의 관대함도, 아버지로서의 자비도 아닌, 한명의 남자로서의 질투와 두려움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신탁을 거부하고 아들을 죽이기로 작정한다. 내가 신들의 뜻에 따른다고? 천만에, 나는 그들에게 저항하여 싸울거요. 내 방식대로. 신들이 내 자식에게 저주를 내렸다면, 생명을 준 아비의 손으로 그 저주를 거둘 것이오. 이러한 라이오스의 행동에 이오카스테는 어머니로서 아들을 지키고자 하나, 결국 그녀는 어머니이기보다 아내이기를 택한다. 훗날 두 번째 남편이 되는 오이디푸스에게도 그러하듯, 그녀는 언제나 어머니이기보다는 아내였으며, 아내이기보다 지금 손안의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명의 여자였다. 라이오스를 통해 드러나는 복합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고민하는 이오카스테, 이것이 이 연극이 새로워지기 위한 첫 번째 요소이다.
두 번째 요소는 예언자 테레시아스이다. 원작에서는 그저 신탁의 해석만을 밝히고 사라지지만 극중에서는 이오카스테가 새로운 결말을 맞는 원인이 된다. 그의 신탁의 해석이라는 행위는 세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당연하겠지만 예언자로서의 의미이다. 그러나 단순히 해석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진실을 보여주고 증거와 증인이 동시에 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대 자신이 그대의 재앙이오. 내가 진실을 보여주겠소. 테레시아스는 진실을 보여주겠다고 말한 후 정말로 진실을 보여준다. 그 스스로 죽어버린 라이오스가 되어 과거 오이디푸스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사건을 그의 몸을 통해 보여줌으로서. 마치 접신한 무당처럼 예언자 테레시아스는 죽어버린 왕, 죽어버린 남편, 죽어버린 아버지 라이오스가 되어 무대 위에 등장한다. 둘째는 복수자로서의 의미이다. 원작의 테레시아스가 개인적인 감정을 접어둔 예언자로서만 기능한다면, 극중의 테레시아스는 그 자신이 과거에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에게 범해졌던 것을 그의 아들 오이디푸스를 처벌함으로서 되갚는다. 예언자로서 진실을 밝히고 그 진실에 괴로워하는 오이디푸스, 심지어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찔러 스스로 처벌받은 오이디푸스를 죽음으로 재차 처벌하는 것이다. 신탁의 예언자로서의 도덕성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피해자로서의 부도덕에 대한 복수심이 있었기 때문에 원작에서는 그 스스로 처벌받았기에 동정받는 오이디푸스를 죽이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사회적 도덕의 화신으로서의 의미이다. 테레시아스가 복수자로서 오이디푸스를 처벌하긴 하지만 극중에서 테레시아스 본인의 감정이 강렬히 드러나는 일은 없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조차 냉정하다. 개인적 복수자이기 이전에 예언자인 것이다. 그럼에도 처벌을 감행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단순히 테레시아 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속한 테베의 시민으로서, 테베 도덕의 대행자로서, 신의 대리자로서,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취한 오이디푸스를 처벌한다.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취한 부덕자 오이디푸스를 죽여라. 이 사형집행은 테레시아스 본인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익명의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다. 즉 오이디푸스의 죽음을 이끌어내고 명령한 것은 예언자이자 복수자이며 사회적 도덕의 화신인 테레시아스이지만 실제로 그를 죽이는 것은 테베라는 사회전체이다. 이제 예정에 없던 죽음은 예정에 없던 삶을 낳는다. 하나의 죽음, 혹은 하나의 추방이 있어야 이 재앙을 면하리라. 테베에 전염병이 일어났을 때, 오이디푸스 본인의 말이다. 원래 추방되었어야할 운명의 오이디푸스가 죽게 됨으로 죽었어야할 운명의 이오카스테가 살아남게 된다. 이 저주가 나의 죽음으로 끝이나기를. 오이디푸스는 그렇게 그 스스로의 말이 저주가 되어 죽게 되고, 그 저주는 축복이되어 죽어야할 이오카스테를 살아남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녕 축복이었을까)
이러한 비극과 변경된 결말의 시작과 끝에 존재하는 인물이 있다. 그것은 세 번째 요소인 스핑크스이다. 단순히 수수께끼를 내어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다뤄지는 원작에 비해 극중의 스핑크스는 매혹적인 동물이다. 반인반수의 여성, 인간을 벗어나 있지만 인간을 유혹하는 존재, 스핑크스는 무대 위에서 살색 실크로 발가락 하나하나를 감싸고 암사자처럼 뛰어오른다. 그러한 존재이기에 오이디푸스의 숨겨진 진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일까.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를 유혹한다. 수수께끼를 갖고 태어난 자, 오이디푸스여. 내게 오세요. 당신께 태고의 비밀을 보여주겠습니다. 순결한 오이디푸스여, 말 못할 꿈이 아니면 인간들에게 나타날 수 없는 내가, 지금 당신의 눈 앞에 있는 겁니다! 나에게 오세요. 어서. 오이디푸스는 이 유혹을 거부한다. 싫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악처럼 매혹되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잡아먹히고 싶은 자신의 마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적인 도덕과 사랑의 숭고함을 말하면서 스핑크스를 단호하게 떨쳐낸다. 오이디푸스의 거부에 죽어가는 스핑크스는 축복의 말로 저주를 건다. 당신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되었고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결혼한 오이디푸스는 죽음을 맞게 된다. 한명의 죽음과 한명의 추방,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르고 추방자 이오카스테는 테베의 입구에서 다시 태어난 스핑크스를 만나게 된다. 마치 이방의 신 디오니소스처럼 스핑크스는 죽음에서 새로운 몸을 얻어 태어난다. 오이디푸스를 향한 사랑 때문에 그녀는 죽게 되었고, 또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길게 끌며, 온몸에 파란 꽃을 피운 채. 그녀는 묻는다. 오이디푸스의 사랑 때문에 살아남게 된 또 다른 여인에게. 이오카스테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렇게 괴물과 인간이 마주선다. 그 둘은 같은 사랑을 했고,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은 같은 존재이다. 이오카스테는 스핑크스를 마주하고 놀라 말한다. 너는 나로구나.
이렇게 이오카스테는 원작에는 없었던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그녀는 춤을 추었다.
보랏빛 벨벳을 어깨에 걸치고 두루미마냥 춤을 춘다. 자신의 남편, 테베의 왕을 위한 아내의, 여왕의 홀로 행하는 재의를. 진실에 대한 무지 속에 그녀는 행복했고, 우아했다.
그녀는 춤을 춘다.
새하얀 민소매 블라우스 밖으로 티 없이 뻗어 나온 어깨선이 부드럽다. 피에 젖은 눈으로 숨을 멈춘 자신의 남편, 자신의 아들을 끌어안는다. 사랑이 괴로운 순간이 있다.
그녀는 춤을 끝낸다.
어둠 속에 홀로 서서 기나긴 춤의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오카스테여 어디로 가십니까. 스핑크스는 묻는다. 모두에게 잊혀지고 신들에게조차 버림받은 여인이여,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에도 발길을 둘 곳이 없는 그녀는 이제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걸어간다. 그냥 자신이고자. 누군가의 자신이 아니라, 오이디푸스의 어미나 아내가 아니라 그냥 이오카스테 자신이고자. 자신의 삶에 아무 부정도 없이, 그저 그러하게 살아온 자신으로서, 푸른 꽃이 가득한 창 너머로 어둠을 등지고 걸어 나간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라. 경멸도 동정도 없이. 그때에 그녀는 각인되리라.
자신의 이름, 이오카스테라는 이름으로.
나는 너희들 안에서 불멸하리라.
*오이디푸스의 도덕적 승리에 대해서
소포클래스의 비극에서는 거대한 것에 대한 이야기 속에 인간이 갖고 있는 진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그 중에서 근친간 사랑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희곡이다. 이 이야기 안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소포클래스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세상의 어느 남자가 자기 어머니와 자는 꿈을 꾸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소포클래스는 이 꿈이 실현되는 것을 비난하고 저주하며 동정한다. 그의 희곡은 인간의 부덕을 보여준다. 비판자이자 심판자이며 도덕적 훈계자의 시선으로.
오이디푸스, 그는 누구와 결혼을 했는가? 그의 어머니인가, 아니면 왕으로 올라선 나라 유지의 미망인인가. 그는 우선 후자의 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 결혼은 그 사회에서 당연하면서도 왕에게도 타지인의 이름표를 때면서 권력의 유지를 용이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인 측면은 단순히 지배자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피지배자의 입장에서도 타지 왕에 대해 지역의 특성에 따른 여러 선처를 구할 수 있는 통로로서 queen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결혼은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남편측과 아내측의 입장을 모두 끌어올려줄 수 있는 합일점이었을 것이다. 이때, 결혼에는 로맨스가 중요하지 않다. 설혹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 이러한 정치적 단합 이전의 어떠한 특별한 감정선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그러한 감정선을 사회적으로도 공인받을 수 있었던 것은 위와 같은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오카스테가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형성되는 이유는 아니다. 이오카스테가 아니었어도 가능한 것이다. 그저 타지인 왕의 그 지역에 대한 실재적 등극을 가능케 하는 여왕의 자리에 다른 여자가 아니라 이오카스테가 있었다. 그뿐이다.
이러한 사회, 정치적 결혼의 특성을 살펴봤을 때, 오이디푸스는 과연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했나. 아니다. 그는 그의 아내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과 결혼을 한 것이고, 이 결혼 이전에 무엇보다 강한 끈으로 얽어진-심지어 그의 연애감정과 결혼관을 주관하는 힘을 가진- 결혼을 했었다. 그것은 바로 사회다. 테베라는 사회, 그리스라는 사회, 그리고 그 지역에 깃들어있는 특수한 도덕. 즉, 오이디푸스는 그의 평생의 동반자로서 이미 사회의 도덕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많은 행위들이 이 사회의 도덕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심지어 결혼을 했고, 사랑했던 이오카스테조차 이 사회적 도덕에 의해 거부감을 느끼고 눈을 뽑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테베의 사회, 좀 더 넓게는 근친을 죄로 보는, 그리고 그 외에 수많은 일들에 죄의 딱지를 붙이는 사회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오이디푸스가 엄마랑 결혼하든 딸이랑 결혼하든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그냥 지네들이 잘 산다면 된 거 아닌가. 왜 남을 못잡아먹어서, 죄인을 만들지 못해 난리인 것인가. 그러나 이 변명이 오이디푸스를 위한 변명이 될 수는 없는 것은 그 스스로 이러한 사회적 시선을 내화하고 있는 도덕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그러한 외부의 시선이 내화되어 자신의 행복을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불안을 갈망하고, 파멸을 소원한다. 오이디푸스컴플랙스는 어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파멸을 사랑하는 것이다.
누구랑 살든, 누구랑 사랑하든, 당사자들이 좋다면야 그게 남들에게 무슨 상관인가. 만약 스스로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면, 무슨 상관인가. 오이디푸스의 경우, 진짜 괴로워서 죽었다기 보다는 도덕기준에 대한 강박 때문에 죽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오이디푸스에게 정말 괴로운 상황이란, 이오카스테처럼 ‘처음 만난 어머니’의 경우가 아니라, 이미 태어나서부터 쭉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지내다가 어느새 연인이나 부부가 되어있을 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후회와 괴로움과 부끄러움이 들 때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 괴로움이 없고 행복하다면 그건 그걸로 됐다는 생각이 든다)
오이디푸스가 정말 위와 같이 괴로웠을까? 아닐 것이다. 그가 정말 괴로울 상황은 자신을 키워준 아비를 죽이고, 자신을 키워준 어미와 맺어질 경우일 것이다.(그를 키워준 부모는 폴뤼보스와 그의 아내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신탁에서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취할’것을 듣는다. 그는 그것이 싫었기에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떠돌았다. 그 와중에 친부를 죽이고 친모와 맺어지지만, 그것은 어쩌면, 그가 슬퍼할 수 있을 정도의 괴로움, 그가 정말 피하고자 했던 일까지는 아닌지도 모른다.
극단 실험극장_ 이오카스테
2010 0908-0919 연우소극장
작_이헌 / 연출_박정희
연출의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군상들은 때로는 욕망의 제물이 되기도 하고, 정치와 경제, 전쟁의 그물망 안에서 인간성을 거세당하기도 한다. 결국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은 <인간성의 상실>이란 위기를 맞고 있으며 시대의 이념이나 존재론적인 욕망, 또는 대중매체의 강요된 허상에 의해 부초와 같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부유하고 있다.
작품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동시대 관객들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원전 <오이디푸스 신화>에는 세 가지의 꼭지점이 있다. 신탁/ 운명/ 인간의 오만.
다시 말하면,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을 하리라는 신탁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오이디푸스였지만 다시금 그 굴레를 쓰게 되는 운명, 신탁을 벗어나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것을 알았을 때 눈을 찌르는 오만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작품 <이오카스테>에서 ‘신탁과 운명’이라는 두 꼭지점을 신화에서 그대로 차용한다. 작가는 하나의 명제를 선택하는 데 그것은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신탁의 모티브에서 파생된 가정: ‘라이오스가 신탁을 피하기 위해 자식을 버리지 않았다면, 아들이 예언을 피하기 위해 양부를 떠나지 않았다면 서로 알아보지 못한 부자간에 존속 살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운명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저항 자체가 그 운명을 만들어 갈 것이다’ 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 세 꼭지점은 그 운명에 침묵하고 있던,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관점 또는 입장에서 변환되며 ‘인간의 운명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저항’이 이오카스테를 통해 그려지고 있다.
이에 무대 위에서 그것들이 인물들의 <인간성>을 어떻게 자극하고 이오카스테는 그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무엇을 선택하고 대응하고 있는 지를 구현하여 작품의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 결정되어진 환경에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통해 과연 어떻게 <인간성>을 회복하는 지에 대한 질문과 <인간의 위상>에 대한 성찰을 동시대 관객들로 하여금 유도하고자 한다.
또한 그리스 시대가 배경인 작품 <이오카스테>를 동시대 관객들과 무대와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무대 환경을 동시대로 전이시키고 움직임과 다큐멘터리 기법을 결합시킨 대중 매체를 사용하여 사건의 현장감을 증폭시켜 관객들에게 환유적인 관극 체험을 유도하고자 한다.
개쏭. 송재영이라 쓰이고 개쏭이라 읽힌다. 주거지는 재개발지역만 골라살며 자신도 미개발상태로 저렴하게 살아가는 중이다. 니체와 오스카 와일드를 좋아하는 놈팽이이다. 가볍게 나래치는 글을 쓰고 싶지만 정작 나오는 글은 무겁게 땅을 파고 있다. 괜찮다. 지금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니 그 무엇에도 삶을 희생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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