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리뷰] 일상지하(日常地下), 일상지하(日常之下) - 극단 성북동비둘기

2012. 5. 25. 12:59Review

 

일상지하(日常地下), 일상지하(日常之下)

성북동비둘기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공간리뷰

 

글_지혜로운 늑대의 전사

 

카페 일상의 지하에 위치한 실험극장 일상은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연습장이자 공연장으로 활용되지만 사실은 키 낮은 콘크리트 천장과 기둥, 시멘트 바닥이 그대로 노출된 지하실에 가깝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도 없고 좌석 역시 배치되지 않았으며 천장에는 그 흔한 조명기구 하나 찾을 수 없으니 지하에 위치한 소극장이 아니라 그냥 지하실인 것이다. (김기란, “작은 공연, 힘찬 걸음”, 계간 연극평론 39호 中에서)

2011년 가을 공연된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하녀들>에서 마담은 위 대목을 인용하며 조소를 금치 못한다. (이 공연에서 ‘하녀’는 ‘연극’으로 치환되었다) ‘지하에 위치한 소극장이 아닌 그냥 지하실.’ 그것이 성북동비둘기 연극실험실 일상지하(日常地下)의 가장 적나라한 이름인 것이다.

극장 외관 풍경 (2011년 이른 봄 쌀쌀한 저녁)

서울성곽이 마주 보이는, 간송미술관 근처의 고즈넉한 길가에 가면, 보도에 살짝 걸쳐 있는 작은 책상이 있고, 극단의 배우 한 명이 겨울이면 관객과 함께 떨며, 여름이면 무더운 햇살을 받으며 나와 앉아 작은 명함처럼 생긴 표를 내민다. 따로 대기 공간이 없는 까닭에 관객들은 공연 시작 10분 전부터 입장이 가능한데, 계단을 꺾어 지하로 내려갈 때면 뭔가 음습해지는 분위기에 작은 웅성거림이 일다가, 표에 펀칭을 하고 철문을 열고 공연장으로 들어설 때면 여지없이 ‘그냥 지하실이잖아’ 하는 웃음 섞인 탄성이 터진다. 그러나 처음 온 관객이 아닌 경우는 조금 더 신중하다. 이곳이 ‘그냥 지하실’이기 때문에 펼쳐질 수 있는 공간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이미 한 번쯤 엿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번 공연에서는 또 어떤 이미지, 어떤 상황, 어떤 감각이 자신을 끌어당길지 사뭇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섰다가, 마치 동굴 속으로 하염없이 떨어져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에 압도당한 채 천천히 자신의 감각을 그에 맞춰나가는 짜릿한 체험(體驗)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지하(地下)와 지하(之下)의 변주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가장 먼저 지하(地下) 또는 ‘그냥 지하실’이라는 감각은 위 인용문에서 언급되듯 조명기구나 객석의 부재, 콘크리트 천장과 시멘트 바닥의 노출 등으로부터 비롯된다. 사실 대학로에 있는 대부분의 극장 역시 건물의 지하에 위치하긴 매한가지다. 그렇지만 그 경우 적어도 천장에는 조명기구를 달 만한 격자형의 바가 설치돼 있고, 거기서 나오는 색색의 조명은 말 그대로 ‘연극적인 효과’를 자아냄으로써 그 공간을 ‘극장’으로 뚜렷이 규정하는 데 일조한다. 객석 역시 마찬가지인데, 몇몇 극장에서는 공연에 따라 객석을 이동시켜 다양한 방식으로 설치하는 일도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대개 검은 색의 계단식 객석이라는 기본적인 형태는 유지된다. 이에 반해 성북동비둘기 연극실험실 일상지하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 거칠게 방음처리를 한 벽면, 거기 스며든 곰팡이, 빗물이 샌 자국 위에 더해진 붉은 녹의 흔적, 얼룩덜룩한 시멘트 바닥, 공간 한 쪽에 노출된, 건물을 받치는 기둥 하나. 그 정도가 존재한다면 존재한달까. 혹은 살고 있다면 살고 있달까. 피터 브룩이 얘기한, 어떤 이가 그 곳을 가로지르고 또 다른 누군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면 충분히 하나의 연극 행위가 구성될 수 있다고 하는, 개념으로서의 ‘빈 공간’을 넘어서는 실제적인 ‘빈 공간’이 그 곳에 있다.

“여왕님께 무얼 달라 그럴까?” 또 다른 광대는 대답했다. “저녁밥을 차려 달라지.” 그러자 아이들은 일제히 옳다고 환성을 질렀다. “저녁밥으로 무엇무엇을 달라 그럴까?” “햄, 순대...” 그 광대는 아이들이 먹어볼 수 없는 음식들의 이름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그 황홀한 음식 이름들의 축제가 계속 되어감에 따라 아이들의 환호성은 점차 사그라들고 마침내는 깊은 침묵이 클럽 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참되고도 깊은 연극적 침묵이. 아이들이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너무도 간절히 소망하자 이미지에 불과하던 것들이 참으로 실재하는 것이 된 것이다. (피터 브룩, 빈 공간 中에서)

피터 브룩은 1946년 어느 오후 함부르크 레페르반 가의 한 클럽 안에서 발견한 광경을 이 같이 묘사한다. 그는 빈 공간을 채우는 이름들, 부재로부터 이끌어진 실재, 그리고 침묵으로부터 발생하는 연극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참된 연극성(물론 ‘연극성’이라는 말은 신비적이다)이 아닌가 하는 것. 이후 그로토프스키가 주창한 ‘가난한 연극’ 개념도 이와 유사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배우의 몸,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연극이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모든 거추장스런 치장이나 사치스런 오브제들을 프레임 바깥으로 밀어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당시에는 존재하였다. 그 같은 ‘가난’과 ‘굶주림’으로부터, 무언가 다른 세계를 열어젖히는 강력한 힘이 발생함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피터 브룩은 쓴다. “헌데 이 굶주림의 정체는 무엇이었던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굶주림, 가장 충만한 형태의 일상보다 더 깊은 현실에 대한 굶주림이었을까? 아니면 삶의 잃어버린 부분에 대한 굶주림, 참혹한 현실을 가려 주는 완충장치에 대한 굶주림이었을까?”

연출가 김현탁에 따르면 연극실험실 일상지하의 원래 이름은 일상지하(日常之下), 곧 단순한 ‘지하(地下)’가 아니라 ‘일상의 아래’를 의미한다. 요컨대 피터 브룩에게 ‘빈 공간’이, 그로토프스키에게 ‘가난한 연극’이 실제적인 ‘텅 빔’이나 ‘가난’으로부터 어떤 연극적인 ‘채움’이나 ‘부요’로 이끌어졌듯, 이곳 ‘그냥 지하실’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언가 무수한 것들이 꿈틀거리며 반란을 일으키는 저 ‘아래’로, ‘밑바닥’으로 환원된다. 브룩의 위 문장에서 따오자면, ‘가장 충만한 형태의 일상보다 더 깊은 [연극적] 리얼리티’가 거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음습하고 거친 지하는 김현탁의 연출에 따라 자유자재로 ‘이용된다.’ (물론 이때의 이용은 열악한 환경의 제약을 받는다, 막상 공연이 올라가고 보면 그 제약으로 인해 더 고고한 빛을 발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이는 유명한 국내외 고전 작품을 이용하고 해체, 재구성하는 그의 작업 방식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일상지하라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곧 김현탁이 그려내는 공간의 연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동일하다.

새로운 리얼리티(之下)가 만들어지고 있는 공간(地下)

가령 2011년 1월 공연된 <inn + dividual 혈맥>(김영수 원작)에서 공간은 시대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버스가 된다. 칸막이로 막힌 지하실의 바깥쪽은 버스 대합실로 사용되고(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상지하에 관객 대기 공간이 존재했던 겨울이었다), 시각이 되면 관객들이 일제히 안쪽 공간인 버스로 올라탄다. 객석은 일반 버스 좌석과 유사한 구조로 배치되어 있으며, 문도 버스 앞과 중간에 하나씩 트여 있어 인물들이 그곳으로 끝없이 오르내린다. 원작(1947)의 털보, 옥매, 거북이, 옥희, 원칠 등은 기존 캐릭터의 색깔을 덧입거나 덜거나 교묘히 다른 색으로 갈아입은 채 우리를 다시 만난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끄럽게 자신의 불행을 떠벌리는 아저씨, 옆 사람에게 귤을 권하는 미친 여자, 만년필을 파는 소년, 술집에 나가는 처녀, 좌익 사상을 선전하는 청년 등 현대(2011)의 각종 익명의 승객들이 되어 버스를 오르내리며 때로는 서로 마주보고, 때로는 핸드폰을 통해서, 또 때로는 각자 차창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독백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오르내림과는 별개로, 말하자면 생성되고 소멸되는 그때그때의 동행에 초연한 채, 그렇게 덜컹이며 버스는 간다. 지금 여기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그때 그 사람들, 그들을 일별하지만 그들과 관계없이 각자의 종착지를 향해 가는 관객들, 그런 우리가 함께 타고 내리는 혈맥, 과거 같기도 하고 미래 같기도 한 어느 날의 풍경, 때마침 지금 이 순간의 연극, 누군가 노래하고 누군가 울고 누군가 꿈을 꾸는, 일상의 아래.

버스 승객들에게 딸 복순이를 찾아달라며 주저앉아 우는 옥매

한편 2011년 3월 공연작인 <메디아 온 미디어>(에우리피데스 원작)에서 공간은 각종 TV 채널의 촬영이 이루어지는 스튜디오가 되고, 그에 따라 객석은 방청석이 되어 넓게 펼쳐진다. 그리스 비극의 여주인공 메디아(MEDIA)의 이름에서 매스 미디어(media)의 은유를 발견한 연출가 김현탁이 에우리피데스의 원작 장면들을 다양한 채널들로 형상화한 것. 그에 따라 지하실 바닥에 깔린 사각형의 무대는 기자회견장, 토크쇼 촬영 현장, 인터넷 뉴스 화면, 초기 유성영화 촬영장, 애니메이션 더빙 현장 등으로 변모하고, 코러스들 역시 기자, 촬영 스태프, 네티즌, 더빙 중인 성우 등으로 그때그때 역할을 바꾼다. 뿐만 아니라 관객들은 각 현장에 관여하는 참여자들인 동시에, 거리를 취하고 바라보며 위조된 웃음으로 동조할 뿐인 방청객이나 시청자의 위치에까지 가담함으로써, 메디아의 끔찍한 비극에 개입하기도 하고 그로부터 발을 빼기도 하는 매순간의 분열된 입장을 경험한다. 더 나아가 공연의 마지막에 이르면, 미디어의 허구성 차원에서 일관되게 다뤄졌던 앞선 촬영 장면들이 문득 실재였던 듯, 즉 메디아의 살인이 TV 속에서가 아니라 정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듯 모든 것이 일순 뒤틀리게 된다. 촬영에 사용됐던 각종 소품들이 핏자국과 함께 바닥에 전시되고, 노란색의 출입금지 띠가 그 주위에 둘러쳐지는 것이다. 그렇게 종결되는 현란한 장면들, 버려진 물신들, 출입이 금지된 영역, 시청자 및 방청객의 시선의 바깥, 모든 종류의 매체의 이면, 매체가 조장하는 우리들의 지각과 인식의 이면, 은밀히 폭로되는 저 밑바닥.

마지막 가요 채널에서 노래를 부르는 메디아와 코러스들

일상지하가 개관한 이래 가장 여러 차례 공연된 연극인 <세일즈맨의 죽음>(아서 밀러 원작, 2010년 11월, 2011년 5월, 2012년 3월 공연)에서, 객석은 중앙의 러닝머신을 마주하여 대각선 방향으로 길게, 공간을 가로질러 배치된다. 극장의 구석에는 지하 주차장의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손전등을 든 윌리가 휘파람을 불며 들어와 공간을 살피다가, 얼마간의 망설임 끝에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 기계를 작동시켜 달리기 시작한다. 그 러닝머신은 세일즈맨 윌리의 낡은 자동차이고, 그가 달림에 따라 공간은 이제 밤의 도로가 되어 펼쳐지며, 관객들은 도로 주변에 놓인 가로수 또는 가로등을 대신한다. 이어지는 연극은 작가가 원작에서 끝내 언급하지 않은,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그 어떤 가시적인 장면보다도 강렬하였을, 윌리의 최후, 곧 그의 죽음의 순간이다. 원작의 장면들은 자살을 결심하고 차를 달리는 윌리의 기억이나 환상으로 변환되고, 인물들은 그를 스치는 수많은 차량들의 불빛으로, 윌리를 휘청거리게 만드는 굉음과 에너지로 그의 주위를 맴돌게 된다. 헌데 공간을 채우는 물질성의 분투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러닝타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는 윌리의 물질성이야말로 모든 서사를 뛰어넘어 관객의 뇌리에 박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절절한 물질의 표면 아래에서 인간 윌리의 전 생애를 만나게 된다. 그의 수치심과 타는 듯한 고독을, 헛되이 돌던 쳇바퀴를, 죽음으로써만 획득할 수 있는 돈을, 언제나 꿈꾸던 가족의 사랑을, 거기 아래에서, 땀과 눈물에 젖은 뜀박질 아래에서.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윌리

또 2011년 9월 공연된 <하녀들>(장 주네 원작)에서는 극장 전체가 하녀들의 지하실이 된다. (원작의 다락방보다 더 비천하게 추락한 하녀들의 처지가 여기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들의 비린내 나는 현실은 바로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연극 자체로 이어진다. 공간에 들어서면 바닥에는 빼곡하게 의자가 깔려 있고, 한 구석에 끌레르와 쏠랑쥬가 피를 묻히고 앉아 벌벌 떨고 있다. 원작에서와 달리 그들은 이미 무슈를 살해해버렸고, 그 살인의 공포로 인해 연극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연극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그들의 가장 절실한 실재이고, 즐비한 의자들은 그들의 삶의 공간 자체인 극장이다. 그들은 무슈의 강간을, 자신들이 저지른 살인을, 자신들에 대한 마담의 횡포를 손에 만져질 듯한 두려움으로 벌벌 떨며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소리치며 연기한다. 그러다 그들은 마담이 온다는 소식에 바닥에 깔린 의자들을(다시 말해 연극이 펼쳐지는 객석의 공간을) 헐레벌떡 소란스럽게 접어 공간을 비운다. 이 공연에서 마담은 관객들 틈에 섞여 앉아 있던 평론가다. 그녀는 하녀들의 연극을 형편없는 포스트드라마라 비웃으며, 제대로 된 드라마를 만들 수 있도록 그들에게 의상을 주고, 소품을 배치시키면서 명령하고 조롱한다. 그리고 결국 마담은 한낱 연극일 뿐인 그것을, 한낱 극장일 뿐인 그 공간을 훌훌 털고 삶으로 도망가 버리고 만다. 그러나 마담의 살해에 실패한 하녀들은 삶의 공간인 극장에 갇힌 채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한다. 그리고 죽음 너머로까지 이어지는 또 다른 연극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이때 일상지하는 그들이 끝없이 연극을 다시 시작하는, 삶과 연극이 너무도 처절하게 하나인, 하녀들의 밑바닥, 숨겨진 얼굴이다.

펼쳐진 객석 한 구석에 앉아 떨고 있는 끌레르와 쏠랑쥬

그리고 2012년 5월부터 일상지하에서는 또 하나의 공연이 올라가고 있다. 이번에는 스트린드베리 원작의 <미스 줄리>다. 귀족과 하인 사이에서의 내밀하고 미묘한 이야기를 다룬 원작은 현대의 ‘미스 줄리’ 라는 이름의 여가수와 매니저 이야기로 변형되고, 이때 공간은 미스 줄리의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으로 둔갑한다. 공간에 들어서면 줄리를 기다리는 중인 코디네이터 크리스틴이 관객들에게 연신 인사를 하고,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면 줄리에 이어 매니저 장이 헐레벌떡 들어와 촬영 스태프이자 관계자인 관객들에게 지각사유를 설명하며 수다를 떤다. 전체 공간은 둘로 구획되어서, 정면에 있는 크로마키 배경이 깔린 촬영 프레임(카메라의 시선 하에 놓인 인위적인 공간)과, 오른편 구석에 펼쳐진 대기실(사적인 폭로 공간)로 나뉜다. 인물들은 두 공간을 오가며 원작의 장면들을 파편적으로 변형시켜 보여주고, 이는 곧 뮤직비디오라는 가상과 실제 현실의 뒤섞임으로 이어진다. 공연은 어린 여가수의 성상납문제를 다루면서, 찌들대로 찌들은 그 세계의 이면, 거기서 진짜 사랑을 갈망하게 되어버린 한 여성의 절망, 도망칠 수 없기에 다시 몸을 팔러 가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 현란한 노래와 춤에 가려진 그녀의 마음의 밑바닥, 그 처절한 아래를 들추어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모든 이야기가 뮤직비디오 촬영장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단지 뮤직비디오의 드라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커다란 틈을 또한 만들어낸다)

<미스 줄리> 공연 사진 촬영 중인 배우들

언제나 수많은 겹으로 이루어지는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작업과 김현탁의 공간 연출을 이 짧은 문단들로 다 설명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연극이라는 것이 어쩌면 매번 새로운 공간을 펼쳐내는 일 자체에 다름 아닐 수 있다는 사실과, 그 과업은 언제나 가난하고 텅 빈 공간에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실제로 연극이란 본디 그와 같은 가난과 텅 빔을 딛고서만 시작된다. 만일 모든 재료나 정황들이 현실에서와 똑같이 풍족하게 주어져 있다면 굳이 연극을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필요한 많은 것들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애초에 연극은 이루어지는 법. 그렇기에 연극의 공간은 언제나 현실 바깥이며, 풍요로운 일상 아래이다. 다만 거꾸로 그것이 저 위쪽의 현실을, 관객들의 지금 여기를 건드려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역행하고 용솟음치는 힘이야말로 어마어마할 것. 그리고 그 같은 건드림은 ‘채움’으로부터가 아니라 어떤 ‘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김현탁의 공간 연출은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장 헐벗은 오브제들을 통해 다만 공간에 균열을 만듦으로써 이루어진다. 그것이 바로 일상지하(日常之下)의 특별함이다.

성북동비둘기 연극실험실 일상지하를 나오면 도로 반대편으로 서울성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오래된 벽도 벽이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나무에 여름이면 푸른 잎이 돋고,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에 조명이 비춰져 마치 꽃이 흐드러진 것처럼 아름답다. 극장에서 다시 정류장 쪽으로 조금만 내려가 왼쪽으로 꺾으면 일년에 단 두 차례만 문을 여는, 미인도가 소장되어 있는 간송미술관이 있고, 주변에는 조용한 커피집들,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돼지불백이 맛있는 기사식당이 있다. 또 극장이 있는 건물 2층에는 ‘한국 최고의 철거팀’이라는 붉은 글씨로 된 간판도 붙어 있다. 성북동. 부유하면서도 가난하고, 옛스러우면서도 모던한, 고즈넉하면서도 아기자기한 화려함이 있는 동네. 그런 일상의 아래.

극단 성북동비둘기가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그 이름처럼 대학로의 닭둘기로 전락하지 않고 연극의 정신을 지켜내어, 경계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작업을 유지하며 연극의 극한에서 마음껏 놀아보고자 함이었다. 어떤 작품을 대할 때에도 본인만의 탁월하고 천부적인 해석을 가하지 않을 수 없고, 그로써 당연히 그 공연에 고유한 공간을 새롭게 창조할 수밖에 없는, 정직하고 치열한 시선을 가진 연출가 김현탁과, 젊고 가난하고 패기 있는 배우들이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살고 있는 곳. 거기 ‘일상의 아래’라는 연극의 나라가 있다. 따뜻한 격려와 찬사의 시선으로든, 날카로운 경계의 시선으로든, 우리가 고개를 돌려 응시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밑바닥인, 나라.

 

 

사진 1,2,4,8 = 장성용, 3,5,6 = 최지욱, 7 = 김현탁

 

미스 줄리 (Miss Julie) 공연 소개

2012.5.8 ~ 6.10 / 평일 8시, 주말 6시, 월 쉼 / 일반15. 대학생12. 중고생10 / 02)766-1774

출연 정혜영 김민엽 연해성 / 스태프 김미옥 이계원 윤슬기

원작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 연출 김현탁

스트린드베리의 원작에서 도도하고 철없는 백작 딸 줄리는 하인 장에게 한 순간 몸과 마음을 빼앗겼다가, 귀족으로서의 신분과 저열해진 사랑 사이의 갈등, 또 버림받아 오갈 데 없는 절망으로 인해 고통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른다. 본 공연은 미스 줄리의 이 이야기를 현대 한국에서 ‘미스 줄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한 여가수의 이야기로 끌어와, 연예인 성상납과 자살이라는 사회적인 문제를 꼬집어내며, 동시에 그 이면에 놓인 한 여성의 내밀한 심리를 파헤쳐보고자 한다. 실제로 여자 연예인들의 성상납과 그것을 대가로 이루어지는 모종의 거래, 그 둘의 악순환은 오늘날 연예계에 검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으며, 이는 이따금 전해지는 누군가의 자살 소식 등을 빌미로 충격 속에 폭로되고 공공연히 구설수에 올랐다가는 화려한 겉모습에 가려 잊혀지곤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건을 단지 가십거리가 될 만한 충격적인 사건 자체로만 바라볼 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여성의 내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하지만 추측컨대 그 여성의 내면에는 저 세계의 질서 속에 편입되어 마냥 악순환의 고리를 밟을 수만은 없게끔 하는 또 다른 욕망이나 의지, 혹은 가치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몸을 넘겨주는 일에 익숙했던 그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귀하게 보존되고 있었던, ‘마음’이라는 것이었을 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미스 줄리의 신곡 ‘미스 줄리’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 줄리는 무심한 듯 능숙하게 촬영에 임하며 제멋대로 현장을 누비고, 매니저 장과 코디 크리스틴이 그녀를 보조하고 있다. 또 그러면서 그들은 한 사람은 귀족 행세를 하는 스타로, 두 사람은 하인으로 제각기 역할놀이를 행한다. 그렇게 세 사람 모두 연예계 생활에 찌들대로 찌든 채 그들만의 세계를 가공하고 수호하고 유희하며 소비하는 것. 그런 그들의 배후에는 스폰서 백작이 있고, 또 그 배후에는 성상납과 각종 불결한 거래로 얼룩진 그 세계의 참모습이 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때때로, 진심어린 순정과 해맑은 절망이 있다. 줄리를 이용해서 백작의 그늘을 떠나 새 사업을 차리려는 장은 그의 야망에 따라 줄리의 몸을 취하고, 이미 걸레가 된 자신의 몸을 대수롭지 않게 장에게 넘긴 줄리는 불현듯 다시는 저쪽 세계로 건너가지 못할 마음의 강을 건너게 되는데...

일상지하 오시는 길

유년기의 고립과 혼란을 대가로 얻은 가난하고 진실한 시선을 통해, 새로운 관념을 담기 위한 새로운 형식의 구축에 힘쓰는, 순수 연극성에 대한 작업의 터전인 성북동비둘기 연극실험실 일상지하로 오실 때에는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 2112, 1111번 버스 또는 마을버스 3번 탑승 후 성북초둥학교(간송미술관)에서 하차, 오던 길로 20미터 직진하여 E.T 문방구 지하로 오시면 됩니다. 많이 찾아주셔서 원작과 공연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에서 비롯되는 유희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