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12. 14:05ㆍReview
무릎 위에 놓인 욕망
글_지혜로운 늑대의 전사
산부인과 의자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본 기억은 많은 여자들에게 생생한 감각으로 새겨진다. 임신이나 출산, 낙태와 아무런 관련 없이도 한 여자가 그 의자에 앉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의심하는 대부분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는 일로부터, 감각의 여정은 시작된다. 예컨대 대기실에 들어설 때 그 시선들이 몸에 와 박히던 짜릿한 감각을 여자는 일평생 기억한다. 이어 몸을 뉘인 의자가 들어올려지는 감각, 차가운 검사 장치가 벌린 다리 사이를 헤집는 감각, 그 기계가 몸속에 들어왔다 쑥 하고 빠져나가는 감각도 여자는 잊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진 먼 훗날, 행복한 마음으로 그 의자에 앉을 때에도 그녀의 다리는 그 감각들을 기억하며 벌어지리라. 혹은 그 날이 진정 첫 번째일지라도, 그 벌어짐의 감각은 비참하도록 아득하리라. 말하자면, 그 의자는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산파 의자에 앉아있는 헤다 가블러(연해성 분)를 본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거기서 헤다는 여자들이 그 순간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모멸감(단연코 여성으로서의 모멸감보다 한층 깊은 차원의 것이다)을 감각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감각은 공연이 시작됨과 더불어 계속해서 다양한 감각들로 변주된다. 때로는 다정하기도 하고, 여전히 지리멸렬하기도 한 감각들 - 누군가 천천히 내 곱은 손을 닦아주는 감각, 어린 시절처럼 머리를 잡아당겨 묶어주는 감각, 다리를 들어 올리고 신발을 신기고 발목을 묶는 감각, 옷을 벗기고, 불룩 나온 배를 만져대는 감각. 한껏 다리를 벌리고 앉아, 일평생 그렇게 살고 있다는 꿈.
그리고 마침내, 그의 아이가 나의 무릎 위에 놓이는 감각 - 공연의 중반부에 테스만(오성택 분)은 주운 레우볼그(염순식 분)의 원고를 헤다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간다. 이것은 실험의 일환이므로 실험자들은 그녀의 반응을 차갑게 예의주시한다. 헤다는 어찌할지 몰라 황망하다. 그녀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지금 그녀의 무릎에 놓인 원고의 감각 때문이다. 차갑고 무거운 그 무더기, 그의 아이. 그리고 이 감각은 헤다 가블러가 ‘욕망의 주인’이 아니라, ‘욕망이 무릎 위에 올려짐 당한 자’임을 확증해주는 철저한 은유가 된다.
연출가 김현탁의 작업 앞에는 곧잘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리고 그 말은 은연중에 ‘원작과 다른 것’을 하는 것으로 그의 작업을 규정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김현탁의 해체란 원작에 없는 무언가를 향해 방향을 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작에 가장 가까이, 깊이 다가가는 일과 연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작업을 연출가 자신의 입장에서, 곧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는 지극한 동시대인의 입장에서 착수하는 까닭에, 그의 공연에서는 원작의 가장 깊은 진실이 단지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알레고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이때 알레고리가 원작을 비껴가는 것은 필연적이나, 이 비껴감은 ‘다른 진실’을 말함이 아닌, 어쩌면 가장 은밀하여 그간 깊이 있게 주목되지 못했던, ‘동일한 진실을 다른 방식으로’ 말함에서 비롯된다.
헤다 가블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원작의 헤다는 통상적으로 고고한 욕망의 주체로서 이해되고 공연된다. 김현탁은 그런 헤다를 산파 의자에 묶어 놓았다. 그리고 이것은 원작에 반하여 헤다로부터 주체성(특별히 여성의)을 박탈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김현탁이 읽어낸 원작의 진실은, 우리가 흔히 기댔던 헤다의 욕망이라는 것, 주체성이라는 것이 사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폭로에 더 가깝다. 예컨대 헤다가 레우볼그의 원고를 태워버린 일은,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죽게 되는 것은,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따라간 귀결이 아니라, 마치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법한 선택지들처럼 그녀의 삶에 던져지고 축적된, 지극히 타성적인 요구들에 함몰되어버린 귀결이라는 것.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리플릿의 작업노트에서 연출가는 결혼이나 임신이나 정숙과는 스스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자들이 모두 헤다에게 숨 막히도록 그것을 의무 지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노라 쓰고 있다. 그 노트에서 ‘여성’이라는 은유를 지워보아도 이해는 가능하다. 얼굴이 없는 자들로부터, 그들이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지도록 끝없이 요구받는 것이 우리네 주체성의 이면이라는 이야기다. 인생이란 그들이 사랑으로 주지 않은 아이를 잉태하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산파의자에 묶여 있는 감각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 공연이 실험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그러므로 주체성의 점진적 박탈 과정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이라는 것이 이미 없는 삶’을 예시한다. 블랙(이진성 분)은 헤다의 정숙함을 시험하기 위해 그녀의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끔찍함을 견디다 못한 헤다가 그 손가락을 물어뜯는다. 블랙은 대견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 자리로 들어간다. 손가락을 깨물고 칭찬을 받는 것, 그것이 주체성이라는 이야기다.
혹자는 이번 공연에서 채택된 실험의 형식이 너무 직접적이거나 진부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이번 공연에서는 극단 성북동비둘기 특유의 다이나믹이나 장면마다 넘치던 이미지와 구도들이 다소 축소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현탁 연출에게서 가장 높이 살 수 있는 측면인, 단지 전체 공연의 구조를 실험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요소들을 형식적으로나 의미적으로나 신중하게 공들여 매만지는 작업은 여전히 강력하게 유효하다. 그리하여 무대 중앙에 앉아 있는 헤다를 중심으로 장면마다 각종 이미지가 발생된다 - 옛 사랑을 이야기하는 레우볼그는 헤다의 한 손을 자신의 머리 위에 얹고 무릎을 꿇어 고해의 이미지를 만들고, 테아(정혜영 분)와 레우볼그는 헤다의 의자를 가리며 하필 무대 정중앙에서 반가운 포옹을 나눈다. 고모(김미옥 분)와 테스만은 (원작의 모자 대신) 헤다의 머리를 묶고 (슬리퍼 대신) 헤다의 부츠를 벗겨 새 신을 신긴 뒤 그것과 똑같이 생긴 아기의 신발을 그녀의 배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 이미지들이 여전히 고요하게 나열되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의자에 묶여 있는 헤다의 이미지 자체도 그다지 끔찍하거나 충격스러울 정도로 관객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이 (비교적) 고요한 공연에는 우리를 건드리는 나선형의 에너지가 존재한다. 무대 중앙의 헤다에게 나와서 각종 실험을 수행하고 들어가는 실험자들은 무대 뒤의 긴 테이블로부터 어김없이 나선형의 선을 그리며 들어와 그녀에게 접근하고, 또 멀어져간다. 마치 커다란 원의 중심에 헤다가 놓여 있고, 그녀를 가운데 둔 구심력으로 하여 다른 모든 이들의 동선이 발생되는 것 같다. 이것이 극대화되면 가령 레우볼그와 테아가 유모차를 밀며 헤다 주위를 빙빙 도는 밀집한 원의 에너지로까지 이어진다. (여기에 이따금 의도적으로 매우 상반되는 지리한 에너지가 더해지는데, 가령 테스만의 중세 브라반트 가내 수공업 낭독이 그러하다.)
그리고 이 에너지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단지 헤다라는 여성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여자라는 것이 과연 그다지도 중요하단 말인가), 거기 갇힌 우리 모두의 인생을 보게 하는 데 이른다. 산파 의자에 묶여 있는 인생과, 그 주위를 끝없이 맴도는 나선형의 에너지들이, 그 에너지로 하여 발생하는 모든 비가시적인 휘청거림이, 참으로 하염없다. 본 공연의 실험은 바로 그 같은 폭력을 가시화한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의 운명에 맞서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눈을 찌르고 먼 고행을 떠남으로써 운명보다 끈질긴 영웅적 주체성을 예시한 인물이다. 요컨대 그리스 비극의 주체성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비극은 무엇을 그리는가? 동시대 비극의 인물들은 영웅이나 귀족의 지위에서부터 체홉 류의 소시민으로 자격이 옮겨진 것과 같은 표면적인 변화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바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을 하지 못하며, 그것을 견디지 못함을 특징으로 한다. 그들은 다만, 삶이란 욕망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어쩔 수 없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 그들은 주체성이라는 것이 허황된 비실체라는 것을 끊임없는 휘둘림으로써 경험하고 전시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렇게, 이 인생을, 견딜 수 없다.
헤다는 무릎 위에 올려진 레우볼그의 아이를 결국 자신의 임부복 속으로 집어넣는다. 가슴팍에, 복부 위에, 그리고 레우볼그에게 총을 주기 위해 벌린 가랑이 사이로 불룩하게 포개진 원고지 갈피갈피가 보인다. 공연의 끝에 가서 블랙은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바닥에 무릎을 꿇어 헤다의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들이민다. 초록색 천 너머에서 그의 손이 바삐 움직이고, 그때마다 레우볼그의 원고가 핏덩이처럼 바닥에 흩날린다. 그리고 마침내 쑤욱 빠져나오는 빨간 머리칼의 가발 하나. 어린 헤다의 붉디붉은 초경(初經) 같은, 가장 거대한 그녀의 삶의 알레고리가 죽은 헤다의 머리 위에 씌워진다. 지난 날 레우볼그의 인사가, 그리고 그것을 따라 헤다가 황홀하게 되새김질하던 아름다운 문장이 떠오른다. "안녕, 헤다 가블러. 안녕, 헤다 가블러. 안녕, 헤다 가블러."
아기의 가재 수건으로 헤다의 손가락을 닦아주고,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던 하녀 베르테(박경남 분)는 물었다. "뭘 보고 있어요, 헤다?"
산파 의자에 기댄 헤다 가블러가 무심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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