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Festival Màntica 2013 - 정금형 <7 ways>

2013. 11. 4. 09:43Review

 

섹스와 자위 사이

정금형 <7 ways>, Festival Màntica 2013

 

글_지혜로운 늑대의 전사

 

볼로냐(Bologna)의 미술학도 출신 로메오 카스텔루치(Romeo Castellucci)는 이탈리아 공연계에서 일찍이 환대 받지 못했다. 오히려 프랑스를 필두로 한 여타의 유럽 국가들이 그를 먼저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그의 공연 연혁은 국내적이기보다 국제적인 성격을 띤다. 그렇지만 그런 그에게도, 꿈을 펼쳐 보일 장소들이 있는가 하면 꿈을 꾸는 장소가 또 따로이 필요한 법. 부인과 누이와 함께 1981년 처음으로 극단 Societas Raffaello Sanzio의 둥지를 튼 곳, 볼로냐에서 기차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 체제나(Cesena)가 바로 그 곳이다. 이탈리아 최고(最古)의 도서관이 있고,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요새가 있고, 분수를 가운데 둔 광장에는 다정하고 밝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그곳에서 그는 작품을 구상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장 뜨거운 최신작(언제나 다소 문제적인)을 마을의 관객들과 제일 먼저 나눈다. 그리고 매년 10월에는 작은 축제를 열어 이웃들에게 마을 밖의 공연 몇 편을 소개하기도 한다. 두 번의 주말에 걸쳐 총 예닐곱 개의 초청작과 그 밖의 몇몇 프로젝트(비평가 모임, 15분짜리 영상 상영회, DJ SET, 워크숍 등)가 선보여지는 Festival Màntica. 그 축제에서 <7 ways>를 공연한 정금형을 만났다. <비디오 카메라>로 그녀의 작업을 처음 접한 지 꼬박 일년 반 만의 일이었다. 문래동의 음습한 건물로부터 초가을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로, 각자 참으로 많은 곳을 떠돈 이후의 만남이었다. 여전한 동반자인 마네킹들도 반가웠고, 매우 야한 몸짓들을 지극히 무덤덤한 태도로 시현하는 그녀의 조용한 얼굴도 그대로였다. 공연이 끝난 뒤, 새콤한 칵테일 잔을 앞에 두고 나는 다짜고짜 물었다. 정금형에게 섹스 혹은 자위란 무엇입니까? 감히 모든 장면, 모든 움직임이 수렴되고 있노라고 여겨지는 그 지점은 대체?

그 날도 공연 전 작은 대기 공간에서 15분짜리 영상을 본 후였다. 축제 측은 프랑스 영화 감독 Alain Cavalier의 <24 Portraits>(1987&1991)라는 전체 작업 중 한 가지씩을 매일 밤 상영했는데, 그러니까 한 사람의 초상을, 그의 인생을 단지 15분 동안 일별한 뒤에 우리는 매번 객석으로 입장했다. 총 사흘에 걸쳐 내가 만난 이들은 매트리스 만드는 사람, 종이를 물에 적셔 가짜 꽃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칼을 갈아주는 사람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금형이 파란 천을 몸에 덮고 무대 구석에 쪼그려 앉아 가만히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자기 몸보다 큰 수레를 끌고 다니며 물레를 돌려 칼을 가는, 억척어멈을 꼭 닮은 노파의 이 빠진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극장 안으로 들어서니 넓지도 좁지도 않은 무대 한 구석에, 역시나 금형이 앉아[놓여] 있었다. <비디오 카메라>때도 그랬듯, 그녀는 관객보다 앞서 공간을 점유하고, 다만 조용히 앉아있음으로 공간 속에 어떤 파동을 만들어낸다. 그 에너지가 벌써부터, 무대 한 가운데 분홍 천을 덮은 채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마네킹에게, 곳곳에 널브러진 오브제들과 얼굴들[가면들]에게, 숨을 불어 넣는다.

그녀는 일어나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무대 뒤쪽에 있는 검은 허물에게로 다가가 그것을 머리까지 덮어 입는다. 발에는 하얀 가면을 맞춰 끼운다. 뻗어 누운 그녀의 몸을 따라 가만히 바닥에 뺨을 대고 누웠던 얼굴이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한다. 이어 목을 곧추 세우고, 두 팔로 끈적하게 바닥을 짚고, 마치 아메바처럼, 액체가 돼버린 터미네이터처럼, 은밀하게 기어 그가 이동하는 곳은 바로 늘씬한 여자 마네킹이 있는 곳이다. 금형의 남은 발 하나는 가면의 손이 되어, 그렇게 가면은 마네킹의 맨 살을 애무한다. 이때 재미있는 것은 관객에게 그 두 가지가 모두 체감된다는 점이다. 시커멓고 흐물흐물한 몸뚱어리로 여성을 탐하는 흰 얼굴의 신체가 영락없이 눈앞을 부유하는가 하면, 저것이 금형의 거꾸로 누인 몸이며 애무하는 주체는 결국 그의 눈 없는 발임이 끝없이 상기되기도 하는 것. 마치 안경을 맞추러 가 도수에 맞게 렌즈를 갈아 끼울 때처럼, 이게 더 잘 보이세요 저게 더 잘 보이세요, 하는 나긋한 물음 너머로 관객의 시선이 계속해서 필터를 갈며, 사람과 사물 사이 생(生)의 흐름을 좇고 있었다.

바닥에 누인 마네킹은 몸통과 다리 부분이 분리되었다. 가면의 손[금형의 발]이 슬그머니 마네킹의 몸통 아래쪽을 만지기 시작한다. 두 개의 (가짜) 몸이 한껏 달아오른다. 마네킹의 다리 부분에는 남성의 성기처럼 돌출된 것이 있어 그것으로 몸통의 구멍과 연결이 되는데, 이제 무아지경에 다다른 가면이 마네킹의 다리를 들고 몸통에 그것을 끼우며 한바탕 정사를 펼친다. 절정에 이를 때까지. 피식거리던 관객들이 어느덧 자기도 몰래 얼굴을 붉힐 때까지.

금형은 검은 허물을 벗고 파란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번에는 한쪽 팔을 걷고 거기 흰 얼굴 가면을 끼운다. 그 팔로 땅을 짚은 채 다리를 뻗고 앉아서, 자신의 손가락을 그 얼굴의 부유하는 사지(四肢)로 삼고 해파리처럼 하늘하늘 물 속을 놀게 한다. 얼굴은 자유롭게 유영하며 금형의 몸 사이사이를 탐색한다. 이어 금형은 회색 후드티의 팔 부분을 다리에 끼워 입고, 얼굴이 나와야 할 부분, 곧 자신의 사타구니에 해당하는 부분에 한 손으로 또 다른 가면을 댄다. 힘겹게 두 발을 딛고 일어서자 가면으로서는 물구나무를 한 셈이 되고, 그렇게 가면은 거꾸로 걸어 나와 전동칫솔을 연결해 이를 닦는다. (가면은 이를 닦지만 금형은 자위를 한다.) 후드티를 벗고 다시 팔을 걷어 아까의 얼굴을 끼운다. 무대 구석에 있던 멜로디언을 가져와 입으로 부는데, 멜로디언 호스 끄트머리에 한 마네킹의 얼굴이 끼워져 있어, 금형과 마네킹은 졸지에 키스를 하는 형국이 된다. 입과 입을 맞대어 불어넣는 키스의 숨으로, 해파리 얼굴이 사지를 놀려 음악을 연주한다. 그러다 까무러친다. 이번에는 금형의 몸 자체가 마네킹이 된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옷을 갈아입고, 커다란 청소기에 연결된 또 다른 마네킹의 얼굴을 손에 끼운 채 바닥에 눕는다. 청소기 얼굴이 금형을 자기 몸통에 태웠다가, 끌어내렸다가, 끌고 갔다가, 코드를 연결하고, 청소기를 작동시키고, 마침내 그 요란한 흡입력으로 그녀의 몸 곳곳을 빨아들인다. 검은 천을 씌운 한쪽 팔로 능란하게 그 얼굴에 온갖 성욕을 불어넣는 동시에 다른 한 쪽은 완전히 죽어 있는, 눈 감은 금형의 몸이 청소기에게 먹힌다. 심지어 다음 타자는 로봇청소기다. 바닥에 닿도록 길게 혀를 내밀고 있는 마네킹의 얼굴이 로봇청소기의 몸통에 연결되어 있고, 여전히 스스로 마네킹이기를 자처하는 금형이 그를 작동시킨 후 바닥에 눕는다. 로봇청소기는 (공연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번에는) 구석에 가서 자꾸만 처박힐 뿐 좀처럼 그의 제물을 먹으러 오지 못한다. 관객들이 웃는다. 기다리다 못한 금형이 일어나 그를 데려와 쓰레기통에 넣는다. 다시 옷을 벗는다. 이번에는 파란 천을 넓게 바닥에 펼친다. 파란 옷을 입고 천 사이에 누운 그녀가 위를 향해 몸을 돌리자, 돛단배 한 척이 그녀의 배 위를 너울댄다. 범선이 그녀의 몸 위를 항해하는 것과 그녀가 범선을 탐하는 일이 만나, 결국에는 큰 파도가 둘을 모두 덮쳐 사라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허물을 벗고 속옷만 입은 차림의 금형이 여행 가방 하나를 끌어와 거기 호스를 연결하고 펌프질을 한다. 무릎을 꿇고 앉아 온 몸의 반동으로 펌프질을 계속할 때, 그것 또한 섹스의 한 장면으로 화한다. 가방 뚜껑이 열릴락 말락, 그 안에 어떤 풍선 인형이 보일락 말락, 금형을, 우리를, 덮치러 나올락 말락. 이번에도 절정에서 금형은 멈추고, 푸쉬쉬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 들린다. 이상, 무엇에 대한 것인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일곱 가지 방법이었다.

 

 

정금형에게 섹스 혹은 자위는? 이라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답했다. 애초에 인형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인형 등의 오브제와 움직임 사이의 관계, 또 그 관계가 확장될 때 나타날 수 있는 형식적인 변형이 작업에서 주요했다고. 그런데 가령 그 인형에게 그토록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다면, 또는 사람이 되게 하고 싶다면 그 궁극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고. 예컨대 인형의 꿈은, 사람이 되고 싶은 궁극은 섹스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라는 의미심장한 함축에 대해, 나는 그 어떤 이론의 여지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딴에는 정말 그랬으니까. 대화 끝에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그렇다면 왜 애초에 인형에 관심이 갔던 것인지. 사람이 사람에게서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푸는 대체물로서의 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는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결국, 두 개의 욕구가 만나는 지점에 금형의 작업은 놓여 있었다. 말하자면 섹스와 자위, 그 사이에.

인형의 꿈은 사람이 되어 섹스를 하는 것일진대, 사람의 꿈은 인형과 더불어 하는 자위라는 아이러니. 그리고 그 둘은 모두 어떤 풍요로운 결핍을 담지한다. 예컨대 첫 장면에서 얼굴이 마네킹의 몸을 탐해도, 결국은 마네킹이 스스로의 물건을 스스로의 구멍에 꽂는 셈이므로, 섹스는 그 자체로 완성되지 못하고 여전한 자위의 층위에 남는다. 그러나 이때의 결핍은 단순한 아쉬움보다는, 섹스보다 강렬한 애무 자체가 남기는 짙은 만족감을 새겨준다. 그렇기에 금형은 사람의 몸과 더불어 춤추는 대신, 청소기를, 멜로디언을, 전동 칫솔을 동반자로 삼아, 자신의 몸을 마네킹처럼 뻣뻣이 굳히거나 혹은 가면의 일부로서 소멸시킨 후 기꺼이 사물들에게 내어주고 만다. 일곱 가지 방법이라는 표면적인 구획 너머에 무궁무진한, 형식과 감각의 향연이 셀 수 없는 잔뿌리처럼 쑹텅쑹텅 뻗어 나간다. 그 다채로운 변주가 이 공연의 힘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겹겹의 향유, 겹겹의 결핍, 그리고 겹겹의 시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금형의, 곧 사람의 몸이지만 관객의 시선에는 그 몸과 동시에 또 하나의 움직임이, 곧 인형의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포착된다. 차라리 단순히 편안하게 인형의 몸짓만을 시각적으로 따라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금형의 존재가, 그녀의 몸으로서 보았을 때는 전혀 편안해 보이지 않는 기이한 움직임들이, 감은 두 눈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관객의 시선과 배우의 감각 사이에서, 그리하여 나는 기분 좋게 불편했다. 신경 쓴다는 것, 그것은 우리를 깨어있게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동일하게 섹스가 꿈일지언정) 인형이 아니니까.

해서 너무나 섬세해 보였다고, 관객에게 보이는 이미지를 신경 쓰는 동시에 본인의 따로 노는 몸의 감각에도 충실하면서 공연을 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느냐고 질문했으나, 공연 내 긴장돼 있던 내 몸의 감각에게 무색할 만큼 그녀의 답변은 단순했다. 예컨대 팔로 물구나무를 서는 것보다 발로 그냥 그런 척하고 걷는 게 훨씬 쉽지 않겠느냐는 이야기. 물론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나, 뭐랄까 그녀를 꼭 닮은 그 덤덤한 답변이 무척 기분 좋게 홀가분했던 건 사실이다. 발로 걷지만 팔로 물구나무 서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나 스스로를 마네킹으로 전시하려는 목적성보다, 그저 눈을 감고 얼굴을 가리고 매 순간의 세밀한 감각에 충실하며 또 관객과 호흡하며 각 장면의[자위의] 가장 아름다운 타이밍을 찾아가는 것. 공연하는 시간 동안 오직 그녀의 몸과 정신에만 속해 있었을, 그 치열하고도 고요한, 평화로운 싸움이 내게는 부러웠고, 아득한 꿈 같았다. 그리고 나는 크레이그(Craig)의 초인형(Super-Marionnette)을 떠올렸다.

관객의 환호가 때에 따라 우뢰와 같은 수도 있고 빈약할 수도 있을 텐데, 인형들은 그런 사실을 개의치 않습니다. 그들이 서로 보여주는 태도에는 서두름이나 혼란스러움이 없어요. 누군가가 건네주는 꽃다발이나 벅차 오르는 애정 어린 표현에도 인형 프리마돈나의 얼굴은 늘 그렇듯이 엄숙하고 우아하며, 우리와는 어떤 거리를 유지한 채 담담합니다. 인형 속에는 천재적 재능 이상의 것, 능력을 과시하는 인물의 겉모습 이상의 무엇이 담겨 있습니다. 내게 인형은 지나간 문화가 지닌 고상하고 아름다운 예술의 마지막 여운과 같은 거예요.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 배우들을 초인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렇게 말하면서 사실은 배우더러 사라지라는 게 아니라 좀 제대로 하라고 부탁하고 있는) 크레이그의 이야기는 금형 자신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겠지만 동시에 그녀의 발과 팔에 연결된 각종 가면들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크레이그의 초인형은 오랜 옛날 사원에 있던 석상처럼, 놓여있음 만으로 엄청난 무게의 힘을 발하는, 신의 후예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금형의 가면들은 애초에 감정 없는 얼굴일 뿐 특정한 표정은 아니다. 그런데 그녀가 발을 움직이는 순간, 바닥을 기는 순간, 그 고정된 얼굴 속에 섬세하게 그려지는 표정이 깃든다. 그녀 자신도, 그녀의 몸에 기생하는 가면도, 그렇게 초인형의 숨결을 입는다. 그렇기에 그녀가 애용하는 마네킹들은 단순히 서구적인 마네킹의 느낌뿐 아니라 일종의 동양적인 기묘함마저 풍기게 된다. 그리고 인형은, 자기 스스로의 시선을 획득한다.

앞서 나는 이 공연에서 중요한 것을 관객의 시선과 퍼포머의 감각 사이의 교차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 세 번째 심급, 곧 인형 자신의 시선을 더해야 하겠다. 일전에 <비디오 카메라>에서 “주체의 나르시시즘보다 카메라의 시선이, 주체의 자위행위보다 카메라의 오르가즘이” 우선시되었듯, <7 ways>에서도 돌연 관객을 응시하는 것은 인형의 시선이 된다. 마치 카스텔루치의 전작 <신의 아들의 얼굴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그리스도의 거대한 얼굴이 똥을 싸는 아버지와 그 똥을 치우는 아들을 바라보던 동시에 지극히 불편하게도 관객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금형의 몸을 탐하던 그 얼굴들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들 때, 그리하여 관객 또한 망설인다. 섹스와 자위 사이에서, 나를 저것들에게 내어주고 싶은 욕망으로. 섹스라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이유는, 그 안에서 하나의 제스처가 단지 하나의 사유로 귀속되지 않고, 강력한 리비도의 힘으로 하여 모든 사유의 잠재성이 거기 쾌감으로 거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형의 꿈이 섹스인 것을, 우리는 비웃지 못하며, 다만 인형을 붙들고 그의 시선에 매여 자위할 밖에.

1447년에서 1452년 사이에 지어진 체제나의 말라테스티아나 도서관(Biblioteca Malatestiana)에는 수도승들이 필사를 하던 넓은 홀이 있는데, 그 고요한 홀의 커다란 문 위에는 코끼리가 조각되어 있다. 헌데 오디오 가이드가 그에 대해 제공해준 정보는 단지 “코끼리가 모기한테 강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뿐이었다.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사라지지 않았다. 모기가 왜? 여름에 모기가 많아서 수도승들이 괴로웠나? 아니면 필사 작업과 관련해 모기가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건가? 코끼리가 모기한테 강했다는 말의 뜻은? 코끼리가 모기를 잘 죽였나 아니면 모기한테 물려도 끄떡 없었나? 이탈리아어를 알아듣지 못해 더 이상 물어보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왠지 그들에게는 “모기가 왜?” 라는 의문 자체가 우스울 것 같은 묘한 기분에 휩싸여 나는 그저 질문을 삼켰다. 그리고 일요일 밤, 금형의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다시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레지던시로 돌아갈 짐을 꾸리고 있는 그녀를 기다리며, 극장 밖의 돌 의자에 앉아 나는 모기를 잡고 있었다. 무엇을 지키는지 모르는 채로, 코끼리처럼. 어느 소설에선가 코끼리는 임신기간이 2년이나 된다는 이야길 접한 적이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코끼리를 부러워하며 엉엉 울었다. 섹스이든 자위든, 코끼리든 인형이든, 무언가 다른 몸을 빌리고픈 이상한 욕구에 대해 생각했다. 그 밤, 어쩌면 지키고 싶었던 건 그 욕구였는지도.

 

*사진출처_이운식 woonshi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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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언빵(indie-n-braod)은 해외에서 보내온 인디언밥 필자들의 소식을 다루는 코너입니다. 이번에는 2013년 Festival Màntica 에서상연했던 정금형의 <7 ways>에 대한 공연 리뷰를 게재합니다. “인디언빵” 은 해외 체류의 경험과 사례를 가지고 한국의 독립예술과 소통을 모색하는 공간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와 관심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