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6. 11:06ㆍReview
2013 인천 아트플랫폼 페스티벌 & 오픈스튜디오
아트 구락부 Art Club
글_ 성지은
2013년 10월 26일 토요일. 날씨: 맑은 가을
서울에서 지하철로 1시간 반을 달려 마지막 역인 인천역에 내렸다. 큰 도시의 이름을 달고 있는 이 역은 이름과는 다르게 지방의 자그마한 기차역 느낌이었다. 커다란 종이박스에 술과 과자를 잔뜩 넣어 짊어지고 가는 대학생 무리가 함께 내렸다. 어린 아이 둘의 손을 잡고 걸음을 재촉하는 젊은 엄마도 있었다. 데이트를 나온 듯한 풋풋한 커플이 간간히 보였다. 홀로 뻘쭘하게 역의 하나뿐인 입구로 빠져나오니 차이나타운을 알리는 커다란 문이 보였다. 마치 100살 쯤 먹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이제 막 만들어진, 뻥쟁이 문이었다. 주위에는 벤뎅이 거리도 있었고, 중국요리집과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 하지만 차이나타운이라는 이름과 날씨 좋은 주말이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한가해보였다. 이 하늘 좋은 가을날, 인천역 근방에 위치한 인천 아트플랫폼(http://http://www.inartplatform.kr//)에서는 인천 아트플랫폼 페스티벌&오픈스튜디오 <인천 아트 구락부>가 열리고 있었다.
인천역에서부터 차이나타운 쪽 길을 따라 가면 왼편에 신기하게 생긴 건물이 보인다. 이것이 인천 아트플랫폼이다. 이 날은 차이나타운에서도 축제가 열리고 있었는지, 아트플랫폼 바로 옆 한중문화원 앞 마당에서 중국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중국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아트플랫폼은 여러 개의 컨테이너 박스처럼 생긴 네모난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한가운데 천막에서는 페스티벌을 안내하는 사람들이 지도를 나눠주고 있었다. 받아든 지도를 보니 이번 행사의 기획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지리적으로는 인천역에서부터 동인천역까지, 물리적으로는 전시장에서 카페, 작업실, 식당 그리고 옛 역사유적들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참여 공간뿐만 아니라 프로그램도 방대했는데, 오픈스튜디오와 투어에서부터 지난 레지던시 입주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 현 입주 작가들이 기획한 여러 이벤트들, 그리고 시민참여 UCC 동영상 공모전까지 다채로웠다.
이렇게 많은 프로그램을 구석구석 찾아가보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줄도 모르고 털레털레 찾아가 둘러보았기 때문에, 이 글은 내가 경험한 단편적인 ‘아트 구락부’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인천이라는 공간에 번쩍 하고 나타났다 사라진 이 예술 구락부, 그러니까 ‘예술 클럽’이 어떠했는지 스치듯 살펴보자.
▲ 백인태 작가의 작업
레지던시에 입주한 작가들의 스튜디오를 구경하고 작품을 엿볼 수 있는 ‘오픈스튜디오’는 총 3층의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마치 이 곳 저 곳을 탐방하는 보물찾기와도 같은 일이었다. 세 평 남짓한 천장이 높은 방에서 작가들은 먹고 자고 놀고 일하며 작품을 만든다. 인천 아트 플랫폼에서는 시각예술뿐만 아니라 연극 부분이나 비평가들도 레지던시 작가로 선정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분야 안에서도 다양한 장르를 볼 수 있다.
우선, 백인태 작가는 ‘말’을 가지고 노는 미술작가이다. 미술에서 이미지가 아닌 ‘감각’을 포착해내고 불러일으키는 일이 중요하게 된 지 오래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얼마나 똑같이 그렸느냐가 아니라, 찰나에 파고드는 감각을 어떻게 눈에 보이게 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소재와 방식으로 이를 시도했다. 백인태 작가는 그 중 ‘말’과 단순한 이미지를 선택한다. “자아실현 자아실연” “네가 바지에 똥을 싸도 난 널 응원할게”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말을 대충 휘갈긴 것 같은 종이쪼가리들이 스튜디오 이 곳 저 곳에 걸려있다. 이것들은 웃프다. 나를 위로하는 것인지 조롱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치부를 정확히 꼬집어 거침없이 말해주기 때문에 아이러니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르겠다. 축 쳐진 어깨를 탁 치며 “똥 싸고 앉았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 (위) 백인태 작가의 '말' 작업
(아래) 실비아와 슈테판의 작업
외국 작가들인 실비아 빈클러와 슈테판 커페르 역시 ‘말’을 가지고 논다. 이들은 인천에서 여러모로 ‘핫’한 도시인 송도를 주제로 노래를 만들었다. 이름하야 송도쏭 Songdo Song. 짐짓 엄격한 분위기를 잡고 있는 이들의 작업도 풍자를 숨기고 있다. 송도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회경제적 현상들을 노래 가사라는 잘 만들어진 형식 안에 담아낸다. 또 다른 외국 작가인 인스턴트 커피의 작업에서도 ‘말’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은 ‘drink more’와 같은 문구를 이용하여 사회 기저에 깔린 보이지 않는 이해관계와 목적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이들의 작업은 말 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전시장이나 작업실이 아닌 공공 장소와 같은 영역이 오히려 그들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전시장이 아닌 외부의 오픈된 공간이 작업 영역인 것은 차지량 작가 작업의 특징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작가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개인’이다. ‘동시대 시스템의 고립을 겨냥하는 개인’, ‘시스템에 상상력을 제안하는 개인’처럼 차지량 작가의 작업은 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면 이 작가에게 ‘바깥’이라는 것은 그저 하나의 배경일 뿐이며, 작업실이나 전시장 안의 CG로 대체되어도 무방해 보인다. 하지만 작가의 ‘개인’은 ‘바깥’을 배경으로 하여 지극히 개인적인 몸짓과 손짓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끌어낸다.
박혜민 작가의 작업 역시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차이점은 공공과 함께 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딴 HPARK 여행사를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다. 이 여행사는 중국의 ‘쑤이’, 인도의 ‘씨올라’ 지역을 주로 탐방한다. 팜플렛을 보면 있을 건 다 있는 투어 프로그램이다. 맛난 것도 보고 전통 공연도 보고 신기한 유적지도 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가상’이라는 것이 함정. 게다가 이 모든 것이 한국의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실재’라는 것이 또 한 번 함정. 유쾌발랄한 이 작업은 그렇게 전시실 밖 길거리에서 가상이자 실재하는 이국문화들을 발견할 때 완성된다.
▲ 김원화 작가 오픈스튜디오 모습
▲ 최성록 작가 개인전 리플렛
인천 아트 플랫폼에는 다양한 방식의 ‘참여형’ 미술뿐만 아니라 우주적 상상력과 특유의 치밀함으로 하나의 미래를 구현해내는 김원화 작가, 내밀하고 증폭하는 드로잉을 그리는 이주리 작가, 애니메이션과 드로잉, 설치 등 여러 가지 기법을 통해 하나의 만화와도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말을 거는 최성록 작가 등이 있다. 이들이 오픈스튜디오를 통해 자신의 작업을 보여주는 방식 역시 다양했다. 백인태 작가는 ‘초상화 그려주기’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머리는 500원, 몸통은 500원 이런 식이었다. 박혜민 작가는 특유의 투어 프로그램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했고, 그의 스튜디오에는 그럴듯한 투어 설명서가 놓여 있었다. 무대미술가인 신승렬은 자신이 만든 무대 세트 모형이나 하나의 연극에 대한 이미지로서의 설치 작품들, 그리고 자신이 쓰는 도구들을 전시해서 자기 세계를 다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오픈 스튜디오에서는 구석구석 숨겨진 보물을 찾듯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 작품을 보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나서 옥인콜렉티브(http://okinokin.tumblr.com/)의 상영회에서 <서울 데카당스>를 보고, <재난과 웃음, 긴박한 우회>라는 대화를 들었다. 옥인콜렉티브는 지금은 없어진 옥인아파트에서부터 시작하여, 개발과 발전의 논리 때문에 없어진 것들을 말하고 기억하는 작업을 한다. <서울 데카당스>는 2013년 만들어진 영상 작품으로 북한 트위터 계정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박정근 씨, p와 연기지도자가 등장한다. 연기지도자는 p에게 어떻게 하면 재판정에서 설득력 있(어 보이)는 진술을 할 수 있는지 가르친다. 약 50분 동안 진행된 이 영상 작업에서 p는 지도에 따라 말투를 고치고 눈빛을 움직이고 넥타이를 매며 변화를 보인다. 담담하게 흘러가는 이 영상을 다 보고 나면, 하나의 사실 그리고 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조종’에 취약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 <서울 데카당스> (2013) 스틸컷
인천의 ‘아트 구락부’는 이렇게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그 안에는 아트플랫폼이 ‘인천’을 대표하는 예술기관으로서 자리 잡고자 하는 의지가 보였다. ‘클럽’의 옛날 말인 ‘구락부’는 일찍이 개항장이었고 그 덕에 특유의 ‘모던’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인천의 역사적 맥락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이 행사가 단지 아트플랫폼이 위치한 공간과 시간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른 문화예술 공간과 시간으로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인천이라는 지역을 예술 클럽으로 만들어준다.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과 역사적 특성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고 또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고무할 만한 일이다. 모든 것이 서울-집중적인 예술계의 상황에서 서울 외 지역의 이름을 건 레지던시는 어쩔 수 없이 어떠한 책무를 부여받게 된다. 그 지역 예술계에 대한 책임과 의무이다. 인천 아트 플랫폼은 이러한 점을 충분히(?) 주지하고 있는 듯했다. 이번 오픈스튜디오를 페스티벌의 형식으로 가져가면서 주위의 문화예술공간까지 아우르고자 한 점이 그러하다. 입주한 작가들 중 ‘참여형’ 미술작업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 또한 아트 플랫폼 측의 (무)의식을 엿볼 수 있는 점이다. 인천을 대표하는 레지던시로서 기억되기 위해서는 ‘인천’이라는 지역, 그리고 그 지역을 살아가는 ‘사람’을 계속해서 이끌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과를 잘 그리는 작업보다는 지역 주민들과 사과를 깎아먹는 작업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튼튼한 재료와 여건에도 불구하고 아트플랫폼은 아직 인천 예술계의 대표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양한 방식의 참여형 미술작가들이나 레지던시 입주 예술가들에게 인천은 아직 작업의 주요한 지점이나 소재가 아니다. 물론 인천의 지역이나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재로 하는 작업도 있지만, 지역과의 긴밀한 연계가 눈에 띄지는 않는다. 아트플랫폼이 좀 더 지역을 향해 있고, 그래서 항상 문을 오픈해 두고 있다면 인천이 또 하나의 고유한 예술계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다만 바람일 뿐일까.
열려있는 스튜디오를 방문하던 중 어떤 해프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행사가 열리기 전, 누군가가 익명으로 입주 작가들과 기관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단다. ‘아트 구락부’가 아닌 ‘아트 구라부’라는 도장을 찍은 그 편지에는 예술을 길러내야 할 곳인 레지던시가 일종의 권력 기관으로 변해버린 점을 비판하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발신인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가히 전통적이면서 진정성 있는 발언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아트플랫폼은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들이 오픈한 스튜디오는 진정 누구를 위해서 오픈한 것일까? 입주 작가들, 인천 주민, 기관장, 한국 예술계, 일반 시민. 아트플랫폼이 이 익명의 비판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만 그 대답이 바깥을 향해 열려있는 대답이었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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