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24. 14:33ㆍReview
자연에서 발견한 춤의 원리
바리나모의 <누구나 부는 노래>
인디아트홀 공
글_김태희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겨울날 영등포 기계상가를 가로지르는 건 생각보다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는 상가를 따라 가며 굴뚝이 높게 솟은 건물을 찾았다. 여전히 기계음 윙윙 울리는 공장 한편에 밝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곳 ‘인디아트홀 공’에 들어서니 공간을 메우고 있던 온기가 관객들을 따뜻하게 감쌌다. 무대엔 전시장의 미술품처럼 모양도 형태도 크기도 다른 의자가 여럿 의도된 방향으로 놓여있었다. 관객들이 쭈뼛쭈뼛 하며 하나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추운 날씨에 몸을 잔뜩 움츠린 사람들 사이로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고, “뎅~” 맑은 풍경소리가 잠시 동안의 정적을 깼다. 출연진 중 한 사람이 공연 전 관객에게 부탁을 건넸다. 풍경소리가 울릴 때마다 다른 의자로 자리를 옮겨달라고. 관람자는 의자에 푹 눌러앉아 상황을 관조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언제 울릴지 모르는 풍경소리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누구나 바람을 갖고 있다
관객의 모든 눈이 정 가운데로 모이고, 한 쌍의 남녀가 곱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바닥은 울퉁불퉁하고 차가웠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포근했다. 남자가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막한 가운데 아주 작은 호흡소리와 의자의 삐걱거림이 음악이 되어줬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은 관객들 사이사이로 빠져나가 남자의 몸속으로 들이쳤다. 점점 커지는 움직임은 더 많은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관람객들은 자유롭게 공간을 유영하는 공연자의 발자취를 추적하듯 따라갔다. 코앞에서 무용수가 움직이는 좁은 공간이다 보니 상체와 하체 동작의 조화로움이나 플로우(flow)가 아니라 무용수의 표정, 손끝, 발끝, 횡격막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높은 무대와 이를 일방적으로 관찰할 수밖에 없는 극장이 아닌, 객석에 자리한 관객마저 공연의 일부가 되는 환경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움직임은 느렸고 변화는 적었다. 시각적으로 화려한 것에 끌리고, 변화는 빠를수록 선호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공연자뿐 아니라 다른 관객의 표정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조명은 밝았는데, 누군가는 졸고 있었고, 누군가는 멍하니 다른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난해한 무용공연이 펼쳐지는 어느 극장의, 어둠 속에 가려져 있는 관객들의 표정이 이랬을 것이라 생각하니 웃음이 삐져나왔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그 움직임의 출처가 애매해질 때쯤 남자가 변화를 꾀했다. 무대 한구석으로 걸어가 아늑한 조명에 불을 밝히고 작은 리코더를 들었다. 입으로 바람을 밀어 소리를 내더니, 다시 바람을 당겨 소리를 만든다. 자연을 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장애물 하나 없는 넓은 들판에 아주 세게 부는 바람과 같은….
그리곤 커튼을 쳐서 빛을 차단했다. 조명까지 내리고 나니 한구석의 난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만 남았다. 어둠 속에서 여자는 공중에 매달린 전선에 하나씩 하나씩 전구를 매달았다. 조명이 들어오자 매달린 빛이 흔들렸다. 전구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음영이 지고,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다 안 보이다 아른아른해졌다. 어둠속을 밝힌 빛에 모두가 주목하고 있을 때, 남자는 한쪽에 서서 바싹 마른 낙엽을 떨어뜨렸다. “후두둑”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에 빛이 번졌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몸풍경 ; 자연이 아닌 몸으로 그리다
바람과 공기, 자연으로 하여금 공연자가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끝나자 공간의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됐다. 바람이 불어 남자가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숨을 내쉬고 공간을 가로지르고 전선줄을 흔들고 악기로 소리를 냄으로써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두 사람이 그리는 움직임의 변화가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매달린 전구를 손으로 흔들어서 바람과 빛과 어둠을 만들었다. 일정한 타이밍에 따라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닌 관람자들도 그 흐름의 생성에 함께 했다.
주제나 감정, 사유, 철학 없이 춤예술이 가능할 수 있을까? 흔히 춤을 인간의 표현방법이나 표현예술이라고만 여겨왔다면, 바리나모의 춤은 그 생각을 뒤집는 것이다. 이들에게 움직임은 상상하는 세계를 빚는 과정이자 수단이라 하겠다. “나무가 춤을 추면/바람이 불고/나무가 잠잠하면/바람도 자오”라 했던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춤을 추니 바람이 불었고 춤이 어우러져 풍경을 만들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미 자연에 있던 것을 끌어내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몸풍경’이라는 독특한 작업을 행하고 있는 바리나모는 무용가 출신으로 제주에 거주하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제주도의 바람에서 영감을 받아 2013년부터 시작한 이 작업은 처마 끝에서 흔들리는 ‘풍경’과 자연 ‘풍경’을 아우르는 개념이라고 덧붙였다. 1시간 남짓의 공연을 보고 난 실제적인 소감을 정리하자면 <누구나 부는 노래>는 공연예술보다 동작치료에 가깝다는 것이다. 맑은 소리를 내는 풍경의 흔들림처럼 공연자의 움직임을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듯한 체험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새카매지는 두 사람의 양말과 훌쩍이는 사람들의 모습, 풍경(landscape)을 떠올리기엔 사실 너무도 삭막한 인디아트홀 공에서 이 작품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볕 좋은, 널찍한 들판에서 이들이 일으키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껴볼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관람자도 함께 즐기면서 온전히 자연을 체감할 수 있는 그런 날 말이다.
*사진제공_바리나모
**바리나모 페이스북 페이지>> www.facebook.com/bariandnamo
필자_김태희 (brunch.co.kr/@taeheekim) 소개_여러 장르에 기웃거립니다. 열심히 쓰다보면 언젠가 되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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