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8. 16:31ㆍReview
균열을 일으킬 손님을 기다리며
NEWStage 선정작 <손님들>
연출 김정(고연옥 작)
글_황지윤
부모를 토막 살인하고 이를 비닐봉지에 담아 유기한 스무 살 청년이 있었다. 2000년 한국에서 실제 벌어진 살인사건이다. 연극 <손님들>은 이 충격적 실화를 배경으로 삼는다. 소년은 부모로부터 장기간 학대를 당했다. 소년이 아동학대 피해자라는 사실이 그의 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아동학대 피해자라는 사실을 결코 제쳐놓을 수 없다. 벌어진 참극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연극 <손님들>은 이 점에 착안해 극을 풀어나간다. 소년이 부모를 살해한 후의 시점에서 소년의 하루를 되짚어 본다. 부모를 살해한 후 다시 부모와 함께 보내는 기이한 하루다. 극은 가상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소년의 입장에 서본다. 마치 그가 여태 살아오며 느꼈던 고통과 절망을 이해해보겠다고 말하는 듯하다. 관객은 ‘손님’이 되어 소년의 세계로 초대받는다.
기이한 하루의 시작
막이 오르고 하루가 시작된다. 아침상을 차리고 부모를 깨우는 것부터다. 소년은 흰 플라스틱 식기를 요란스럽게 들었다 놓았다 하며 무대 정중앙에 놓인 식탁 주변을 분주하게 오간다. 무대 좌측에는 소년의 아버지가 관객을 등 진 채 의자에 앉아있다. 무대 우측에는 소년의 어머니가 측면으로 앉아있다. 아침을 먹으라는 소년의 부름에도 둘 다 한참 묵묵부답이다. 무대 양 끝에 위치한 부모의 물리적 거리감을 가운데서 어떻게든 좁혀보려는 소년의 시도가 눈물겹다.
부모와 아들이 겨우 한 식탁에 앉았지만 훈훈한 가족애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으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은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다. 서로 말꼬리를 잡고 트집을 잡는 것은 예사다. 몇 번이고 반복해 낡은 레퍼토리가 되었을 법한 부모의 한 맺힌 과거가 갈등의 골을 더욱 키운다. 불똥이 되레 소년에게 튀기도 한다.
소년이 정성스레 차린 밥을 물에 말아 허겁지겁 먹는 아버지와 밥 대신 시리얼을 먹겠다는 어머니의 행동은 버릇없는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과장되게 표현된다. 행동으로만 보아선 누가 아이고 누가 어른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 편의 부조리극과 같은 과장된 행동에 인상이 찌푸려지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에서 소년은 오히려 희망을 본다. 오랜 기간 학대에 시달린 소년의 기대치는 높지 않다. 모두가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고 자신이 부모의 말다툼을 어느 정도 중재했으니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다며 기뻐한다. 그리고 부모에게 말한다. 곧 손님들이 올 예정이라고.
길 위의 신, 손님들의 방문
손님들의 방문으로 무대 공간을 답답하게 옥죄던 한 가정의 비극으로부터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긴다. ‘3단지’로 불리는 길고양이, 온몸이 낙서로 얼룩진 초등학교의 동상 ‘오뎅’, 그리고 공동묘지에 사는 ‘동수 아저씨’가 차례로 등장한다. 소년이 초대한 손님들은 타인으로부터 버림받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이자 조롱과 멸시에 익숙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무대에 난입해 익살스러운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가족의 갈등으로 팽팽하게 고조된 무대 위의 긴장이 손님들의 난입으로 누그러지며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관객들은 화려한 몸놀림이 버무려진 3단지 길고양이의 기구한 서사를 들으며 소년의 비극으로부터 잠시 멀어질 기회를 얻는다. 소년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버림받은 이들을 길 위에서 마주하며 연민과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들을 벗으로 삼으며 느낀 찰나의 위안이 자신의 처지를 잠시 잊을 수 있는 숨구멍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연옥 작가가 말하듯, 이들은 소년에게만큼은 ‘길 위의 신(神)’이었던 셈이다.
소년은 집에서 손님을 맞은 기억이 없다. 누군가에게 보일 만한 가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손님을 집으로 부르지 않은 탓이다. 소년이 손님을 초대한 이유는 간단하다. 손님이 오는 집이라면, 누군가에게 보일 수 있는 가족이라면 조금은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소년은 그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을 ‘길 위의 신’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깨트릴 수 없는 폭력과 불화의 세계에 균열을 내고자 한다.
살인, 반복되는 하루 그리고 행복
손님들은 극 중 긴장과 이완의 완급을 적절히 조절한다. 이들의 방문은 내용적이기보다 기능적이다. 화해와 용서의 세계로 도약하기 위해 초청한 낯선 타자들이 극적 긴장을 풀고 일시적인 위로를 제공하는 것에 그치는 점은 아쉽다. 배우들이 한데 얽혀 춤을 추고 난 뒤 손님들은 조용히 무대 위를 떠난다. 손님들이 황망히 떠난 자리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소년의 세계가 고스란히 남는다.
손님들이 떠난 후 극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무대 한가운데 놓인 책상이 뒤집혀 책상 면이 관객을 향한다. 책상은 벽이 되고 부모는 관객을 등진 채 벽을 응시하며 앉아 있다. 학대의 경험을 열거하는 소년을 오히려 이상한 아이 취급한다. 자신의 잘못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부모의 철면피한 모습에 소년은 절망하고 분개한다. 관객들은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부모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그들의 표정을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절묘한 연출이다. 가해자의 뻔뻔함과 피해자의 절망이 결코 얼굴을 보이지 않는 부모의 ‘뒷모습’에 응축돼 있다.
그리하여 소년은 도끼를 든다. 살해한 부모를 다시금 도끼로 내리 찍는다. 그리고 다시 아침을 맞이한다. 오늘은 좀 더 나아질 것이라 되뇌며 분주히 아침을 준비한다. 소년은 하루를 무한히 반복할 것이다. 소년은 이를 행복을 찾는 과정이라 말한다.
행복을 찾기 위한 소년의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읽어내고 싶지만 쉽지가 않다. 무한한 반복 속에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소년의 주문이 유효해 보일 수 있는 단초를 찾기 어렵기 때문은 아닐까. 손님들과의 만남 또는 소녀와의 관계를 통해 소년이 벗어나고자 하는 폭력의 세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을 찰나적이더라도 보다 두드러지게 그려냈으면 어땠을까. 소년이 복수와 원한의 지난한 굴레에 갇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긁히지 않음에 대해
김정 연출은 인터뷰에서 “연극을 통해 뭔가 긁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한다. 안전하지 않은 삶을 환기함으로써 관객에게 불편을 주겠다는 의미다. 그는 감정의 “강렬한 진폭”을 일으키고 싶다고도 한다. 그러나 파격적인 소재에 비해 연극은 비교적 안전하다. 탄탄하고 균형감 있는 연출 덕에 극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진행되지만 이는 파격을 꾀하지 않는 익숙함이기도 하다.
칼날이 스쳐 지나갔으나 특별히 긁힌 곳이 없다고 해야 할까. 살인을 저지른 소년의 입장에서 그의 아픔을 살피는 다소 불편할 수 있는 작업이 큰 감정 소모를 일으키지 않는 점 또한 흥미롭다. 극은 소년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심리 묘사에 치우치자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소년의 모호한 위치가 구획되고 만다. 소년은 피해자이자 연민의 대상으로 한정된다.
이는 극적 세계의 확장을 방해하기도 한다. 다양한 비유로 확장될 여지가 있는 부모와 자식, 어른과 아이, 가해자(피해자)와 피해자(가해자)의 관계가 한 가족의 처참한 비극으로만 제한돼 아쉬움이 남는다. 소년이 ‘손님들’을 초대함으로써 균열을 기대하듯, 의도치 않게 닫혀버린 극적 세계에 균열과 틈이 일기를 기대한다.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 것은 관객의 몫이기도 하나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는 것은 결국 공연과 연출이다. 벌어진 틈을 통해 무대 위의 세계가 확장되고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해 좀 더 ‘긁힌’ 상태로 극장을 나설 수 있기를 희망한다.
※본 리뷰는 ‘뉴스테이지(NEWStage : 서울문화재단 유망예술지원사업 연극분야)'의 공연에 대한 젊은 필자들의 비평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진제공_서울문화재단
필자_황지윤 소개_연극을 보러 다니는 철학도입니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무한한 애정을 품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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