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8. 16:15ㆍReview
우리 잘 살고 있는 걸까
NEWStage 선정작 <전화벨이 울린다>
작/연출_이연주
글_박민희
서울시에서 120 다산 콜센터 민원서비스가 처음 실시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술자리의 흥에 취해 ‘5분만 더, 5분만 더’ 하다가 부랴부랴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서 어김없이 120을 누르곤 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의 막차 시간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주변의 공중화장실을 찾기 위해 전화를 걸었던 적도 있었다. 대부분 밤 늦은 시각이었다.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는 120 다산 콜센터가 정식 오픈한 지 10년이 지났다. 어리고 철없던 시절 365일 24시간 전화 상담이 가능한 서비스는 참 신기하고 편리했다. 이후 스마트폰의 다양한 앱을 통해 필요한 정보 대부분을 스스로 찾아보게 되었고 그렇게 120은 점점 잊혀졌다. 서울사람들의 120 외에도 전화상담 서비스는 우리의 일상이다. 이동통신 사용을 비롯한 공과금 납부, 홈쇼핑 등과 관련해 발생하는 의문을 가장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 더불어 상담원들은 언제나 친절하다.
연극 <전화벨이 울린다>는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의 인격적 존재를 예민하게 일깨워 준다. 무엇보다 콜센터 노동현장의 실감나는 재현은 보는 이들에게 그 현장을 직접 체험한 것과 같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콜센터 본부장과 센터장이 등장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기업이 어떠한 표정과 언어로 직원들을 통제하고 원하는 바를 충족하는지 직관적으로 깨닫게 해준다. 특히 극중 가장 높은 직책의 본부장은 명랑하고 해맑은 느낌으로 등장만으로도 사람들의 웃음을 유발했다. 그는 언제나 긍정적이고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주었고 직원들에게 자부심을 북돋는 한편 언제든지 회사를 믿고 의지하라는 호소를 서슴없이 한다. 물론 위선이다. 그에게 직원 개개인은 필요가 없어지면 교체하거나 버려도 되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콜센터 직원들은 하나의 조직에 소속된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목적의식적으로 적응하며 규칙을 따르고 월급을 더 많이 받는 보상에 만족하며 회사의 이해관계와 자신의 이해관계를 일치시켜 나간다. 반면 누군가는 적응하지 못해 고뇌한다. 적당히 윗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또 다른 길을 모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때 그때마다 분위기에 맞는 행동을 해서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기회주의적인 사람이 있다. 모두가 다른 개개의 인격체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 회사라는 조직에 모여 주어진 역할을 수행한다.
이 중에서도 회사에서 요구하는 역할에 적응하지 못해 내적 갈등을 겪는 김수진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일터와 일터를 벗어난 개인의 삶은 분리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는 관념일 뿐. 사람들은 크고 작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가고 이성과 감성은 연속적이기 때문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그 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그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지 않는가. 돈을 벌기 위해, 다르게 말하면 생존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고 연기를 해야하는 일상. 고시원에서 홀로 생활하며 콜센터에 출퇴근하는 수진의 삶은 콜센터 직원들과의 관계, 전화를 사이에 두고 만나는 익명의 고객들과의 관계 속에 놓여있다. 수진은 익명의 고객들에게 이유 없는 폭언을 들으며 악몽에 시달린다. 화를 참지 못하고, 억지 미소를 지을 수 없어 괴로워 한다. 콜센터 직원이라는 역할에 삶을 완전히 지배당한 그녀에게 인생은 어떤 의미일까? 그녀의 세상에 한줄기 희망은 무엇일까?
객석에 불이 켜지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꽤 많은 사람들이 코를 훌쩍이고 눈물을 닦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앞 뒤가 꽉 막힌 현실이 환기되어 먹먹한 생각이 들었다. 콜센터에 좀 더 잘 적응하기 위해 연기를 배우는 수진은 결국 자신의 진짜 감정과 무관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고 회사에서 성과를 낸다. 가면을 쓴 수진은 좀 더 행복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익명의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받은 부정적 감정들이 마음 속 어딘가에 고스란히 쌓여가고 있음이 드러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을 때 쌓였던 감정은 배설된다. 역시나 부당한 방법으로. 회사에 적응하기 위해 사비로 연기수업까지 받는 수진의 모습은 눈물겹다. 하지만 그 결과 자아를 상실한 채 이중적으로 변해가는 그녀의 모습은 섬뜩하다. 그렇다고 그 누가 수진의 인생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 대학로로 향할 때 큰 기대가 없었다. 사회적인 사건을 다루거나 정치적 발언을 짐작할 수 있는 작품들은 으레 설명적이어서 지루했던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전화벨이 울린다>에 대해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정보를 살펴본 후 ‘콜센터’라는 다소 생소한 노동현장을 배경으로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 갈지 작은 궁금함이 있었다. 연극이 끝난 후 좋은 작품을 만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연주 연출가의 실제 콜센터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리라. 장면 하나하나의 생생함과 섬세함이 독보였고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있었다. 무대 구성의 변화가 거의 없어 단조로운 느낌도 있었지만 등장인물의 감정 변화에 집중하기에 충분했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일품이다. 특히 극의 중간중간 등장했던 콜센터 직원들 모두의 음소거 연기는 실제로 음소거 장치가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극은 지루할 틈 없이 마지막을 향했고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관객들의 마음에 닿아 작고 큰 파동을 일으켰을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세상에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 그러나 이 문장들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가, 조직이, 인간관계가 모두 이를 부정하고 있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받았던 부당한 수모를 자신보다 더 낮은 지위의 사람에게 되갚으려 하는걸 자주 목격한다. 심지어 한 가족 내에서도 이 비극은 되풀이된다. 누가 대놓고 가르쳐주는 것도 아닌데, 사회생활을 통해 체득되는 것이다. 얼마나 야만적인 사회인가. 묻고 싶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우리 잘 살고 있는 걸까?
수많은 이중 잣대와 부조리,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질환과 분노조절장애의 ‘괴물’을 양산해내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개인은 한없이 나약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내가 겪은 부당함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스스로를 존중하며 건강하게 삶을 꾸려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해타산없이 사람과 사람이 관계 맺을 수 있는 일상은 얼마나 소중한가. 연극 <전화벨이 울린다>는 비정규직 여성 중에서도 감정노동자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며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면 야만적인 사회에서 조금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목적의식적으로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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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과 ‘콜센터’ 등의 키워드로 포털사이트를 검색한 결과 서울시의 ‘감정노동종사자 권리보호센터’ 신설 계획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지난 2014년부터 120 다산 콜센터 상담원들에게 성희롱 등 위법한 행위를 한 경우 경고없이 바로 법적인 처벌이나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가 시행되어 92.5%의 악성 민원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었다는 기사도 접했다. 콜센터 상담원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쉼터 조성과 정신상담 등의 회사 내 복지가 전국의 더 많은 감정노동현장으로 확대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본 리뷰는 ‘뉴스테이지(NEWStage : 서울문화재단 유망예술지원사업 연극분야)'의 공연에 대한 젊은 필자들의 비평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진제공_서울문화재단
필자_박민희 소개_한 명의 관객으로서 예술작품을 관람하고 이에 대한 글쓰기를 통해 그 가치를 나누는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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