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2월 레터] n년 전 오늘

2017. 2. 14. 00:07Letter

▲레이몬드 브릭스의 <바람이 불 때에> 중 한 페이지

 

 

n년 전 오늘

 

사는 것이 얼마나 불만투성이면서 속시원한 것이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페이스북의 ‘내 추억 보기’의 ‘2년 전 오늘’에서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 칼럼을 보고 또 그랬습니다. 2년 전 2월 이 글이 화제가 되었을 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페미니즘을 두고 찬반과 논란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웃기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무겁고 처지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때보다 지금 더 잘 말할 수 있고 잘 화낼 수 있다는 건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상냥해지려고 하지 않고, 언짢음 불쾌함 하나도안웃김을 숨기지 않고, 거절하고, 동의하지 않고. 이 당연한 걸 그동안 하지 못하거나 주저하면서 했다는 것을 신기해하고. 지금 생긴 무엇보다 큰 힘은 목소리를 나누는 데서 오는 것 같습니다. 말하지 못해 갑갑했던 감정과 생각의 타래를 명쾌한 문장으로 정리해내고, 편들어 말을 보태주고, 맞는 소리를 또렷하게 해내는 목소리.

인디언밥에서도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조금 더 선명한 목소리로 전하려 합니다. 새로운 웹툰 ‘반벌거숭이여자사람숭숭’에서는 머리카락 한 올을 걸치고 다니는 여성 숭숭과 도시의 삶을 들을 것입니다. 여성예술인연대가 걸음 딛는 곳도 볼 것이고, 꾸준히 이어질 페미니즘 작품의 리뷰도 만나려 합니다.

인디언밥이 재잘재잘 속살속살하는 말들이, 물론 그 자체로 좋은 창작이고 비평이었으면 하고, 나아가 동료를 불러 모으는 나직하고도 끊이지 않는 목소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많이들 만들고 보고 이야기하게끔, 또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이 밤이 깊지 않아도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할 수 있게끔. 확인해야 할 서로가 계곡의 조약돌처럼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도록. 사는 것이 얼마나 불만투성이면서 속시원하면서, 매일을 실망하다가도 내일의 용기를 얻는 일이 되었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추신

 

1) 편지를 쓰기가 너무 어려워서 (괜히 책상에 앉는 일이 으레 변질되듯이) 책을 정리하다가 (항상 책을 정리하는 일이 그렇게 흘러가듯이) 선 자리에서 레이몬드 브릭스의 <바람이 불 때에>을 다시 봤습니다. 전쟁을 미리 대비하다가 막상 맞닥뜨리는 두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적엔 몰랐는데 연극과 음악을 충동하는 이야기였고 과연 브릭스 본인이 쓴 희곡과 데이빗 보위가 쓴 동명의 곡 -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작품의 사운드트랙이기도 한 - 이 있어요.

옛날이 좋았다는 믿음은 여러 시기에 적용되어서 책의 두 주인공은 2차대전 시기를 그럴싸한 것으로 회상합니다. 기억은 쉽게 윤색되고 새로운 최악의 등장은 차악으로 밀려난 마이너스값의 과거를 멋대로 제곱해 플러스로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올해 기억할 작년은, 내년에 기억할 올해는 음수일까요 양수일까요 애초에 무리수일까요.

2) 여전히 편지를 다 쓰지 못하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X: 1990년대 한국미술> 전시를 보았습니다. 1990년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면은 노래방에서 이정현의 <와>와 S.E.S.의 <Dreams Come True>를 부르던 것인데, 전시장에서도 구십년대의 소리와 모습과 현상을 복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전시장 전면의 작업에서 읽은, 1996년 마이클 잭슨 내한에 관한 기사입니다. 당시 마이클 잭슨 내한은 그 가부를 두고 토론을 할 정도로 뜨거운 감자였는데 결론만 얘기하면 내한이 성사되어 마이클 잭슨은 서울에서 콘서트를 비롯해 이러저러한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공연이 없는 날 그는 어린이대공원에서 원숭이를 보고 (원래는 고릴라였던가 침팬지였던가를 보고 싶어했지만 없어서 원숭이를 봤다는 것도 기사에 적혀 있었습니다) 강남역 레코드샵에서 쇼핑을 하고 홍제동에 있는 송죽원에서 어린이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송죽원의 어린이들은 싸인도 해주고 사진도 함께 찍은 마이클 잭슨에게 답가로 영턱스클럽의 <정>을 불러주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 부분을 한참 읽고 또 읽었습니다. 찍찍이 운동화를 신은 아이들이 “다른 여자 생긴 거라면 혼자 있고 싶어서라면” 노래를 부르면 선글라스에 검은 양산에 멋있는 모자를 쓴 마이클 잭슨이… 어떻게 했을까요? 거기까진 기사에 쓰여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너무 비현실적인 장면을 상상하는 기분이라 좀 웃겼습니다. 그래서 전시장을 걸으면서 혼잣말로 “구십년대는 재밌다 뭐도 많고”라고 했다가, 이상한 말을 해버린 기분이 들었습니다. n년 전 오늘의 저는 이 순간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2017년 대보름

인디언밥 필자

김 송 요

 

 

▲ 서울시립미술관 SeMA Gold 《X : 1990년대 한국미술》 전시중 한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