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8월 레터] 여기저기에서 본 것들

2018. 9. 10. 08:30Letter

 

여기저기에서 본 것들

 

팔월에는 마음 먹은 대로 정동진독립영화제와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 참여했습니다. 정동진이 올해로 20, 프린지가 올해로 21회를 맞았으니 둘은 또래인 셈입니다. 독립예술이, 지역축제가 왕성하게 생겨나던 시기 만들어져 스무 번의 여름을 함께한 두 축제가 반갑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합니다.

정동진에서는 영화를 보기도 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스크린 너머로 기차가 지나가고, 하늘에는 별이 총총, 저편에선 바다 냄새가, 이편에선 쑥불 냄새가 나는 정동초등학교 교정에서 보내는 여름밤은 새로워도 익숙해도 좋습니다.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는 와중 정동진에도 열대야가 찾아올까 걱정이 컸지만, 저녁이 되자 기적적으로 날씨가 선선해졌습니다. 에어스크린을 철수해야 하는 월요일 새벽 큰 비가 내려 정리를 해야 하는 스태프와 자원활동가들이 고생스러웠을까 염려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축제 내내 비가 오지 않은 게 천운이구나 싶기도 했고요.

 

이번에는 원래 3회차 장편 상영이 없던 일요일까지 포함해 사흘 내내 장편을 틀었습니다. 일요일 장편으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상영함으로써 국내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추던 정동진의 전통에 약간의 변주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토요일 저녁 장편 상영작은 지금 개봉해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는 <어른도감>이었습니다. 내용은 비밀로(?) 하겠지만, 두 사람이 계단을 한참 올라가 본 밤하늘 장면 이야기는 꼭 하고 싶습니다. GV<어른도감>에 등장하는 이 밤하늘 장면이 정동진독립영화제를 왔다가 별이 총총 뜬 하늘을 보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스크린 가득 뜬 별들과 스크린 바깥의 밤하늘을 나란히 올려다보며 느꼈던 감정이 그 말에 다시금 새록 떠올라 벅찬 기분이 들었습니다.

 

땡그랑동전상이 역대 수상금액을 기록했고, 관객수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늘었습니다. 처음 정동진을 찾은 관객이 많은 것도 좋았지만은, GV시간 <어른도감>을 연출한 사람이 지지난 해 상영한 <수요기도회> 감독이라고 소개했을 때 '아아~ 그때 본 그 영화' 하고 기억하는 관객이 많았던 것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만큼 고정 관객이 생기고, 그 관객들이 기억하는 영화제의 시간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프린지에서는 역시나 인디스트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다른 참가자들도 사랑하지만 이만할 수는 없어요. 때로는 피로와 싸우고 때로는 무료함과 싸우지만 그럼에도 이상한 들뜸과 넘치는 기운이 함께하곤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디스트 운영 프로그램이 능동적으로 꾸려지는 모습도 보기 즐거웠습니다.

 

저는 올해에도 아카이브 전시해설을 맡아서 전시장을 돌았습니다. 축제 첫날과 이튿날엔 바람이 씽씽 불었습니다. 덕분에 시원해서 다행이기도 했지만 전시장으로선 낭패였습니다. 걸어둔 포스터며 꽂아둔 가이드북, 터널 안은 안전하겠거니 싶어 굄돌도 없이 놓아둔 역대 기념품이 바람에 씽씽 날아갔습니다. 부채도 놔두었는데 여기저기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뒷면에 예술가 선언을 적은 이전년도 돌부채였는데, 경기장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평면 돌이 굴러가는 모습이 무슨 르네 마그리트 작품 같아서 심각한데 웃겼습니다. 이것은 돌이 아니다.. 그런데 돌의 모양인데.. 부채여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바람에 날아간다.. 비어있는 경기장이 극장 노릇을 한다는 것도, 거기 흩날리는 프린지의 흔적들도 웃음을 터뜨리게 했습니다. 전시해설을 할 땐 농반진반으로, 이 섹션의 주목적은 주운 사람이 임자인 보물찾기 게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딱히 득템한 분은 없는 것 같지만 경기장을 구석구석 볼 작은 이유라도 만들어 드릴 수 있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다른 팀의 공연도 열심히 보았습니다. 처음 본 공연은 우주마인트프로젝트의 <아담스, 미스> 였는데, 자꾸만 마음이 술렁거리는 것을 꼭꼭 참고서야 다 볼 수 있었습니다. 빵을 얻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 빵은 알아서 얻어야 한다는 사람이 아니라 빵을 나눠주었던 사람을 다르게 기억하면서 살아온 역사, 빵과 생활과 성의 역사를 미시와 거시로 톺아보는 흐름에 스르륵 빨려들었습니다. 이곳저곳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데선 경기장을 쓰는 데 아주 선수가 되셨군!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원의 안과 밖>도 그러했는데, 검표원대기실에서 시작해 계단과 스카이박스 복도, 경기장 내부로 이어지는 동선이 그 자체로도 퍽 아름다웠습니다. 경비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던 아버지와 타지에서 창작을 하던 딸이 재회해 만든 이 공연은 사적인 서사와 픽션의 교차점 그리고 장소특정적으로 구현되는 이미지와 동작, 말이 주는 맛이 있었습니다. 잔디밭 스프링쿨러가 가동되는 타이밍에 관중석으로 들어섰습니다. 고요한 경기장에 쏟아지는 물줄기와 어룽거리는 무지개가 이상하리만치 찡한 감흥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을 볼 수 있다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매머드머메이드의 단식광대극도 즐겁게 보았습니다. 스카이박스가 방석 깔고 앉아 두런두런 옛날얘길 하고 듣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그 옛날얘기가 <맥베스>일 수 있다는 것도 좋았습니다. '마녀라고는 합니다만 사실 신비롭달지 미스터리한 존재입니다. 이 이야기는 미스터리한 존재를 만난 이후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지요' '숲을 강으로.. 이렇게 들으면 우리가 잘 알 수 없습니다만 말하자면 여기 상암에서 구리 정도의 거리일까요'하는 부분이 지금도 계속 생각나요. 완전히 씹어삼켜서 소화한 이야기는 어떻게 구연되는지 몸소 느끼는 시간 같았습니다.

 

미션스쿨에 입학한 스무 살 시절과 학교 밖으로 나온 지금, 덕후로서 걸어온 길과 여자로서 느끼는 딜레마나 당혹스러움을 꼼꼼한 연대기로 재기발랄 엮어낸 미아의 전시나 가임여성지도에 등록되는 젊은 여자로 살면서 겪는 바깥의 압력과 자가당착 사이 비좁은 틈을 이야기하는 재입학프로젝트의 연극도 보았습니다. 프로젝트40515분짜리 공연도, 혼자 노래하는 게 부끄럽다던 사람들이 누구보다 씩씩하게 소리를 내지르는 함께 노래한다면의 합창 공연도 보았지요. 프린지에서 큰 즐거움을 느낄 때가, 아티스트와 관객이 서로 만나는 것 자체로 쏟아져나오는 에너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특히 처음 소속된 커뮤니티를 벗어나 새로운 관객을 만나게 된 작품은 그만큼 부풀어오른 기운을 양껏 보여주는데, 그것이 언제고 마음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이번 프린지에선 그 기분을 꽤 여러 차례 느꼈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계속 이야기될 수 있을까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중년 남성에 대한 연민과 여성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위안, 성구매의 낭만화, 브로맨스며 남남케미라는 이름으로 소비되었으나 실상은 여성이 삭제된 서사였을 뿐인 이야기들을 2018년에 보는 것은 참 기묘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이것들이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까? 의문을 느꼈지요. 그러나 연극이 희곡과 그 자체로 동의어가 아닌 이상, '공연할 수 있을까'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템페스트>의 세 인물을 연기한 이정서프로젝트의 여성 배우들이 보여주었듯이요.

 

월말에는 타이베이에 갔습니다. 5회를 맞이한 타이완 퀴어필름페스티벌과 20회를 맞이한 (여기도!) 타이베이예술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퀴어필름페스티벌에서는 미국에서 온 <애프터 루이>와 프랑스에서 온 <키스해 줘!> 홍콩에서 온 <너를 보고 있으면 네가 더 그리워>를 보았습니다. 타이베이에서 타이중, 가오슝으로 이어지는 이번 타이완 퀴어페스티벌 기간 중엔 혼인평권 불법화 반대서명운동이 있었습니다. 광장마다 또 공원마다 무지개 깃발이 펄럭였습니다. 극장 안팎의 목소리가 공명하면서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타이베이예술제에선 제롬 벨의 <갈라>를 보았습니다. 이 공연은 서로 다른 연령대, 성별, 신체조건, 익숙한 춤이 다른 현지의 참가자들이 모여 만드는 갈라쇼의 형태입니다. 초반부터 갑자기 눈물이 나서 보깅을 보면서 철철 울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중력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너무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랬습니다. 이토록 모르는 사람들과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살아가고 있구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축제를 다니다가 한 달이 갔습니다. 더위가 가시고 가을이 찾아올 기미입니다. 가을의 크고 작은 즐거움도 얼른 발견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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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필자

김 송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