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11월 레터] 이번 달의 편지

 

이번 달의 편지

 

안녕하세요?

 

편지라고 하면서 언제나 뭉툭한 감상문 같은 것만 적어보낸 것 같아서 이번에는 정말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졌지요? 공기는 탁해졌고요. 바라던 바쁜 일은 찾아왔나요? 아니면, 끝났으면 했던 바쁜 일이 한숨 돌릴 만큼 마무리되었나요?

 

편지에는 어떤 이야기를 쓰면 좋을까요. 우선 최근에 어떤 말을 들었는지 또 어떤 글을 읽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주말엔 친구가 마라톤 대회에 나갔는데 구호를 '걸스 캔 두 애니띵'으로 정했다고, 그러니까 완주를 못해도 포기 역시 여자가 할 수 있는 거기 때문에 괜찮다는 말을 했습니다. 정말로 맞는 말이어서 정말로 재미가 있었어요읽은 것 중에 생각나는 것은 그보다 더 전에 읽은 케이트 디카밀로의 <내 친구 윈딕시>에 있던 '엄마를 생각하면 이가 빠진 자리에 혀를 대는 것 같'다는 문장이에요.


그러고 보니까 이번 달에는 벽에 걸린 이미지를 몇 보았네요지난 주말에는 상하이박물관에서 열린 미국근대미술전에 갔습니다. '테라 파운데이션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 작품'이라는 설명을 읽고 나서시카고의 소장작 중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있었는데.. 바로 그 작품인 에드워드 호퍼의 <밤 새는 사람들Nighthawks>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바로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호퍼의 작품이 벽 한 면을 제 것 삼아 우묵한 양감과 간색으로 칠한 감정을 내보이는 것이 주는 감흥이 각별하던 때가 있지요그러나 재능이 있는 아내 조세핀이 집에서 가만히 자신의 뒷바라지를 하도록 겁박했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에는그의 수많은 작품 속에서 적막과 나란히 앉아 있는 그 얼굴을 보는 마음이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다만 조지아 오키프나 메리 카사트의 인장이 또렷하게 박힌 작품을 오래간만에 본 것이 참 좋았습니다자주 옆의 작품과 어깨를 맞대고서 도란도란 대화를 주고받는 것 같은카사트의 <여름날Summertime>이 가진 호젓함을 모처럼 가만히 보았지요.


  

상하이사진센터에서는 애나 폭스와 캐런 노어의 전시를 보았습니다. 미국 가정의 보편적이면서도 특징적인 군상을 담은 애나 폭스의 연작과 캐런 노어의 우화와 'India Song' 시리즈를 바로 옆 방에 두고 갸웃거리며 보는 재미가 있었어요. 우화 시리즈에는 인간처럼 입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화 속 동물과 달리 인간이 쓰는 공간을 점유하지만 본래의 모습대로인 동물들이 담겨 있고, 애나 폭스의 사진에는 아주 진심이어서 사뭇 웃기다가도 웃음을 멈추게 되는 표정과 인용구가 병치되어 있었습니다. 둘의 무람없는 채도와 대비가 재미있었어요.

  

얼마 전 불쑥 떠오른 기억이 있습니다. 스무 살 이후로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공교롭게도 모든 아르바이트를 못/안하게 되어 정말로 궁핍해졌을 때입니다. 그때 제일 먼저 하지 않게 된 게 공연을 보고 영화를 보고 전시회를 가는 일이더라고요. 교통비를 내지 않거나 밥을 먹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보니까 너나할 것 없이 돈이 없었어요. 친구들 모두 이런저런 종류의 예술 관련된 일을 하는데 돈을 많이 받고 일한다는 사람은 야속하게도 누구 하나 없었습니다. 나보다 많은 곳에 가고, 나보다 많은 것을 본 나보다 부자인 사람의 지평이 더 넓은 것 아닌가 농반진반(혹은 삼할칠할?) 혼자 생각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없는 살림이나마 이것저것 챙겨보고 싶어서 쌈짓돈을 마련해두고는 하는데 또 모를 일입니다. 바로 며칠 전 보고 싶었던 공연의 티켓 오픈일을 놓쳐서 취소 티켓 구매대기를 걸어 두었는데, 정가를 선결제했을 때 구매 가능성은 15퍼센트고 10위안-1700원 정도-짜리 '가속팩'2341(!) 구매하면 성공률이 96퍼센트까지 올라간다는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지?와 나도 프리미엄을 주고 티켓을 척척 사보고 싶다! 하지만 역시 프리미엄이 붙은 티켓이 시장에 돌다는 게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닌 거려나? 사이에서 도무지 결제는 하지 못하고 괴로워만 하면서, 지금까지도 15퍼센트의 확률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최근엔 종종 무언가를 소리내어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소리내어 읽을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요. 예전에는 절대로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공부하는 기분을 내고 싶을 때 교과서를 소리내어 읽고는 했는데, 종일 보는 게 스마트폰이 된 이래로는 그 재미를 깜박한 것만 같아요. 몇 년 전 시청각에서 모으고 엮는 시청각문서에 쓴 글을 전시장 안의 녹음 테이블에서 읽은 일이 기억납니다. 일단은 쓰고 나서 한참을 묵혀둔 글이어서 생경한 느낌이 들었고, 제가 쓴 글인데도 읽는 것은 또 다르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것도 읽고 싶고, 다른 사람과 서로 읽어주고 들려주고도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무엇을 읽으면 좋을까요? 우선은 편지를 부치고 나서 더 생각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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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필자

김 송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