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6. 13:51ㆍLetter
오월에 축제
축제가 좋아요.
이 기간만 되면은 새삼스럽게 그래요.
5월의 달력을 보면서 안산국제거리극축제와 춘천마임축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갈 수 없다는 걸 생각하고 아쉬웠어요. 저는 오월의 세 군데 축제에서 모두 자원활동을 했어요. 이미 오래전 일이 된 첫 기억인데도, 이 계절만 되면은 바로 그 기억이 제게 꼭 거기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요.
그중에서도 월초에 있는 안산을 맨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안산은 축제 기간이 아닐 때의 안산과 여전히 닮은 데가 있어서, 오히려 그것이 매력이 되는 것 같아요. 번화가의 대로답게 아주 친숙한 사람들과 꽤나 낯선 사람들이 뒤섞여 있고, 위성도시답게 가족, 친구, 연인 같은 여러 분류의 사람들이 나란히 축제를 찾고, 그래서 산책 나온 개와 유모차에 탄 영유아 관객, 노인 관객이 한데서 거리극을 보는 것이 안산의 재미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때로는 거리예술이 '일반 관객에게 난해하다'는 말이 얼마나 선입견이고 지레짐작인지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이웃했던 과천축제가 그리워지기도 하지요. 한편으로 다문화음식체험 부스가 있을 때도 꼭 근처를 기웃거리게 되는데, 그 자체로는 거리극축제와 무슨 사이일까 싶어할 수도 있지만, 안산의 정체성 중 하나가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사는 도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안산에서 만날 수 있는 광경이구나 생각이 들어요.
춘천마임축제는 처음 자원활동을 한 축제인데 사전활동을 하려고 경춘선을 타고 꼬박 두 시간을 곯아떨어져 갔다가 밤에 허둥지둥 다시 경춘선을 타고 곯아떨어지던 기억이 생생해요. 도시 한가운데서 멱을 감고 밤이 꼬박 새도록 들판에서 굿판을 벌이는 재미는 춘천에서만 경험할 수 있었던 거였지요. 공지천에서 튀어나온 도깨비와 난장을 펼치는 마임축제의 이야기도 워낙 매력적이고요. 무엇보다 자원활동가에게는 매일매일 공연이 끝나면 몸짓극장 바깥에 눌러앉아 그날 공연을 한 팀들과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는 게 참 재미있는 일이었어요. 대부분이 현지 대학생들인 자원활동가들은 마임축제를 통해서 춘천을 새롭게 만나기도 했어요. 마임축제의 찾아가는 공연 때문에 처음으로 102보충대나 노인병원 등을 가보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어느덧 없어진 곳도 있고 여전히 춘천의 한 부분인 곳도 있어요. 춘천의 옛날, 어제, 오늘, 내일을 보는 창으로도 이 축제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특히 보고 싶은 영화가 많아요. 매 섹션이 시너지를 이루는 것 같고요. 이전부터 이야기 들은 적 있는, 귀에 익은 감독의 신작이나 국내에서 상영된 적 없던 작품도 궁금하지만 그 이상으로 '아이틴즈' 섹션이 보고 싶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섹션인 아이틴즈의 소개말은 '십대 여성 감독들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섹션이라는 거예요. 이 당연하고 정확한 말이 주는 이상한 감동이 있지요. 여성영화제에 가면 항상 제가 듣지 못했던 저의 목소리를 듣고 오는 경험을 해요. 나와 다른 나이, 국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를 들어요. 춘천이나 안산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혹은 반대되더라도, 서울이라는 도시의 모여들고, 북적이고, 수많은 이야기를 공존하게끔 하는 습성, 지역성이라면 지역성일 그 특징이 이 자리에 모이게 한 속살거림을 듣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아무런 축제에도 가지 못했냐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예요. 상하이 정안구에서는 정안희곡페스티벌을 했어요. 저는 리투아니아 SMT의 <스피리추얼 매터>와 <세자매>를 봤어요. 잉마르 베리만이 쓴 <스피리추얼 매터>는 모노드라마로, 고저가 있되 그것이 배우의 과잉된 태도가 아니라 이야기의 밀도로 완성된다는 것이 흥미를 주는 작품이었어요. 감정이 그 자체로 연기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떤 행동과 말이 감정을 보여줄 수 있는 거라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꽤 근사하고 대담한 순간들도 목격할 수 있었지요. 올해가 베리만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베리만 작품을 꺼내놓는 곳이 눈에 띄어요. 마침 상하이국제영화제에서도 잉마르 베리만 특별전을 마련해서 제게도 나란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한참 전 만들어진 영화를 스크린으로 다시 보는 것이 왜 이렇게 재미있고 궁금한 일인 걸까요. '안방극장'의 시절에도 극장 구경이 재미난 까닭은 또 무엇이고요.
그리고 본 <세자매>, 가장 최근에 본 <세자매> 프로덕션은 씨어터 바젤에서 사이먼 스톤이 연출한 <세자매>의 실황 영상이었는데, 무대 위에 통유리로 회전하는 작은 집 한 채를 짓고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여 인물이 집의 안과 밖을 오가며 공연을 만들어가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이번 <세자매>의 무대는 뒷면에 거울을 배치하여 사각을 아주 줄여버리고, 주된 이야기가 펼쳐지는 돌출형 무대-위-무대를 두었습니다. 의자를 올릴 수 있는 천장 구조를 설치하여 응접실에서, 식사 자리에서, 테이블 앞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마다 의자를 꺼내오고, 장면이 전환될 때 식탁보를 개키거나 펼치는 동작이 끼어들어 단일한 무대가 새로운 배경으로 역할할 것임을 환기했어요. 결정적으로 <세자매> 이야기에서 중요한 '소리'를 아예 맥거핀으로 만들어 버리는 위트가 좋았어요.
같은 시기에 상해희극학원에서는 '상희유희'라는 이름으로 무대미술, 뮤지컬, 전통극, 화극(*전통극이나 복합장르극과 대비되는 구어체의 대사를 사용하는 현대연극을 통칭하는) 축제를 했어요. 여기서는 뮤지컬 <빅 피쉬>와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봤어요. <빅피쉬>는 AR과 프로젝션으로 유동성 있게 만든 무대엔 아쉬움이 없었지만, 배우들의 에너지가 현저히 처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 시간 가까이 공연이 이어졌는데 무대 위 사람들이 세 시간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질질 끌다 세 시간이 지나 버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보았을 때가 특별히 기억나요. 실은 연기가 각별히 더 좋거나 노래가 각별히 더 좋다고 할 수는 없었는데, 그럼에도 꼭,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을 때가 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공연을 하면서 아주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드는 눈짓, 망설임 없는 몸짓, 집중도가 느껴지는 활력도요. 무엇이든 짐작일 따름이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만으로도 퍽 대단하지 않나 싶어요. 그리고 그렇게, 기분 좋아지는 공연을 보고 나서, 어떻게 지금까지 이 이야기가 공연이 되어 힘을 가질 수 있는 걸까, 또 힘을 줄 수 있는 걸까, 생각하면 참 어이없게도.. 나는 공연 보는 걸 좋아하나 보다 결론에 이르러요. 싫어 망했어 때려쳐 말하다가도 이 돌연한 즐거움 때문에 이걸 계속 좋아하고 말겠다는 결심도 해버리고요.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축제가 부리는 둥실둥실 마법도 조금쯤은 힘을 발휘한 것이겠지요.
유월에도 여러 축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인디포럼이 열릴 테고 여기서는 상하이국제영화제를 볼 수가 있어요. 어떤 시공간에서 새 이야기가 펼쳐질지, 스크린을 둥둥 울리고 흔들고 찢어버리는 영화를 만날 수 있지, 상기된 미소의 자원활동가들을 볼 수 있을지, 바삐 종종 움직이는 스태프들은 어떨지,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만든이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또 다른 관객들은 어떤 체험을 하게 될지가 정말로 궁금해져요. 아이고. 바야흐로 축제와 함께할 때!
5월31일
인디언밥 필자
김 송 요
▲ 리투아니아 SMT의 <스피리추얼 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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