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지가 블랙리스트를 말한다] 5.두 가지의 블랙리스트

2020. 4. 7. 22:52Feature

 

 

[프린지가 블랙리스트를 말한다]

 

 

5. 두 가지의 블랙리스트

 

[프린지가 블랙리스트를 말한다] 연재를 통해 프린지가 지나온, 아니 지금도 진행중인 블랙리스트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느끼는 '검열과 배제'에 대한 감각, '예술 하는 삶'에 대한 고민 등 다양한 주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는 블랙리스트의 상흔을 살피고 당사자로서 저항의 동력을 생성하고자 합니다. 

 

글_송기영(계원예대)

지난 3월 12일에는 ‘프린지 블랙리스트를 말하다’의 세 번째 이야기 자리가 있었다. 이날의 자리는 프린지가 준비한 블랙리스트 토론회의 마지막 자리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전후로 벌어진 일상적 검열의 사례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새로운 목소리와 마주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사진출처_서울프린지네트워크

 

과거와 현재, 블랙리스트 이후의 블랙리스트

2016년 첫 보도를 통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수면 위로 드러난 이후, 예술가들은 후속 조치와 책임자의 사과를 요구하며 투쟁해왔다. 이를 통해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백서가 발간되고 문체부 장관이 사과하기도 했지만, 예술가 개개인의 삶은 블랙리스트가 실행되었던 당시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는 아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는 문화예술계의 검열사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블랙리스트는 ‘블랙리스트’고, 지금 일어나는 검열의 사례들은 별개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날의 토론을 통해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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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2015년, 예술가 콜렉티브인 '안산순례길개척위원회'는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하는 <안산순례길>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의 다원예술 창작지원사업에 지원하지만 탈락하게 된다. 지원사업에서 탈락했음에도 공연 자체는 '안산국제거리극축제'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는데, 그해 9월 열린 국회 교문위 국정감사에서 <안산순례길>이 '세월호와 관계되어 있고 연출자가 정치적이라 위에서 기피한다'는 이유로 지원사업에서 탈락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사진출처_서울프린지네트워크 (왼쪽부터 문화연구자 정원옥, 독립기획자 고주영)

 

(현재) 2018년, 매 해 '안산국제거리극축제'에 참여해왔던 <안산순례길>은 올해에도 역시 초청작으로 축제에 참여하게 됐다. 그러나, 안산문화재단은 <안산순례길>의 공연을 4일을 앞두고 돌연 '시의 입장'을 이유로 취소 통보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산순례길>은 자체적으로 공연 진행을 결정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재단이 취소 결정을 번복하면서 '안산국제거리극축제'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당시 안산시장 후보 경선을 앞두고 있던 제종길 시장이 자신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역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음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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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순례길>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과거의 검열과 현재의 검열은 공공 기금을 집행하는 데 있어 개인의 사적인 판단을 통해 예술을 재단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굳이 차이를 따진다면 과거에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시작됐다면 현재의 검열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블랙리스트'를 과거의 '사건'으로 바라보기보다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지속적인 도전'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사과의 몫은 누구에게 있을까

지난해 8월에는 내가 다니고 있는 계원예술대학교의 총장으로 블랙리스트를 실행하고 총괄했던 송수근 전 문체부 제1차관이 임명됐다. 송 총장의 취임 이후 계원예대의 학생들은 송 총장에게 블랙리스트 실행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에 대해 송 총장은 '총장직을 사퇴할 만큼의 잘못을 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하곤 했다. 블랙리스트 관여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비단 계원예술대학교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국가 기관은 사과했을지언정, 문체부 공무원과 산하기관 직원들은 아직까지도 '업무를 진행했던 것일 뿐'이고 '블랙리스트는 이미 지난 일'이라며 끊임없이 부인하고 책임을 떠넘긴다. 그리고 이러한 방관적인 태도는 또 다른 블랙리스트의 여지를 남긴다. 

문화연구자 정원옥 씨는 '블랙리스트의 제도적 해결 과정에 피해자가 아닌 공무원, 전문가, 활동가 등이 주체가 되면서 법적/수사적 진실만 일부 밝혀졌을 뿐, 피해자의 개인적이고 내러티브적인 진실, 사회적 진실, 치유와 회복을 위한 진실은 고려되지 못하였거나 배제되었기 때문에 피해자의 목소리가 담겨있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진상조사위의 블랙리스트 백서를 읽다 보면 당시 실무를 담당하던 직원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와 같은 일방적인 고백 형식의 백서는 단순한 사실관계의 나열일 뿐 총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적합한 자료는 아니며, 이것이 그들에게 반성이 될 수 없음은 더욱 명백하다. 

 

사진출처_서울프린지네트워크 (서울프린지네트워크 오성화)

 

우리는 치유받을 수 있을까 

블랙리스트라는 국가폭력은 제도로서 작동했으나, 우리 사회는 거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국가폭력의 힘 앞에 예술가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정당했음에도 책임지는 국가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그로 인한 피해는 예술가 개인이 온전히 짊어지게 되었는데, 블랙리스트와 블랙리스트 이후의 사건들을 직접 겪고 있는 우리는 이제 자신을 치유하는 일까지도 직접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듯했다. 

이러한 좌절은 블랙리스트 후속 조치의 진행 상황을 살펴보면서 더 커져갔는데, 피해자인 예술가들이 직접 나서 진상을 파악하고, 사과를 요구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하고, 관련자들의 문화예술계 복귀를 막으려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국가기관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발자국 뒤에 서서 토론회 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바라보니 다른 이들과 함께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의견을 나누고 목소리를 모음으로써 우리가 파편이 아닌 조각의 일부분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이날 토론회 자리에서 고주영 독립PD는 '못하게 하면 계속해야지'라는 방식으로 자신을 치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를 다시 찾아내고, 예술을 계속하는 것이 각자의 회복을 위한 방법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학생들이 계원예대에서 투쟁을 이어갈 때, 정확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서로를 응원했기 때문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형태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의 블랙리스트)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번 토론회를 통해 블랙리스트에 대한 새로운 기억이 생겨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양구 극작가가 말한 것처럼 기존에는 블랙리스트를 직접 겪은 당사자들의 기억만이 있었다면, 이제는 계원예대나 프린지의 새로운 운영진처럼 의견을 나누고 새로운 기억을 하는 또 다른 기억의 주체가 탄생한 것이다. 프린지를 통해 만난 두 가지 기억은 이제 (시민) 사회에 손을 내밀고 있다. 

필자소개_송기영
장르를 규정하지 않고 활동합니다.
현재 계원예술대학교에서 융합예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