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지만 낯설지 않은 코로나19 시대] 3. '뻔하다가도, 다시 각오하는 시간'

2020. 5. 3. 17:09Feature

 

 


처음이지만 낯설지 않은 코로나19 시대 (3)

 

 

'자고 일어나니 다른 세상이다.' 요즘 우리에게 딱 들어 맞는 말인것 같습니다. 코로나19는 사회의 취약한 부위를 강타했습니다. 네 '우리'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연쇄작용으로 인한 또 다른 이슈들이 계속 달려옵니다. 거의 모든 작업이 취소 및 연기된 가운데, 삶을 영위하기 위해 가졌던 다양한 정체성도 제 역할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가 힘들긴 하지만 낯설지는 않습니다. 예술은 재난 앞에 유독 취약했으니까요. 인디언밥은 기획연재를 통해 예술생태계의 다양한 지점에 존재하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이를 통해 각자가 발견한 생활 속 '절망'혹은 '전망'을 공유해보려 합니다. 

 

 

뻔하다가도, 다시 각오하는 시간

 

글_김은한(매머드머메이드)

 

코로나의 영향으로 긴 악몽을 꾸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스트레스, 고용불안, 미래에 대한 직접적인 위기, 공포가 꿈에 반영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친구와 도쿄 여행을 갔다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뻔했다. 예약한 68층 에어비앤비의 하부가 철거되어 윗부분만 남아있는 건축적 귀신이 되었고, 성불하지 못한 건물이 시드니를 향해 아주 서서히 진자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불 속 목화솜을 먹으며 버텼다. 아침에 중요한 면접이 있어 막차를 놓치고 근처 공유 공간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는데 사람은 없고 신발이 가득했다. 나는 신고 온 코코넛 껍질 신발 한쪽을 찾지 못해 비슷한 남의 녹색 신발을 신었다. 유튜브에서 보았는데 공룡은 귀신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중동의 정유회사는 지독하지만 유능한 영매사를 거느리고 있다. 공룡들은 죽어서도 소리 내지 못하는 석유가 되어 착취당할 것이다…

혼란한 꿈과 함께 깨어난다. 요즘은 누워있는 게 세상을 위한 일이라던데, 그것도 오래되니 마음이 괴롭다. 정신을 차리고, 무언가를 계속, 제대로,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죄책감으로 등이 배긴다. 밀린 책을 읽고 있다.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의 <스테이션 일레븐>이 무척 재미있었다. 독감으로 문명이 몰락한 이후에 중무장한 유랑극단을 이끌며 마을마다 셰익스피어를 공연하는 이들의 이별과 재회를 그렸다. 이런 내용이란 걸 의식하고 고르진 않은 것 같은데.

다이어리에 취소선이 많아져서, 연필을 쓰기 시작했다. 외출을 줄이려고 일주일 식사를 명확히 의식하고 장을 보게 되었다. 파 한 단을 뭉텅 썰어 쟁여두었다. 느타리 2팩을 790원에 사서 여러 가지 요리를 했다. 마트 근처에 건두부를 저렴하게 파는 곳을 찾았다. 최근에는 게임북을 사서 지도와 단서를 그려가며 모험을 떠나고 있다. 고등학교 이후로 하지 않았던 보드게임도 하고 있다. 디지털로 누리고 있는 것이 많아서 그런지, 물성을 지닌 것을 갖고 놀고 싶어진다. 달고나 커피도 그런 감각으로 일어난 유행이 아니었을까. 종이와 펜만으로 할 수 있는 50가지 게임을 다룬 책을 읽었다. 작년 런던에서 사 온 퍼즐 책을 다시 풀기 시작했다. 밀린 일이 많이 줄었다. 몇 년 지나면 아무것도 안 밀려있을지 모른다는 망상에 빠진다. 햄버거를 먹고 챙겨온 케첩이 집에 이렇게 많이 있을 줄은 몰랐다. 주변 사람들을 더 애틋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4월 중순에 청탁을 받았다. 3월이나 5월에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면 꽤 다른 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2월 초에는 여전히 큰 극장에 다니며 궁금했던 공연을 보고, 응원하는 동료들의 신작을 기대하고, 내한하는 이름에 두근거리며 패키지 티켓을 예매하기도 했다. 창작자로서는 열심히 쓴 기획서의 명암이 갈리기를 기다렸다. 결과가 나와야 각오도 다질 수 있다고 여기며 모든 것이 유보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옥천 허브에 도착한 택배나, 화물 숭배자들이 비행장을 흉내 내며 신의 귀환을 기다리는 것처럼.

아닌가? 언제 원고를 썼어도 이런 비유를 썼을까. 알아주는 사람의 호의에 기대며 희미한 공감을 요구하며.

너무 괴롭지 않은 수준의 제작비로 시작하는 창작자는 늘 한정적이었고 예정된 작업은 언제나 들쑥날쑥했다. 작업을 지속하거나 (어쩌면 영구히) 멈추는 것. 어떤 일이든 각오가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위기는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마스크도 없이 해외에 나가 공연을 실컷 보고 돌아와서 친구들에게 얘기하는 것이 아주 오래전의 호사로 느껴진다. ‘언젠가 또다시’는 오랜 회복기가 필요할 것이다. 일감이 급격히 줄었다. 올해 준비하려던 공연 모두가 흐릿해졌다. 원래는 훨씬 뚜렷했다. “너희 조금 투명해진 거 아니야?”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극장도 축제도 기관도 일단 멈춤. 매년 신작발표 플랫폼으로 삼고 신세를 지고 있는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도 대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한 편으론 예술가를 구하기 위해 일감을 찾아주려는 기획 공모가 쏟아졌다. 창작자들은 언제나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이들은 발칙한 상상력으로 도시를 구할 수 있는 예술적 창조성을 갖고 있으니 그냥 순순히 구해주면 안 되는 것이다. 절절하게 기다리던 공연들이 다음을 기약하는 모습을 본다. 극장이 마지막인 경우도 있다. 공연이 마지막인 이도 있다. 각자의 이유로 새로운 일을 선택하기로 한 동료를 몇 명이나 보았다. 속상하지만 무어라 잡을 수 있을까. 각자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우선할 수밖에 없을 뿐인데.

 

 

‘MANY UNBEARABLE HOURS LATER’ 그러나 이런 공모 또한 명암이 갈리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코로나가 무사히 지나가면 올해 하반기도 엄청난 공연 풍년일 것이다. 창작자로서도 관객으로서도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낼 것이다. 그 와중에 감자나 아스파라거스처럼 가격을 낮출 수도 없다. 

편안하고 즐거운 순간도 종종 있다. 의료 관계자분들의 노력과 무척이나 많은 선의 덕분에 다소 마음이 안정되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건질 수 있는 걸 생각할 여유도 생겼다. 풍문으로만 듣던 공연들, 쭉 궁금했지만 재연할 가능성이 없는 작품, 좋아하는 배우의 예전 모습이 담긴 연극을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고, 전혀 알지 못했던 유럽 극장의 연극을 감상할 수도 있다. 요즘 국제 상황으로는 가볼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기에 더 감사하다. 최근에는 옐리네크의 신작과 오카다 토시키의 공연, 남산예술센터를 기웃거렸다.

공연 예술은 ‘현장에서 일어나는 덧없는 예술’이라는 신념으로 살던 일본의 전통 예능인들도 유튜브 채널을 열고 공연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에게 용돈을 챙겨주고 있다는 얘기를 우스개를 섞어가며 말하자 슈퍼챗을 통한 후원이 쏟아졌다. 어떤 공연자는 극장이 없어졌으니 화면을 바라보며 연습을 하거나 수다를 떤다. ‘회의’를 소재로 한 메타 연극도 있었다. 어떤 개그맨은 토크 라이브를 처음 10분만 맛보기로 제공하고 전체 내용은 note라는 사이트에서 유료로 제공한다. (한국의 포스타입과 닮은 사이트인 것 같다) 어떤 극단은 관객이 집에서 파자마를 입고 잠들기 전에 볼 수 있는 단막극을 올린다고 했다. 공연이 무료로 자꾸 공개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복잡한 마음이 들고 경계하게 되지만, 세계의 창작자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공연 예술만의 소통 방식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메일링 서비스나 희곡 배달 등 서서히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고 있다. 5월이 되면 흥미로운 작업도 더 많이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

 

 

나는 올해 여섯 작품을 혼자 또 함께 만들 예정이었고,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 두 작품 정도 더 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비대면 상황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 대면 공연이었다. 비대면 공연을 해보겠다고 한 건 순전히 농담이었는데, <빅뱅 이론>의 셸든처럼 인간은 집에 있고 로봇에 모니터를 달고 중계하면서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의 더위를 피해 보겠다고 생각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진지하게 ‘비대면’을 마주할 때가 되었다. BJ나 유튜버가 영상 공연 예술의 계승자라면, 연극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 집에서 관객들이 노래방 리모컨의 박수 버튼 같은 걸 누르고, 그럼 공연장에 나에게 웃음이 쏟아지는 상상을 해본다. 현장감이란 뭘까? 조명 때문에 보이지 않는 관객석은 거기 누가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된다. (거기 있는 게 귀신이더라도 좋겠다는 짧은 희곡도 쓴 적이 있다) 역시 극장이 좋은데. 창작자로서, 관객으로서. 편안한 마음으로 과정을 쌓아나가며, 놀라고 웃고 배우고 반성하게 되는, 의욕을 넉넉하게 채우고 돌아가는 감각. 고민이 늘어난다. 

이후의 공연 예술은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닌가? 언제나 지금 만들어지는 게 현재의 연극인가. 새로운 환경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사실을 나열하는 것.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것은 실은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운 일이다. 희망은 점점이 오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오로지 예술이 선명한 희망이 되었다. 많은 창작물을 숨죽이며 보고 웃고 울고 한숨 돌리고 있다. 코로나 이후로 더 예민해진 것 같지는 않은데, 많은 감각이 또렷하다. 예술가를 더 응원하고 싶어진다. 더 보고 싶다! 갈망이 점점 커진다. 예술의 쓸모를 논하는 일이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이렇게 선명하고 명백하게 행복한 것을. 나도 그런 순간을 만들고 싶다. 마무리가 연약한 것은, 아직도 다음 달이 아닌 탓이다.

 

필자소개_김은한

매머드머메이드 명의로 연극을 만들고 있습니다. 낯선 재미를 발견하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