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나의 자판기에는 영웅이 산다 <무릎을긁었는데겨드랑이가따끔하여>

 

 

나의 자판기에는 영웅이 산다

 

 

<무릎을긁었는데겨드랑이가따끔하여>리뷰 @스튜디오SK

글 유혜영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연극은 난세의 영웅들이 힘을 모아 ‘나’에게 자판기 밀크커피 한 모금을 전달하는 이야기다. 자판기 밀크커피는 지금을 사는 힘이자 또 다음을 살아갈 이유이기에, 동전 20원이 부족하다는 보잘 것 없지만, 치명적인 이유로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된 나는 그저 무한한 상념에 빠져든다. 처음에는 가지고 있는 오만 원을 깰까도 생각했었는데, 밀크커피를 마시는 일종의 의례에도 적절한 맥락과 정서라는 것이 있어서 그냥 넣어두기로 했다. 그렇게 무작정 뻗어나간 오만 상념과 밀크커피에 대한 욕망이 장면이 되었다.

사진출처_작당모의 ⓒ박태준

 

공연은 자판기와의 소극적인 사투로 시작한다. 동전을 넣을 때마다 바뀌는 디지털 숫자판을 무대 바닥에 수작업으로 만들어내는 배우들의 동작은 일사불란하다. 현금 쓰는 게 드문 일이 된 요즘, 십 원짜리 동전 하나하나에 엄격한 열정을 보이는 자판기 숫자판은 커피가 먹고 싶은 나만큼이나 처량하다. 이경미 평론가의 정확한 읽기1처럼 자판기는 지원기관이고 나는 지금/여기의 연극하는 나라면, 이 싸움은 한층 더 슬픈 자기들만의 싸움으로 치환된다. 나는 절대 오만 원 권을 쓸 수 없을 것이고, 자판기는 결코 300원 이상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둘 다 지는 싸움이다.

 

작가의 밀크커피 예찬이 조롱과 냉소가 아닌 진지한 진심이라면 어떨까. 자판기가 내어주는 300원짜리 커피라는 사실에서 조금 빗겨나 그게 뭐든 내가 원하고 있다는 사실, 원한다는 행위에 주목한다면. 물론, 누가 봐도 사소한 것을 진지하게 과장할 때 우리는 그것이 조롱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것이 슬프기도 하다면, 사실 내가 정말 진지하기 때문이고, 그게 진실이기 때문이다.

사진출처_작당모의  ⓒ박태준

 

자판기 밀크커피를 원하고 있어

 

무대 한쪽에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CD 케이스들을 진열해놓고 버스킹을 하는 나는 밀크커피를 먹지 못한 상실감에 공연 내내 표정이 없다. 힘도 없다. 사모바르가 식는 것을 걱정하며 읊조리는 노래는 지금 내가 얼마나 뜨끈한 밀크커피 한 잔을 원하고 있는지 느끼게 한다. 머릿속에 그것뿐이다.

체홉의 희곡을 떠오르게 하는 사모바르의 등장에 빈 웃음을 웃는데, 무대는 갑자기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의 거사 날로 바뀐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와 동명인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한 러시아 군악대들이 자기소개를 하고, 일본인 장교와 안중근 너나 할 것 없이 뜨끈하고 달달한 그것이 마시고 싶다. 안중근은 전달받은 밀크커피 한 잔에 불끈 힘을 얻는다. 그래, 자판기 밀크커피란 그런 것이다. 

무대는 안중근에 필적하는 영웅들을 하나둘 더 소환하기 시작하는데 그 발단은 오만 원 권이다. 신사임당은 나에게 밀크커피를 마시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해체를 감행한다. 볏단과 학, 다보탑은 물론, 세종대왕,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이순신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에게 온다. 화폐 모델로 활동하는 이 대단한 분들은 모두 나에게 밀크커피 한 잔을 마시게 할 마음으로 무대에 행차하여 엄격한 자판기 시스템에 훈계를 놓기도 하는 것이다.  

기막힌 상상은 밀크커피를 원한다는 사실로 하나가 된다. 안중근은 무대에서 총을 쏘지 않아도 괜찮고, 이순신은 학익진을 펼쳐 왜적을 무찌르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달달하고 뜨끈한 것을 못 견디게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무릎을 긁었는데 겨드랑이가 따끔할 정도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와중에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기어이 극장에 출렁이는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무대는 불쑥불쑥 다른 공간들을 지어내고, 배우들은 등퇴장도 없이 능청맞게 역할을 바꾼다. 바뀌는 역할만큼 다양한 움직임과 목소리가 있다. 그 소동 같은 리듬이 만들어내는 공기가 관객의 뻔뻔한 웃음 또한 허용한다. 마스크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연극이 놀아왔던 방식이 아닐까. 자판기 밀크커피가 우직한 지원금일지, 창작의 영감일지, 오늘 하루를 버티는 달큰함일지 확실하지 않지만, 나를 놀게 하는 건 무얼까? 이런 연극 한 편일까?

 

사진출처_작당모의  ⓒ박태준

 

그들이 영웅이어야 할 이유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커피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순신에게로 이야기는 넘어가고, 마디 굵은 여인의 부탁으로 이순신은 거북선을 움직인다. 오직 나에게 커피를 배달하기 위해서다. 갑자기 자판기가 작동하는 소리를 듣고 무심코 일어나 그 앞에 선 나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밀크커피 한 잔을 집어 든다. 

우리나라 대표 영웅 이순신과 안중근을 넘고 넘어 밀크커피는 나에게 왔다. 나는 나라를 구할 일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그냥 사람. 싸구려 커피 한 잔에 안도하며 체념적 자기 비하와 용감한 자기 인식을 오가는 부류다. (필자가 그렇다는 거다. 극의 막바지에서 필자는 완전히 몰입하고 말았다) 국민이 ‘영웅’인 시대에 여전히 이순신이 필요한 이유가 뭐였을까. 

300원을 겨우 맞춰 넣어 나온 밀크커피가 아니라, 상념의 판타지를 타고 날아온 선물 같은 밀크커피는 나를 구한다. 자판기 시스템과는 아무 상관 없이, 맥락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이순신 장군은 나의 무력한 하루를 구한다. 구해내기 위해 영웅은 등장한다. 흡사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덕분에 오늘도 노래를 부른다. 

김용희가 부르는 옴브레의 곡들을 들으면서 자신을 싸구려 커피로 노래한 장기하의 얼굴을 떠올렸다. 발표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곡에 공감했던지 한국대중음악상은 2009년 올해의 노래로 <싸구려 커피>를 선정했다. 그때 장기하는 ‘바쁘긴 한데, 뭘 하는지는 확신이 없다’는 인터뷰를 했었다. 다만, 곡이 엮어낸 권태와 체념에는 춤사위를 부르는 나름의 흥이 넘실댔다. 이 공연의 제목이 묘사하는 참 알 수 없는 상황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살아왔던 원리는 아니겠냐고 묻는다. 오늘도 내일도 잘은 모르지만, 지금은 자판기 밀크커피를 원한다. 그러다가 생겨난 상념은 노래가 되고 공연이 될 것이다. 영웅이 찾아올 것이다. 이렇게 터무니없이 낭만적인, 그러나 진부하지 않은 판타지가 완성된다. 

사진출처_작당모의  ⓒ박태준


 1. 이경미, 달달한 밀크커피의 웃기게 슬픈 탈주(fuite), 연극in 180호 http://www.sfac.or.kr/theater/#/01_guide/actreview_view.asp?SearchKey=&SearchValue=&rd=&flag=READ&Idx=1555

 

서울연극센터 연극인 - 연극인

 

www.sfac.or.kr

필자소개_유혜영
공연이 일어나는 공간을 좋아하고, 기록하는 일과 기록되지 않는 사람들에 관심이 있다. 
yoohy_87@naver.com

 

공연소개

작,연출 : 김풍년 
출연 : 이래경, 김용희, 박은경, 방승민 
조명/정유석, 음악/옴브레, 안무/금배섭, 사진영상/박태준 

〈창작의도〉 

 

‘가련한 저에게, 누구든 백원만 주실 수는 없겠느냐고.’ 

 

여기, 특별한 예외가 아니고서는 주로 도서관에서 작업하는 이가 있다. 
빈속에 자판기 커피 한잔을 마시면 싸하게 속을 훑어 내려가면서 전날 풀리지 않았던 과제가 불연 해결되기도 하고, 깊이 침잠하여 전체를 깊이 바라보게도 한다. 


그는 하루 중 도서관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아니 그 시간 때문에 하루를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감일이었다. 아침 일과가 의식처럼 진행되어야 제시간에 원고를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자판기 앞에서 동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갑을 뒤져봐도, 가방을 탈탈 털어 봐도, 동전이 없다. 
자판기 옆에서 커피를 마시는 초면(初面)에 구걸이라도 하고 싶었다. 

 

‘가련한 저에게, 누구든 백 원 만 주실 수는 없겠느냐고.’ 

 

본질은 없고 오직 자판기 커피 한잔만이 구원이다! 
한참을 자판기 앞에서 시름하다가 그는 지금 상황을 극으로 써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전이 없어 자판기 앞에서 서성이던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가 최초의 창작의도이다. 

 

 

〈작당모의 소개〉 


작당모의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자다봉창, 바람결에 떠돌던 이야기를 깁는 골방의 이빨 빠진 할망구이고자 한다. 
일상 안에 머물고 있는 씨앗들이 느닷없이 부딪혀 엉뚱한 우주를 연다. 이는 낮은 곳에서 영웅을 찾아내며, 후미진 골목에서 보물을 캐는 일과 같다. 


미천한 이야기들이 초능력으로 확장되는 과정이 얼마나 통쾌하고 낭만적인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즐길 시간. 
다만 연습실을 쓸고 닦을 뿐이다. 

 

〈에너자이저〉, 〈앉은뱅이〉, 〈숨통〉, 〈구멍을 살펴라〉를 했으며, 〈용선〉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