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일상은 어떻게 가시화 될 수 있는가 <DIOS EX MACHINA>

2022. 3. 31. 15:18Review

일상은 어떻게 가시화될 수 있는가

 

<DIOS EX MACHINA(디오스 엑스 마키나)> 리뷰

 

글_김민관

 

사물-이미지의 생산양식

 

‘냉장고’의 어떤 형상과 감각 들이 관객을 에워싸는 <DIOS EX MACHINA(디오스 엑스 마키나, 이하 <DIOS>)>는, 배우의 자리를 대리하는 설치를 통해, 일반적인 극장의 시간성을 관객에게 전적으로 이전하는 전시로 보인다. 실시간 모션 그래픽, 푸티지 영상, 영수증 용지로 프린트되어 나오는 텍스트 등에 더해지는 사운드와 조명의 변화는, 공간 전체를 둘러싸면서 앞선 이미지들을 시간적인 질서 안에 위치시킨다—사운드가 공간에서 수평적인 차원에서 가장자리를 차지한다면, 조명은 수직적인 차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입체적인 연출은 공연으로서의 문법과 구조를 가시화하며, 하나의 공간을 조형하는 동시에 관객에게 그 공간의 흐름과 좌표를 제시한다. 

 

<DIOS>는 일반적인 공연은 아니지만, 일정한 시간의 흐름을 분별할 수는 있다. 곧 시간의 흐름에 따른 구조적 단위를 갖는데, 실제로도 이는 충분히 증명된다. 30분 단위로 예약을 한 관객이 들어온다는 점은 공연의 일정한 반복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또 그러한 형태를 띠고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시작과 끝의 경계는 어렴풋한데, 조명과 사운드가 엄밀히 그 둘을 지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조명과 사운드의 영향력이 물리적으로 광범위하며 비가시적인 것들을 재편하는 효과와는 별개로, 이러한 두 다른 매체 역시 여타 다른 매체와 함께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조명과 사운드는 유일하게 ‘클라이맥스’ 구간을 만드는 요소이지만, 독립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해체하거나 지우지 않고 ‘그 위에’ 덧씌워진다. 

 

냉장고의 형상을 한 사물에는 빛과 소리, 텍스트 등이 기입되며, 의미나 감각을 투영하는 또는 빛과 소리와 결합하는 특별한 이미지가 된다. 사물과 이미지의 중간자적 존재자로서 그것들은 자리한다. 그것들은 무엇보다 언어를 갖지 않지만, 동시에 그것은 어떤 언어의 조각들이다. 그러한 ‘사물-이미지’들은 공간을 돌아다녀야만 하는 분산/이동, 조명과 사운드의 가장자리 바깥에 앉아 있음을 선택할 때의 정주 사이에서 엄격히 전자의 행위를 배제할 수 없게 만드는데, 각각은 장소 특정적으로 관객과 연루되기 때문이다. 가령 거대한 하나의 공간이 주어진 가운데, 지속하는 미시적인 것들 각자의 움직임을, 의도를 알 수 없는 조각들의 산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그것은 예컨대 관객의 접촉과 접착의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해소된다고 전제된다. 가만히 앉아 있는다면, 의사-사물과 노이즈의 오케스트라를 전경화하는 이외의 감각을 산출하기는 어렵다. 

 

우리를 마주하는 레디메이드의 형상

 

공간에 머무르는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구조물들의 형태는 브라운관을 얼굴로 품고 있는 흉상의 설치 외에는 전반적으로 의사-냉장고 형태이다. 천장에 비스듬하게 걸린 직사각형 큐브들 아래로 폭이 좁은 하얀색 구조물이 바깥쪽에 놓여 사각형의 대형을 이루는데, 여기서 인쇄된 용지의 내용물은 약간의 차이를 수반한다. 중앙에는 양문형 냉장고의 틀을 모방한 구조물이 뉘어 있고, 그 중앙의 종으로 열린 틈으로 프로젝터의 빛이 새어 나오는데, 조명이 꺼진 후에 이는 포그의 존재와 함께 영상으로 비로소 가시화된다. 

 

무대 입구와 가까운 곳에는 스피커들이 자리하는데 이 역시 냉장고—투박한 디자인의 1단 냉장고—와 형태적 유사성을 띤다. 스피커에서는 냉장고의 노이즈가 ‘새어 나온다.’ 이는 엄밀히 청각적 구문이 아닌 물질의 입체적 공명 효과를 의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이즈는 물론 분명한 음가로 파악되는 대신 스피커와 그 주변으로 떨리고 있음의 물리적 현상으로 연장된다. 노이즈가 일종의 음악 구간을 형성하는 건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다. 그것이 공간 자체를 현상한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연주의 형식이 무대에 오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공연의 효과—공연임에 대한 인지—는 예외적인 순간이며, <DIOS>가 주창하는 듯한 일상의 잠재적 양식—돌아가는 냉장고와 같은 고정값의 소음—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즉, <DIOS>는 일상의 어떤 상태를 모방한다. 이는 평범한 것, 잔잔한 것, 지속되는 것과 같이 일상에 대한 형용사나 알레고리로의 표현이 아니라 코드화되지 않는 일상의 잔여 같은 것을 가리킨다. 또한 수면을 통해 분쇄되는 기억의 찌꺼기처럼 정제되고 편집되는, 내용이 없는 무한한 단조로움의 형식이다. 곧 언어화되지 않는 것이자 언어화될 수 없는 것이며, 의미와 코드, 기호로 분쇄될 수 없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는 현실의 시간도, 상상의 시간도 아닌, 우리가 인식하지 않지만 흘러간 시간의 실재적인 총량을 지시한다. 이는 중앙 천장의 스크린의 실시간 모션 그래픽이 관객 각자의 동선을 대강 진분홍색과 에메랄드색, 겨자색쯤으로 분류해서 이동 경로를 번역하는 결과임에서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조명이 켜졌을 때 비로소 이 스크린이 보이게 되는데, 조명과는 상관없이 측정과 재현은 이뤄지고 있다. 동시에 관객은 예측할 수 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 공간에서.

이러한 재현으로서의 스크린은 CCTV의 성격과는 다르다. 그것은 실시간의 즉물적 이미지 번역이 아니라, 현재까지의 지난 시간을 궤적으로 포함한다는 점에서 시간의 양상은 입체적이다. 또 다른 시간은 제목과 연관되는데, 후반부 급작스러운 음악과 조명으로의 초점이 그것이다. 반면, 제목은 사물의 시간 자체를 함의한다. 이는 이 공간 전반의 주요한 모티브를 이룬다는 점에서 더 핵심적인 부분이다. “DIOS EX MACHINA”라는 제목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했던, 무대 위에 갑작스러운 장치를 투입하여 신의 출현과 함께 파국의 줄거리를 마무리하는 기법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이러한 극적 시간은, 구조의 끄트머리에서 출현한다.—를 유사 음가인 냉장고 브랜드인 디오스(DIOS)로 전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냉장고를 본뜬 구조물들은 일상의 레디메이드를 다시 전유한 셈이다. 

 

공연의 제목은 신의 자리를 냉장고가 대신하는 것으로써 냉장고를 인간의 (영역) 바깥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냉장고는 마치 일상에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이따금 존재가 가시화된다. 그것은 소리가 한번 거세질 때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갑자기 냉장고의 이질적인 소리가 초점화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질적인 존재에게서 오는 감각이 일상과 다른 시간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환상을 줄 때가 있다. <DIOS>에서 냉장고는 소리로써 편재하며 동시에 보이지 않게 편재하는 관객을 기록한다. 후자의 재현 방식이 스크린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상 공간의 유사성과 이질성의 어떤 경계에서 작동하는 <DIOS>는, 관객의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 그 관객이 일상을 영위하도록 만든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DIOS>는 일상을 가시화한다. 평소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가시화되는가. 앞선 냉장고의 ‘어떤’ 부상의 순간처럼 들리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일상의 차원이 변환되어 부각되는 순간이 그러하다. <DIOS>는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물을 가시화하며, 우리의 일상이 가시화되는 순간을 연출한다. 이는 갑작스레 우리가 속한 장소가 이질적으로 되는 순간, 곧 우리가 그 바깥에 서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럴 때 냉장고는 우리를 마주한다. 

 

유령처럼 우리는 서성이며

<DIOS>에서 냉장고라는 어떤 형식들은 의식화되는 일상에 관객의 자리를 만든다. 거기에는 언어와 상상이 포함된다. 공간 가에 놓인 네 대의 냉장고-프린터는 각기 다른 양식을 실시간으로 산출한다. “부서지다”/“사라지다”, “시간”, “썰물”/“밀물”과 같은 단어에 대한 사전적 의미들, 일정한 간격으로 시간 단위가 같이 찍혀 나오는 “void time”과 역시 일정한 간격으로 찍혀 나오며 새로운 세계임을 지정하는 “Hello world”, 각기 다른 여자와 남자의 일상의 시간을 나열하는, 일종의 초단편 소설 형식의 문장들, 어떤 패턴들이나 공간과 사물을 담은 각기 다른 흑백 사진들 모두 자연의 주기와 일정한 시간 영역에 포섭된다. 곧 존재는 사물화됨으로써 잠재적인 운동성으로 수렴하는 듯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는 존재의 특정한 의지를 드러내기보다는 존재의 단위보다 더 큰 시간의 단위 속에 반복되며 ‘사라지는’ 무력한 개체임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공간을 그야말로 ‘유령처럼’ 떠도는 관객들은, ‘void time’을 채우기 위한 시간을 가진다. 또는 이 공간을 주조하는 전시의 역량을 의미화하려 시도한다. 움직임과 이동을 통해서 시간을 공간화하거나 공간 안에 쌓이는 시간을 확인하며 공간을 시간화한다. 한편, 텍스트의 세계에서 남자와 여자로 특정된 어떤 일상의 시간은 고여 있다. 그 고임은 또 다른 고임으로 대체된다. 데이터의 끝없는 재현으로서 프로그래밍된 프린터는 ‘무한 출력’이라는 명령을 수행한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무한한 반복—출력—은 더미라는 하나의 형식을 완성한다. 반복이라는 형식이 반복으로서의 내용을 갈음한다. 

 

여기서 그 ‘문학’을 조금 더 들여다본다면, 이는 원점 회귀의 반복의 형식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가령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던 남자에서 키보드 자판에서 손을 떼고 메모장을 살피는 여자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공간 바깥으로 프린트되는 소리의 일정한 기계음과 인접하는데, 결과적으로 타자 소리라는 일상의 표면으로서 텍스트의 내용은 실제 전시 안에서 유사-타자 기계음의 프린트 노이즈라는 물리적 형식으로 인계되며, 타자를 하는 존재라는 형식은 사실상 그 소리로 갈음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 존재는 크게 손실되지 않는데, 애초에 그를 특정한 존재 대신에 무색무취의 존재로 추상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의 일상의 형식이 우연히 일치하는 것 자체가 여기서는 중요하며, 그가 어떻게 일상을 탈주하거나 벗어나려는지는 알 수 없게 된다.

 

<DIOS>는 관객 참여로써 파편적인 시간을 재편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한 시간은 유기적인 존재의 시간은 될 수 없다. 곧 또 다른 행위자가 이 일상을 온전하게 살아감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 행위자의 몫은 관객을 향한다. 일상은 무대로 튀어나와 있는 반면, 그 시간의 정합은 이뤄지지 않는다. 어떤 질서나 체계 없이 파편적인 사물, 이미지, 언어의 조각이 공간 여기저기에 쌓여 나가는 것, 또는 티브이 모니터의 반복되는 시간 모두 변화의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점들이 생성되는 이미지의 스크린이 제시하는 궤적, 흔적으로서의 시간은 현재를 포착하고 미래를 예비하며 메타-시간으로서 존재들과 공간의 관계를 감별하게 하지만, 그조차도 이 공간의 고인 시간 바깥의 언어를 구성할 수는 없다.

 

세계는 어떻게 사유될 수 있는가

 

일상이 바깥이 되는 순간, 우리는 일상을 다른 식으로 사유하지만, 그러한 세계가 총체적인 무엇이 될 때 우리는 그 다른 세계에서 어떻게 존재의 의미를 구성할 수 있는가. 곧 다른 감각이 갖는 세계에서 주어지는 역할은 그러한 감각 작용을 체화하는 것에 순전히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동선이 공간에 기입되고 있음이 가시화되는 것, 곧 인지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DIOS>는 냉장고로부터 일상의 인지되거나 의미화되지 않은 순간을 삶의 총체로 제시한다. 백색소음을 들리는 것으로, 반복되는 일상을 기계적인 존재의 문학으로, 극적 흐름이 없는 의식을 무대의 인지적 흐름으로 변환한다. 

곧 <DIOS>는 세계의 총체를 일상의 파편으로 구성한다. 그러한 일상은 재현되지만 변화하지 않는다. 일관된 형식 구조 속에서 반복될 뿐이다. 따라서 이곳이 종착지가 되지 않도록 이 세계로부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 역시 필요할 것이다. 일상을 가리키는 공연은 순전히 각자의 일상으로 그 몫을 남겨둔다. 따라서 공연은 공연 이후에 완성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나가는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쌓인다.’ 이러한 전제 아래, 아카이브되는 우리의 삶은 사물화되고 타자화된 반경 속에서 뚜렷한 의미로 초점화되지 않는다. 이는 바깥의 시간과 바깥의 존재에 의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 발을 담그고 의식화된 주체인 동시에 망각하는 주체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에 관해 메타 시점을 획득하기 어렵다.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면, 그런 비주체적인 삶의 일상은 우리의 것이면서 우리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우리는 어떤 반복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 반복의 단위를 인지함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반복의 역량을 인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DIOS>의 세계는 사라지는 줄 알았던 일상의 파편들을 마주한다는 점에서, 진공 상태의 환경에 서 있는 셈이다. 실제 냉장고 소리를 재현하는 사운드가 공간에 차 있기도 하지만, 그 시공간은 바뀌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 냉장고가 일상의 자리를 차지하듯 우리는 그 냉장고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잉여로서 편재하는 조각들이 일상의 의식을 잠식할 때 이 안의 문학이 그렇듯 우리는 답보 상태에 처해 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상의 정크 타임이 산재함을 <DIOS>는 인지하게 한다. 이를 해체하거나 다른 경로로 변경하는 것이 가능할까. 마치 쌓여가는 데이터 그 형상 자체가 사실은 우리의 삶에 하릴없이 덧붙여지는 웹과 하드디스크의 각종 데이터 같은 것, 그것과의 의식 없는 동거를 가리키는 것 아닐까. 

따라서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일상의 추출과 특정화로부터 나아가 사물-이미지의 질서 속에서 반복이 주는 미래 없음의 함의, 닫힌 시공간의 알레고리에도 불구하고, <DIOS>의 세계에서 주체의 창발적 생산은 가능한가. 곧 우리의 자유로운 행위에 의해 시간이 쌓이는 만큼 우리에 대한 재현은 집적된 잉여로 번역되고 있는 환경에서 말이다. 

 

공연소개

<DIOS EX MACHINA>
일시 : 2022.02.09-11 18:30, 19:00, 19:30
장소 : 콘텐츠문화광장 스테이지66

연출: 황유택
구성: 김일경
시각디자인: 윤대원
사운드디자인: 신용희
후각디자인: 곽혜은
기술제작감독: 김형석
무대감독: 박세련
조명감독: 김지우
무대제작: 김민섭(혜화무대제작소)
그래픽디자인: 김희수(COVcreative)
촬영: 최지웅
기획: 안미빈
주관: 황유택, 빈 프로젝트
주최: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콘텐츠진흥원

 

필자소개

김민관_아트신(artscene.co.kr)편집장. 예술을 체험하고 기록한다. 다양한 예술 아카이브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고자 한다. 좋은 예술이란 무엇일까라는 탐문과 함께 비평적 관점으로 동시대 예술의 계보를 재구성해 나가려고 노력 중이다. 한편으로 예술(계)이 더 좋아질 수 있는 환경과 이를 위한 개인적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