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

2022. 5. 16. 10:18Review

 

잊혀진, 튀어 나오는, 이해 불가능한 그리고 묘사 불가능한 것 혹은 곳.

하마(하재용)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예견할 수 없이 행동하는, 어떠한 어원을 가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그리고 어떻게 생겼는지 완벽하게 묘사할 수 없는 심지어는 죽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그 이름은 오드라데크이며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소설 ‘가장의 근심’(Die Sorge des Hausvaters)에서 화자인 가장을 괴롭히는 아주 곤란한 존재로 보인다. 위에서 열거한 이 존재의 속성들 역시 그것을 완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모든 설명들과 분석들은 이 존재를 비껴간다. 그리고 이 존재의 이름을 빌린 한 전시가 ‘아마도 예술공간’에서 열렸다. 흥미롭게도 하나의 객체를 묘사하는 듯한 카프카의 소설 속의 오드라데크와 달리 기획자는 부제로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를 선택했다. 이 부제는 소설 속 가장이 오드라데크에게 던진 유아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되돌아온 것이다. 왜 기획자는 어떠한 사물이나 객체가 아닌 장소성을 제시하려고 한 것인가? 사실 이미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듯 오드라데크란 ‘무엇’으로 정의될 수 없는 ‘무엇’이다. 따라서 그것의 객체성을 단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우리에게 가능한 최소한의 수단은 그것이 등장하는 장소를 통해서 존재의 위상을 확인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소와의 마주침 속에서 각각의 작품들은 오드라데크의 세 가지 특성들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느낌은 경험에서 비롯되는데 이를 글의 형태로 변환하는 순간 나는 카프카의 가장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게된다. 즉 불가능한 이해와 분석을 계속해서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미한 시도들을 조금이나마 방지하고자 이 글에서 나는 개별 작업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기보다는 각각 작업들이 오드라데크의 거주지와 어떤식으로 연결되며 끝내 무엇을 시사하는지 보여주고자 시도할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전시의 작업들은 카프카의 소설 속 오드라데크의 속성 중 세 가지, 즉 ‘존재방식’과 ‘외양’ 그리고 ‘행위’를 대변하고 있다. 가장 먼저 ‘존재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우희서’ 작가의 작업 <Bad breath>는 전시장 내에서 관람자를 계속해서 시험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찾게 만든다. 크게 이변이 없다면 관람자는 먼저 인스타 게시물로 보여지는 호박을 씻는 영상을 보게 될 것이고, 그 이후에 전시장 2층의 초록색으로 연출된 방에서 무언가를 찾으라고 요구하는 웹사이트로 안내받는다. 그리고 이 안내에 따르면 관람자는 전시장을 나가서 반대편 건물로 향한 후에야 2층에 매달린 호박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의 인도대로 관람객이 호박을 발견하기 위해 행동하지 않을 때 그것은 실제로 걸려있더라도 없는 것 처럼 존재한다. 이를테면 인스타 게시물 속 호박은 관람자 앞으로 튀어나온다. 이러한 튀어나옴은 소설 속의 오드라데크의 존재적 조건을 반영하며 레비 R. 브라이언트가 저서 ‘존재의 지도’에서 구분하는 객체 중 ‘불량 객체’의 속성과 유사하다. <Bad breath>는 그 작업 자체로 어떤 의미를 부각한다기보다는 전시 전체의 전제 조건을 그려낸다. 이를테면 앞으로 관람자가 마주하는 혹은 마주했던 존재들이 ‘불량 객체’로서 튀어나왔고 경험 이후에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선언한다.

우희서 <Bad breath>-탐지도구, Pumpkin, mobile phone, acrylic, headset, variable istallation, 2022, 사진 : 조준용

지하에서 발견하게 되는 일종의 탑 같기도 하고 얼기설기 폐품이 얽혀있는 것으로 보이는 ‘노드 트리’의 작업 <땡볕, 초승달과 대추>는 실제로 수집된 사물들과 모래꽃이끼 그리고 표고버섯들이 뭉쳐서 하나의 전체로서 제시된 것이다. 관람자는 네 귀퉁이에 마련된 발판을 누름으로써 이 조형물을 움직여볼 수도 있다. 연관 없는 것들을 모아 전체로 제시함으로써 이 작업은 오드라데크의 피상적인 외형적 속성을 재현한다. 그러나 사실 이 물체 자체는 오드라데크의 속성인 ‘알 수 없음’에 해당하지 않는데, 왜냐면 관람자에게 이것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써 누군가에게 제작되었다고 명확히 인식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핵심은 각각의 원자재들이 ‘어디서 왔는지’ 우리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원자재들이 어떤 순간에는 ‘상품성’을 지닌 물건들이었다고 상상할 수 있는데, 오드라데크와 상품의 연관점은 아도르노가 벤야민과 카프카에 대해 논하면서 제기했었다. ‘쓸모없이 살아남은 상품’으로써 세세하게 살펴볼 때 날 것으로 드러나는 질료들은 ‘우희서’ 작가의 작업이 예시한 불량객체들로 비춰진다. ‘불량 객체’ 혹은 ‘오드라데크’의 존재 방식과 외양적 가능성을 우리가 지각하게 돕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희서’와 ‘노드 트리’의 작업을 단독으로 본다면 오드라데크에 대한 소설 속 묘사를 겉으로만 재현한 것으로 비쳐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은 작업들을 통해 이러한 위험들이 해결된다.

노드트리 <땡볕, 초승달과 대추 The Broiling Sunschine, New Moon and Jujube> 캡틴의 수집품(수집된 무대의 일부, 잔해 더미에서 온 강철, 쪽나무와 참죽나무) 딸기밭 하우스에서 온 강선, 그물망, 베어링, 라쳇 렌치, 각종 고철, 비닐, PET, LED, MCU, 스피커, 배지, 표고버섯, 모래꽃이끼, Mixed media, 2022, 사진 : 조준용

‘봄로야’와 ‘오선영’의 작업은 속성인 ‘행위성’을 통해 이 전시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는 불량 객체 혹은 오드라데크가 예술의 대상이 되기 전에 어떤 위치에 처해있었는지 보여준다. 이는 벤야민이 오드라데크에 대해서 제기하는 ‘망각’의 개념과 연관되어있다. 그에 따르면 “오드라데크는 사물들이 망각된 상태에서 갖게 되는 형태”이며 “일그러져[왜곡되어] 있다.” ‘봄로야’가 자신의 작업에서 지속해서 꺼내놓는 존재와 존재로서의 장소들은 이러한 ‘망각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러한 망각된 것들을 영상과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예술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이러한 방식에서 영상은 심미적으로 잊힌 대상들을 어떤 리듬에 맞춰서 재구성하는 행위로 보인다. 동시에 이러한 재구성은 실재하는 망각된 존재들을 결단코 망라해서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온전히 성공할 수 없다. 반대로 회화는 영상과는 달리 작가 자신이 바라보는 그 대상에 대한 인상들을 보여준다. 회화적 제스처는 따라서 영상보다는 더 이기적으로 작가 스스로가 받아들이고 다시 표현하는 만큼의 이해와 연관된다. 흔히 말해지는 영상의 지표성과 회화의 환영성 사이 그 어디에서도 대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 속에서 예술과 도큐멘터리가 구분되는데, 도큐멘터리와 달리 예술은 대상을 온전하게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망각된 대상이 이해될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갈 수 있게 회복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왼) 봄로야 <자연 초과 Natural Excess> Mixed media on paper, 35x27.5cm, 2021, 사진 : 조준용
(오) 봄로야 <가난한 천이 Poor Succession> Single Channel, 05:32, 2021, 사진 : 조준용

(왼) 봄로야 <유연한 손 Resilient Hands> Mixed media on paper, 46.8x36.8cm, 2021-2022, 사진 : 조준용
(오) 봄로야 <유연한 손 Resilient Hands> Single Channel, Sound, 13min, 2022, 사진 : 조준용

‘망각된 것’을 다루는 매체 사이의 긴장을 통해 미학적으로 대상을 회복시키는 ‘봄로야’의 작업과 달리 ‘오선영’의 퍼포먼스 작업 <Paludarium>은 인간의 신체를 통해서도 제기될 수 있는 오드라데크의 속성을 꺼내놓는다. 퍼포먼스의 무대로서 지하 전시장에 구성된 수조와 그 안의 흙탕물과 환경을 이루는 나무와 풀들은 ‘자연’의 외형을 가지지만 인공적인 것이다. 반대로 그 안에서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작가의 신체는 우리가 인간을 자연에서 벗어난 자로 흔히 인식하는 것과 달리 순수한 자연이 될 가능성을 얻는다. 따라서 이 작업의 핵심은 사람이 자연적인 무대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곧 자연이 되는 순간을 마주하는 것이다. 특히나 상의 탈의를 한 작가의 몸에서 에너지처럼 피어오르는 수증기와 작가 스스로 내뱉는 입김들은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체현한다. 작가는 퍼포먼스의 순간순간마다 죽은 듯 산 듯 움직이면서 관람자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다. 게다가 작가가 관람자와 시선을 교환하게 되는 순간에 관람자는 관음자로서의 자신의 위치가 역전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역전 속에서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가장’으로서의 위치, 즉 계속해서 작품들을 판단하고 이해하려는 자신의 활동들이 인식되기 시작한다. ‘망각된 것’으로서의 자연-인간 혹은 인간-자연이 우리 앞에 현시될 때 그것은 역으로 질문을 던지는데 그것은 벤야민이 ‘망각의 변증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망각한 것이 우리일까? 아니면 우리가 오히려 망각된 것일까?” 그것을 뭐라 부르든 인간을 자연과 구분하려는 모든 규정들을 무력화하는 이 질문은 카프카의 소설 속에서 가장이 느끼는 고통을 우리에게 유발한다.

오선영 <Paludarium> Performance, Installation, 2022, 사진 : 조준용

‘우희서’의 작업을 통해서 튀어나온다고 느낀 무언가는 ‘노드 트리’의 작업을 통해 ‘불량 객체’로서 지각된다. 그리고 ‘봄로야’의 작업을 지나면서 그것들이 ‘망각된 것’이라고 암시되지만 예술 안에서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오선영’의 작업은 그러한 이해들 혹은 마주함이 꼭 비인간과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하는 동시에 전시라는 문화적 행위가 오드라데크를 규정하려는 위치 속에서 조직될 수밖에 없다는 아이러니를 깨닫게 한다. 이 전시의 작업들을 지나면서 마지막에 관람자가 마주하는 위기란 곧 그가 카프카의 소설 속 가장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관람자와 가장들이 기대하는 것과 달리 이 전시는 어떠한 문제들을 단순히 정리하여 이해하도록 만드는게 아니라 오히려 알 수 없게 관람자를 흔든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관람자는 가장이 되면서 역으로 오드라데크 혹은 불량 객체와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더군다나 전시는 오드라데크의 부분적 속성들을 더듬어가며 경험할 때 우리가 흔하게 행하는 분석이나 분류와 같은 행위들이 무의미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미학적 경험의 순간에 개별 작업과 작업의 대상들은 우리에게 이해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거기에 있는 것들이다. 오히려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보고 또 이해하는지에 대한 문제들이다. 오드라데크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또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을 위해서 예술은 망각된 것들을 지각 가능한 상태까지만 회복시킨다. 이러한 회복의 이유는 명백하다. 쓰레기 혹은 쓸모없는 상품이라는 꼬리표를 단 채 그것들이 이미 ‘심미적’으로 망각되도록 조건 지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또 다른 감각적 사유를 통해서, 즉 예술들을 통해서 그것들과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 이후에 우리는 그것들과 처음으로 제대로 관계 맺을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연결 지점에 오드라데크가 거주한다. 아직은 ‘정해져 있지 않은 곳에.’

하마(하재용)

점차 하나로 수렴해서 보기 힘들어지는 예술이라는 것 혹은 예술계라는 시스템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예술작품과 만나고 접촉하는지에 특히나 관심이 있습니다. 개별 예술작품보다는 때론 그것들을 대상으로 삼는 미학 이론에 대해서 사고하는 것이 더 즐거운 아이러니한 상황에 스스로 놓여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독일에서 예술학(Kunstwissenschaft)를 전공하면서 여러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시도 중입니다.

 

제9회 아마도전시기획상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
전시기간: 2022년 3월 11일(금)-4월 7일(목)
기획: 강정아
참여작가: 노드 트리, 봄로야, 우희서, 오선영
운영시간: 오전 11시-오후 6시_월요일 휴관
전시장소: 아마도예술공간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54길8)
연구자: 강병우, 민주
공간 연출: 천근성, 문우림, 아주
제작 도움: 김정기, 이상철, 이헌철
디자인: 파이카
사진: 조준용
후원: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