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맥베드> "선과 악이 사라진 욕망"


김낙형 연출의 ‘맥베드’ 리뷰 -
선과 악이 사라진 욕망



전세 5천만원 다세대 주택에 사는 내가 김낙형의 ‘맥베드’를 보러 대학로로 간다. 김낙형의 ‘맥베드’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주인공 맥베드가 왕이 되고 싶은 욕망에 빠져 비극을 불러오는 이야기다. 나는 왕이 되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다. 2009년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 중에 왕이 되려는 욕망에 빠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다면 ‘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제 욕망만 남았다. 욕망은 나에게는 삶의 원천이다.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그런데 이 삶의 원천이 비극을 불러온다고 한다. 왜 욕망이 비극을 불러오는 걸까? 욕망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만일 욕망이 비극을 불러온다는 것이 옳다면 이 세상에는 온통 비극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이 비극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는 것은 욕망이 반드시 비극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의 반증이 된다.
 
   
          
   
  
 

그렇다면 비극은 왜 일어나는 걸까? 욕망이 아니라면 맥베드의 어떤 점이 비극을 일으킨 걸까? 멕베드가 왕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편지로 전해 읽은 맥베드의 아내는 맥베드를 부추긴다. 왕이 되는 것이 운명이라면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맥베드의 말에 맥베드의 아내는 ‘당신은 사나이도 아니다.’라고 하며 사나이답게 용기를 내서 지름길로 가라고 재촉한다. 혹시 이 지름길이 비극을 일으킨 걸까? 지름길은 덩컨 왕을 죽이고 왕이 되는 것이다. 덩컨 왕은 온화한 왕이다. 온화한 덩컨왕은 선(善)이다. 덩컨 왕을 살해한 행위는 악(惡)이다. 그리고 맥배드는 덩컨 왕이 온화한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덩컨 왕을 살해한 맥베드는 죄의식을 느낀다. ‘죄의식’은 ‘선’과 ‘악’을 동시에 느낄 때 생긴다. ‘선’을 알지 못하는 ‘악’에는 ‘죄의식’이 없다. 죄의식을 느낀다는 점에서 맥베드는 적어도 ‘선’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맥베드는 죄의식은 느끼지만 ‘권력’을 향한 욕망을 버리지는 않는다. ‘죄의식’과 ‘욕망’은 서로 부딪치면서 상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을 모색하게 되는 데 그 방법은 이 연극의 초반에 나오는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은 더러운 것, 더러운 것은 아름다운 것.” 이 대사는 정말 교묘하다. 원래 이 대사는 “선한 것은 악한 것, 악한 것은 선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한 ‘선’과 ‘악’의 관점을 ‘아름다움’과 ‘더러움’이라는 주관적인 판단이 많은 단어로 바꿨다. 여기서 ‘죄의식’은 흐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관적인 판단이 가능한 ‘아름다움’과 ‘더러움’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더러운 것, 더러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궤변이 설득력을 갖기 시작한다. 

                             



여기서 ‘죄의식’은 조금 더 흐려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흐려진 것은 김낙형의 맥베드에서는 미래를 예언하는 환영으로 나온다. 그리고 환영을 향한 맥베드의 대사 “넌 누구냐.”에서 알 수 있듯이 맥베드 자신조차 이제는 너무나도 흐려진 ‘선과 악’ 속에서 자신의 행위를 불러온 환영들에 대해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환영들의 의도대로 맥베드는 욕망에 빠졌고,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한 지름길을 선택하면서 갖게 되는 죄의식은 교묘하게 ‘선과 악’의 굴레에서 빠져나오면서 비극을 일으킨다. 결국 ‘맥베드’의 비극은 ‘선과 악’의 구별이 희미해진 ‘욕망’이 불러온 것이다. 김낙형의 맥베드에 나오는 환영들은 욕망을 나타내기 보다는 ‘선과 악’이 흐려진 ‘악’을 나타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선과 악’의 모호함이 지배하는 ‘맥베드’의 심리는 김낙형의 연출에서도 나타난다. 모호한 시간적 배경, 모호한 장소. 모호한 소품과 배우. 특히 소품으로 사용한 의자, 책상, 촛불은 무대 전반에 걸쳐 그 무게가 소품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의 무게를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히 권력이나 칼, 왕관, 투구로 변하는 의자와 배우의 심리를 나타내주는 촛불이라는 은유의 맛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연극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환영들의 예언처럼 연극의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소품들은 더 이상 소품이 아니라 하나의 배우로써 그 무게를 지니고 있다. 






반면 배우들은 배경이 되기도 하고, 의자와 책상, 촛불 등 소품들을 연극 속으로 끌어들이고, 몸짓으로 다른 배우의 심리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것은 일종의 ‘끈’으로 작용한다. 소품과 배우, 무대를 하나의 통일된 연극으로 만드는 ‘끈’의 역할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드’가 비극으로 치닫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보여주는 희곡이라면 김낙형의 연출은 그 속도감을 하나의 ‘끈’으로 보여주고 있다. 속도가 빠른 이유는 군더더기 없는 사건의 진행 때문이다. 사건의 진행은 맥베드가 비극으로 향하는 하나의 큰 흐름을 말한다. 이 큰 흐름에 관객이 더 집중할 수 있도록 김낙형은 통일된 하나의 색깔을 보여준다. 그 색깔은 소품과 배우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다. 그래서 김낙형의 연출은 색깔이 강하다. 물론 나는 그 색깔이 무슨 색인지 알지 못한다.


필자소개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주중에는 충북음성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학원 선생.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