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이상100주년기념기획전시<제비다방> "정말 박제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제비다방>

정말 박제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 박제된 천재, 이상을 찾아서



|개쏭



* 80년 전 당시의 이상도, 제비다방에 모이던 작가들도, 이상이 태어난지 100년이 지나 그를 기념하는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도, 그리고 이 리뷰를 머리 쥐어 뜯으며 써서 보내준 필자 개쏭도..그들은 모두 20대다. 아 차. 이 글을 올린 인디언밥 편집자인 아아시도 20대구나. -매버릭






안타깝다


올해는 이상 100주년의 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을 기리는 수많은 기념전시들이 열릴 것이다. 이미 열리기도 했었고.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상을 이상이라는 캐릭터로 대하는 것, ‘박제된 천재’라든가, 불우한 천재, 뭐든, 천재로 대하는 것이다. 아마 이상이 저세상에서 이런 전시들을 바라본다면, 자신의 일종의 연극이, 작품 속에서 풀어낸, 그리고 삶 속에서 풀어낸 그 스스로의 캐릭터화가 절묘하게 성공했음에 기뻐할 테이고, 자신이 문학에서 말하고자 했던, 그리고 실제로 하나의 삶을 산 이로서는 자신의 문학을, 자신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후대의 이들을 바라보며 슬퍼할 테이다.


전시는 산으로 갔다.

간만에 별 즐거움 없는 전시를 보았다. 정말, 간만이다.

3시간 동안 온갖 버스를 환승해서 전시 장소인 파주의 교하도서관까지 갔음에도, 별다른 감동이 없었다. 마치, 파주 신도시의 반듯한 길과 반듯한 아파트와 도서관까지 반듯한, 뭐 그런 반듯반듯하지만 그래서 별다른 매력은 없는, 잠시 발길이 멈춰지는 풍경이 하나도 없는 그런.


두 가지 측면에서 전시는 산으로 갔다.

한가지는, 그들의 전시가 전시공간인 교하도서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그들의 전시가 이상의 천재성과 박제된 일생을 기리는 전시일 뿐 이상의 작품이 갖고 있는 매력을 닮은 전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바라보았던 이상은 천재 이상,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이상, 아이콘화 된 이상이었을 뿐이다.



무료하다


무료하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아니 뭐 숨을 쉬는 거 자체가 무료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숨 쉬는 것이나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별다른 할 일은 없고 무료하다는 게 무료하다는 거다. 정말 별다른 할 일이 없다. 해가 뜰 녘에 잠이 들어선 4월이 된 마당에도 뜨뜻하게 켜 논 오래된 전기장판 위에서 전기장판 모터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나 들으면서 잠을 자다보면 중천은 한참 넘긴지 오래, 잠시 일어나서 어제 포장해온 말라비틀어진 피자(포장을 하면 천원이 더 싸다)를 한쪽 뜯어먹곤 다시 잠이 든다. 그렇게 자고 나면 이젠 해가 져있다. 아, 해가 졌다. 이제부터는 무슨 할 일이, 재미있는 일이 있겠지, 하고 잠자는 동안 꿈에서도 그리던 화장실이나 가서 소피나 한바가지 갈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루에 두 번씩이나 기상하는 쾌거를 이룬다거나 5회치 소피를 한 번에 뱉어내는 압력을 즐겼다든가 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내 하루에 별다른 재미있는 일이 추가되었을 리 없다. 그냥 다시, 식어빠진 피자를 한쪽 뜯어 씹다가 ‘뭔가 다르게 먹는 방법이 없을까’하고 포장지에 적힌 데로 ‘전자렌지에서 맛있게 대우는 방법’대로 댑혀보나, 따뜻하고 딱딱한 피자가 나왔을 뿐이다. 이젠 뭘 하나. 똥이나 싸야지.


아마 이상도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나처럼 찌끄려 쓴 자조일기가 이상에게는 문장력과 문학성이 곁들여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지루한 와중에도 온갖 지루함의 느낌을 담아내어 지루하게 완성해내었다는 것.


권태롭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전시는 성공적이었다. 정말 권태롭다. 뻥 뚫린 공간에 조각난 전시물. 이상의 제비다방도 분명, 이런 지루한 냄새를 잔뜩 풍기고 있었을 것이다. 온갖 현대적인 것들, 현대적인 사람들이 모여 현대적인 이야기를 하곤 했겠지만, 그들의 현대성은 두 가지에서 나온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감탄, 그리고 그 감탄 후 어김없이 찾아오는 권태.



박제된 이상을 찾아서


새로움에 대한 감탄과 권태 중, 그 전자의 것을 이상의 시 ‘AUMAGASIN DE NOUVEAUTES(새롭고 기이한 백화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거기에는 새로운 것, 아직은 길가에 실례를 하는 소한마리는 흔히 볼 수 있는 서울, 그 한복판에 새워진 최고의 현대적 상징물인 마쯔비시 백화점의 정경을 그린 이 시는, 에스컬레이터가 주는, 양장을 입은 남녀가 그 에스컬레이터에서 교차되는, 그런 정경을 그려내고 있지만 이 시에서조차 남는 것은 그 새로운 이미지의 흩어짐 뿐이다.



저 여자의 하반은 저 남자의 상반에 흡사하다(나는 애련한 해후에 애련하는 나)

사각이 난 케이스가 걷기 시작한다(소름끼치는 일이다).

라디에이터의 근방에서 승천하는 굿바이.

바깥은 우중(雨中). 발광어류의 군집이동.      

(AUMAGASIN DE NOUVEAUTES 中)



이상의 초기 작품의 특징인 기교주의가 꼭 위와 같은 ‘모던보이’의 센티함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아래는 신문 연재 중 독자들의 항의 폭주로 도중하차하게 된 이상의 ‘오감도’ 중 한 작품이다.(안타깝게도 이 시는 신문 연재 당시 기획되었던 오감도의 15개의 글 중 뒷부분에 있었기에 연재되지는 못했다)



내팔이면도칼을든채로끊어져떨어졌다. 자세히보면무엇에몹시위협당하는것처럼새파랗다. 이렇게하여잃어버린내두개팔을나는촉대세움으로내방안에장식하여놓았다. 팔은죽어서도오히려나에게겁을내는것만같다. 나는이런얇다란예의를화초분보다도사랑스레여긴다.

(시 제 13호)



기괴하다. 그리고 그 기괴함의 감정을 마치 스탬프를 찍어내듯 우리의 마음에도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멋지다. 기교가 낳은 작품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그의 기교는 단순히 기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선명한 이미지를 부여하여 기괴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상의 기교주의 시는 이런, 경탄스러운 시들을 통해 매력적인 퍼즐이 된다.


그리고 그의 기교는 점점, 현대인이 느낌직한 환경변화에 대한 감상에서 그 현대에 살고 있는 한명의 인간 이상에 대한 깊이 있는 침투로 바뀌어 간다. 기교가 삶을 품어내는 것이다. 그의 연인이었던 금홍과의 관계가 수많은 작품에서 다뤄지고 있고, 그 안에서 고통받는 이상의 마음이 아래의 시에 잘 녹아들어있다.



지비2

아내는 정말 조류였던가 보다 아내가 그렇게 수척하고 가벼워졌는데도 날지 못한 것은 그 손까락에 끼었던 반지 때문이다 오후에는 늘 분을 바를 때 벽 한 겹 걸러서 나는 조롱을 느낀다 얼마 안 가서 없어질 때까지 그 파르스레한 주둥이로 한 번도 쌀알을 쪼으려 들지 않았다 또 가끔 미닫이를 열고 창공을 쳐다보면서도 고운 목소리로 지저귀려 들지 않았다 아내는 날 줄과 죽을 줄이나 알았지 지상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비밀한 발은 늘 버선 신고 남에게 안 보이다가 어느 날 정말 아내는 없어졌다 그제야 처음 방 안에 조분 냄새가 풍기고 날개 퍼덕이던 상처가 도배 위에 은근하다 헤뜨러진 깃 부스러기를 쓸어 모으면서 나는 세상에도 이상스러운 것을 얻었다 산탄 아아 아내는 조류이면서 원체 닻과 같은 쇠를 삼켰더라 그리고 주저앉았었더라 산탄은 녹슬었고 솜털 냄새도 나고 천근 무게더라 아아.


지비3

이 방에는 문패가 없다 개는 이번에는 저쪽을 향하여 짖는다 조소와 같이 아내의 벗어 놓은 버선이 나 같은 공복을 표정하면서 곧 걸어갈 것 같다 나는 이 방을 첩첩이 닫고 출타한다 그제야 개는 이쪽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슬프게 짖는다.

(지비-어디갔는지모르는아내 中)



이 시에 이르러 이상의 기교는 목적이 아니라 표현의 도구가 되어있다. 앞의 시가 기교 자체의 구현, 혹은 기교를 통해 나타나는 새로운 감정에 대한 전달이었다면, 이 시에서는 삶이 기교를 삼켜 그 삶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소화시킨 것이다. 아내가 실은 조류이고, 아내라는 새를 날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신이 끼워준 금속 반지라 말하는 지점은 아름답고 슬픈 상상이다. 그리고 아내가 버선을 벗어놓고 떠나가는 장면은 금홍과의 연애사를 녹여내어 삶을 시로 이끌어낸 대목이다.




이렇게 그의 작품이 단순히 새로운 기교가 아니라 삶을 담아내기 시작하면서부터, 삶에 대한 권태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새로움이라는 불꽃을 쫒던 부나방이, 그 불꽃이 도깨비불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찾아드는 허무랄까. 그는 이제 새로움 속에서도 허무를 느낀다. 그러한 새로움이 사그라듦에 대한 권태, 즉 후자는 그의 산문 ‘권태’에서 잘 드러난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 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또 한판 두지. 웅덩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 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이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권태 中)



만약, 이들의 전시가 이런 이상의 새로움에 대한 반응과 그 새로움이 가신 후의 권태까지를 동시에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라면, 그래서 이 전시에 대한 나의 비판이 틀린 것이라면, 그들은 다시 이상이 표현하고자 했던 한 가지를 놓친 셈이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권태 후의 날갯짓이다. 강점기 시절의 작가 중 이상이 아직까지 이야기 되고 읽히는 이유는 그가 모던보이이기 때문도 아니고, 모던의 권태를 표현했기 때문도 아니고, 그 속에서 빛을 찾아 솟구치는 힘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던 ‘권태’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즉, 그는 단순히 권태 속에서 권태를 이어가는 그런 상태에서도 무언가 부나방처럼 자신을 이끌 빛을, 그 빛의 열기를 찾았던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찾지 못했지만-아니 최소한 그의 문학 작품 속에서는 계몽주의 문학이나 카프 문학처럼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하지는 않지만-그 빛에 대한 추구 자체는 생생히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을 뭐라 말할 수 있을까. 부나방이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단순히 어리석은 짓일까. 어쩌면 그의 문학이, 그의 삶이 가장 찾고자 갈망했었던 것은 바로 이 부분, 무언가에 몸을 던지듯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의지가 아닐까? 이러한 지점을 이상의 ‘날개’는 잘 포착해내고 있다. 권태의 극에 달한 한 청년이 여러 사건 속에서-이 사건들조차 청년에게는 빨리 이불 속에나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피곤한 일이다-우여곡절 끝에 다시 한 번, 이불 밖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날갯짓을 바라는 바로 그 순간, 이 순간은 마치 부나방이 불빛 하나 없는 밤 먼지 구덩이 속에 엉켜 있다가 본 불 하나 없이 타오르는 불에 대한 열망에 날갯짓을 하는 듯한, 그런 순간이다.


그러나 고통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불빛 없는 하늘을 비행하는 부나방의 날갯짓은 피로를 모르다가 어느 순간 근육이 마비된다. 이상은 권태 속에 날갯짓을 하려했지만, 일상은 여전히 권태롭고, 그렇기에 갈 곳 없는 발길은 제 스스로의 힘에 못 이기고 꼬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넘어진다. 넘어지는 바닥에 손도 짚지 못하고.



나의 아프고 고로운 것을 하늘이나 땅이나 알지 누가 아나.’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말을 그는 그대로 자신에게서 경험하였다. 약물이 머리맡에 놓인 채로 그는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얼마 후에 깨어났을 때에는 그의 전신에는 문자 그대로 땀이 눈으로 보는 동안에 커다란 방울을 지어 가며 황백색 피부에서 쏟아져 솟았다. 그는 거의 기능까지도 정지되어가는 눈을 쳐들어 벽에 붙은 시계를 보았다. 약 들여온지 10분, 그동안이 그에게는 마치 장년월의 외국여행에서 돌아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약탕기를 들었을 때에 약은 냉수와 마찬가지로 식었다. ‘나는 이다지도 중요하지 않은 인간이다. 이렇게 약이 식어 버리도록 이것을 마시라는 말 한마디 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는 그것을 그대로 들이마셨다. 거의 절망적인 기분으로, 그러나 말라빠진 그의 목을 그것은 훌륭히 축여 주었다.

(병상 이후 中)



이상의 전시를 보고, 그에 관한 리뷰를 쓰기 위해 이상의 글을 읽던 시간 동안 나의 몸은 이상의 호흡을 따라 변화했다. 새로운 전시와 새로운 시를 봤으며-실은 욕을 한 게 태반이었다-그 새로움을 권태로 여겼다. 그러면서 ‘권태’를 읽었다. 정말, 오랜 권태였다. 일주일정도 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진창 속의 일주일처럼 더디게 흐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권태 속에서 고통이 왔다. 처음에는 두통, 다음에는 치통, 심지어 몇 년 동안 뽑지 않았던 사랑니까지, 그 지긋지긋한 두통 때문에 뽑아버렸다. 그러나 이를 뽑는다고 고통도 시원스레 뽑히지는 않았다. 그 뒤 찾아온 것은 아득한 현기증, 미주신경성실신이라는 의사도 어찌 못할 병이었고, 이 이름도 낯선 질병은 나의 발목을 끌고 저 아래로 아래로 아득히 끌고 갔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연, 그 심연의 한가운데에서 나에게 다시 빛을 돌려 준 것은, 평소에 그 이름만을 간신히 기억하던 공기 중의 산소였다. 내 몸도 잊고 있던 심호흡이 수백 아니 수천이었을까. 눈이 보이고, 귀가 들리고, 촉각이 살아났다.


그리고, 예수가 걸으라 말한 듯, 발에 힘이 들어갔다. 일어섰다.




그동안 수개월 그는 극도의 절망 속에 살아왔다(이런 말이 있을 수 있다면 그는 ‘죽어 왔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급기야 그가 병상에 쓰러지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을 순간, 그는 ‘죽음은 과연 자연적으로 왔다’를 느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누워 있는 동안 생리적으로 죽음에 가까이까지에 빠진 그는 타오르는 듯한 희망과 야욕을 가슴 가득히 채웠던 것이다. 의식이 자기로 회복되는 사이사이 그는 이 오래간만에 맛보는 새 힘에 졸리었다(보채어졌다). 나날이 말라 들어가는 그의 체구가 그에게는 마치 강철로 만든 것으로만, 결코 죽거나 할 것이 아닌 것으로만 자신되었다.

그가 쓰러지던 그날 밤(그전부터 그는 드러누웠었다. 그러나 의식을 잃기 시작하기는 그날 밤이 첫 밤이었다) 그는 그의 우인에게서 길고 긴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글로서 졸렬한 것이겠다 하겠으나 한 순한 인간의 비통을 초抄한 인간 기록이었다. 그는 그것을 다 읽는 동안에 무서운 원시성의 힘을 느꼈다. 그의 가슴속에는 보는 동안에 캄캄한 구름이 전후를 가릴 수도 없이 가득히 엉키어 들었다. ‘참을 가지고 나를 대하여 주는 이 순한 인간에게 대하여 어째 나는 거짓을 가지고만밖에는 대할 수 없는 것은 이 무슨 슬퍼할 만한 일이냐.’ 그는 그대로 배를 방바닥에 댄 채 엎드렸다. 그의 아픈 몸과 함께 그의 마음도 차츰차츰 아파 들어왔다. 그는 더 참을 수는 없었다. 원고지 틈에 끼워져 있는 ‘3030’ 용지를 꺼내어 한두 자 쓰기를 시작하였다.

(병상 이후 中)



뱃속 아래서부터 고요히 퍼져오는 평화. 전쟁이 끝난 폐허에 피어난, 한 줄기의 푸른 싹처럼, 숨이 고요해진다. 이것이 회복기 환자가 느끼는 그 원시적 힘일까. 이상은 이 고통과 회복의 사이를 번갈아 왔다 갔다 하며, 그 자신의 질병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그는 불을 찾는, 아니 불을 찾아 날갯짓할 힘은 얻은 부나방이 되어 날아갈 수 있었다. 이상의 ‘날개’는 그렇게 날갯짓할 힘을 얻었을 것이다.



xx씨! 아무쪼록 광명을 보시오!” 그의 눈은 이러한 구절이 씌인 곳에까지 다다랐다. 그는 모르는 사이에 입 밖에 이런 부르짖음을 내기까지하였다. “오냐, 지금 나는 광명을 보고 있다”고.

(병상 이후 中)



삶이 가득 차오르는 순간이 있다. 글이 샘솟는 순간이 있다.
온갖 고통들과 균열, 그리고 베일에 싸인 것들이 명료해지는 순간이 있다.

병상에서 일어나는 환자의 상쾌함.

병이 완쾌된 것은 아니지만, 그 병의 과정 속에서 희번뜩한 눈빛으로,
무언가 평소 놓치고 가던 뿌연한 시선을 걷어내고 마치
그 순간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그런 순간이 있다.

그것은, 병이 자신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벗어나
병까지 자신의 인생, 이미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인식이다.

진정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리라. 건강과 병을 나누어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 모든 것을 삶 속에 인정하고, 자신의 삶 속에 그 모두가 녹아들 때-커피에 우유가 녹아들 듯 그렇게 ‘둘’이 아니라 ‘전체’가 될 때,- 그런 때가 바로 건강하다는 것이리라.


이상은 불빛을 찾으려고 했는가?

아니다. 병의 반대편에 있는 하나의 ‘건강’으로서 불빛을 찾으려던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불빛을 향한-불빛은 형태를 갖지 않고 그저 흔들리며 타오를 뿐이다- 날갯짓, 그 전체로서의 건강으로 비약하려는 날갯짓……. 그 근육의 꿈틀거림을 찾으려던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이상을 살아가게 했던 것이며 이상의 문학을 빛나게 하는 지점이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그렇게 이상의 날개는 빛이 난다.



 

이상 100주년 기념 기획전시 <제비다방>


전시일정: 3월 25일부터 4월 8일까지
장소: 교하아트센터

참여작가: 김민, 김정은, 소 무, 이지애, 홍근영, 김도훈, 김지숙

이상 100주년을 기념, <제비다방>을 모티브로 한 작품전. 80년 전 <제비다방>에 자주 모였던 구본웅, 김유정, 박태원 같은 문화예술인들의 그 당시 나이대인 20대 중후반 작가들이 전시에 참여했다.

http://blog.naver.com/mamile


 

필자소개
개쏭. 송재영이라 쓰이고 개쏭이라 읽힌다.
주거지는 재개발지역만 골라살며 자신도 미개발상태로 저렴하게 살아가는 중이다. 니체와 오스카 와일드를 좋아하는 놈팽이이다. 가볍게 나래치는 글을 쓰고 싶지만 정작 나오는 글은 무겁게 땅을 파고 있다. 괜찮다. 지금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니 그 무엇에도 삶을 희생하지 않기를. 




  1. 잘 읽었습니다. 개쏭의 칼럼에 가까운 리뷰(^^)를 읽으니, 잠시 이상을 만난 기분이에요.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so cool! (필자소개글, 재미와 감동을 덧바르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