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감각으로 통한 체홉의 멜로드라마 <숲귀신>

2010. 5. 3. 10:43Review

 


감각으로 통한 체홉의 멜로드라마
 

<숲귀신>
안톤체홉 작 / 전훈 연출


"관객은 옳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무대는 진실해야 합니다."



글|정진삼





1. 


 체홉의 탄생 150주년입니다. 그의 작품은 한국연극의 메카인 대학로에서 꾸준히 무대화되고 있지요. 명실상부한 연극의 클래식을 점유하며, 셰익스피어만큼이나 혹은 그 보다도 더 많이 무대화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체홉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그리고 한국적인 지지를 받는 것일까요.


 ‘그때 거기’의 작품이 ‘지금 여기’의 관객들과 무리없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텍스트 안에 담긴 동시대성과 공감 때문이겠지요. 잘 표현된 체홉의 작품에선 삶의 진실한 모습이 직설화법으로 담겨지고, 사실적인 연기를 통해 공감 이상의 감동으로 이어집니다. 아마도 우리 모습과 닮아있기에 그렇지요. 인정하기 싫은 모습, 너무나 우습고 한심한 모습. 그러나 한편으론 진실한 고민이며, 솔직한 고백. 체홉의 완성된 ‘드라마’ 는 이처럼 우리의 진실감각을 흔들어 깨웁니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그 여정의 첫 단계인 작품입니다. 29살의 체홉이 쓴 초기작. 스스로가 공연하기를 금했던 작품, <숲귀신>입니다. 체홉은 이를 개작하여 훗날 <바냐 아저씨> 라는 위대한 드라마를 완성합니다. 






2. 


 <숲의 정령>으로 한국에 알려진 체홉의 작품은 이제 전훈 연출에 의해 <숲귀신>으로 명명됩니다. 이 작품은 낭만적이며 서정적인 분위기가 많이 감지됩니다. 체홉의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주인공들은 삶의 낙관적인 희망을 품고 있고, 비극적 결말이 많은 그의 작품과는 다르게 희극적인 결말로 끝이 나지요. 주인공들의 사랑은 일그러진 욕망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불륜이나 다각관계가 아니라, 건전하고 성공적인 연애담을 구현합니다. 일종의 멜로드라마의 관습에 충실한 셈인데, 비록 극 중간에 보이니츠키가 자살을 하지만 활기에 찬 젊은이들의 해피엔딩으로 그 우울함을 날려버립니다.


 <바냐 아저씨>와 <숲귀신>. 두 작품에 가장 큰 차이는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주인공입니다. ‘바냐 아저씨’ 가 소냐가 호명한 ‘바냐’ 를, ‘숲귀신’ 이 ‘후르쇼프’를 놀리는 별명을 이르듯, 각각 드라마의 중심엔 ‘다른’ 인물들이 놓여있습니다. 실의에 빠진 ‘바냐’ 대신 이상을 실천하는 후르쇼프가 이 작품의 중심인물입니다. 체홉의 여러작품이 그러하듯 중심인물이라고 해서 주인공처럼 시종일관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작가가 전하려는 의미의 가치를 누가 쥐고 있느냐, 혹은 누가 어떤 가치를 대변하느냐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정도지요. 안타깝게도 바냐 아저씨에서 자살조차 실패했던 소냐의 삼촌은 <숲귀신>에 이르러선 성공한 권총자살로 - 마치 <갈매기> 의 뜨레플레프처럼 -  생을 마감합니다.

그러나 작품의 분위기는 심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살’ 은 극의 종결이 아니라, 인물들을 화해시키고, 만나게 하는 ‘장치’ 가 됩니다. 죽을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남아 사랑을 하고, 재결합에 성공하지요. 그래서 <숲귀신>은 희극적인 반전을 통해 멜로드라마 장르의 성격을 강하게 내뿜습니다. 감수성이 발달한 한국의 관객들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할 만한 작품이지요. <바냐 아저씨>가 삶의 허무함과 고된 노동의 순간을 절절히 전하였다면, <숲귀신>은 삶의 행복함, 그러니까 사랑의 순간, 휴식의 달콤함을 맹랑하게 전달합니다. 작품의 내용적 차이에서 비롯된 의미적 차이는 실로 대단한 차이인 셈이지요.





3. 


 젊고 예쁘장한 모습의 소냐는 전문 교육을 받은 귀족여성입니다. 별로 일하지 않습니다. 이와는 상반된 모습의 율랴는 내내 하녀처럼 일합니다. 이 작품에서 일하는 사람은 율랴와 바실리이, 세묜뿐. 그 외에 교수와 처, 지주와 그의 자식들은 땀 흘려 일하지 않는 베짱이들입니다. 체홉은 <숲귀신>에서는 권태로운 귀족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속내를 엿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한탄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삶의 고통이 다소 정신적인 차원에서만 공허하게 떠들어지고 있어서인가요.


 이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한 사내가 있습니다. 숲을 지키는 데 집착의 면모를 보이는 의사 후르쇼프는 히피를 연상시키는 의상만큼이나 괴짜의 모습을 풀풀 풍깁니다. 숲의 보존에 대한 가치와 지식인의 실천적 모습을 강조하는 후르쇼프. 큰 체구에서 나오는 털털한 말투와 행동은  ‘혁명가’를 연상시킵니다. 게다가 좋아하는 엘레나와의 관계에 있어선 급하고 소심한 성격이 번갈아서 나타납니다. 미래에 대한 이상과 현재의 감정이 혼란스럽게 공존하는 모습, 젊은 날의 체홉이 살짝 연상되지요.


 <숲귀신>은 남녀의 엇갈린 사랑, 숲의 사람과 영지인들의 오해, 도회지 지식인과 촌사람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평범한 이야기에, 분명한 캐릭터들이라서 이해하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솔직하고, 유머러스한 체홉 특유의 대사도 즐겁게 전달됩니다. 곰보의 얼굴로 인생을 탓하는 쟈진의 모습, 일차원적인 군인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표도르, 매사에 불만섞인 표정으로 신세한탄을 해대는 이고르. 체홉의 남성 캐릭터들의 희극성도 여전하지요.


 다각적인 관계 또한 명쾌합니다. 처음에는 사랑의 화살이 누구에게로 향할지 어리둥절하지만, 이내 소냐는 엘레나에게 후르쇼프가 좋다고 고백합니다. 역시나 후르쇼프 역시 소냐를 원하고 있습니다. 젊든, 늙었던 남자들은 아름다운 엘레나를 욕망하고, 율랴는 대체 누가 데려갈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은근하게 깔린 그들의 유쾌한 관계가 1장에서 보여지면 그들 간의 ‘미움’ 이 자리한 2장이 펼쳐집니다. <바냐 아저씨>에 깔려있던 인물들의 ‘허무주의’ 와 ‘냉소’ 는 여기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는 지식인으로 대표되는 세레브랴코프에 대한 인물들의 시선에서 그러하지요. 그는 이고르와 소냐, 엘레나 모두에게 고집스럽고 답답한 늙은이로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역시나 세레브랴코프는 자신을 지지해준 오랜 지인들을 시시하고 촌스러운 저질로 치부하며, 지식인의 이기적인 속성을 보여줍니다. 결국 그러한 그의 태도는 관계를 파국으로 이르게 합니다.


 바닥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질질짜는 이고르. 오히려 자신의 정당함을 설파하며, 이고르에게 화를 내는 세레브랴꼬프. 무조건 잘못했다며 말리는 마리아. 갈등의 격한 전개 속에서, 과거의 고생을 누누이 밝히는 이고르의 사연은 그리 진정성 있게 와 닿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의 자살 역시 생뚱맞게 여겨지지요.


 배우들은 모두 사실주의에 입각한 연기를 펼치고 있지만, 그들의 서브텍스트는 쉽게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젊은 배우들의 ‘이유’ 없는 독창성과 중견 배우들의 ‘재미’ 없는 평범함이 아쉽게 느껴집니다. 좁은 무대에서 많은 인물들이 부딪히는 가운데, 그들의 주요 표현수단이었던 ‘대사’ 가 너무 피상적으로만 전달된 것은 아닐까요. 장모 마리아가 왜 교수인 그를 그토록 지지하는지, 과거에 열심히 일했던 바이니츠키는 왜 지금 놀고 있는지, 소냐의 고민은 오로지 사랑 때문인지, 이반과 표도르 그리고 졸뚜힌은 왜 그리 즐거운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기반이 약한 텍스트가 반증하는, 빈약한 인물들의 실재감일까요. 피터 브룩은 멜로드라마에는 심리학이 존재하지 않으며, 인물들은 내적인 깊이가 결여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들이 보여주는 캐릭터는 존재하고 고민하는 ‘영혼’ 이라기 보다는 주어진 ‘상황’ 과 ‘성격’ 때문에 단순히 ‘재현’ 된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대체로 한국의 체홉은 너무 감상적으로 흘러가기에, 무대 위의 인물들의 ‘고민’ 이 관객에게 느껴지기 보다는 감정에 압살된다고 합니다만, <숲귀신>은 고민의 층위도, 감정의 표출도 미미했습니다. 젊은 연기자들의 에너지는 경쾌하고 발랄했지만, 비생산적 독창성이랄까요, 가뜩이나 좁은 무대에 많은 인물들이 어수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소냐와 엘레나가 속마음을 주고받는 여자들끼리의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여자의 솔직한 고민과 고백이 심리적인 긴장을 유지한 채 전달되었습니다. 세레브랴코프의 호출로 좌절된 두 여자의 욕망. 허무함으로 그 장면은 더욱 애틋해집니다.




4. 


 <숲 귀신> 에는 다양한 사건사고들이 발생합니다. 스캔들에서부터, 교수의 선언, 의사의 고백, 삼촌의 자살, 부인의 실종, 그리고 해피엔딩에 이르기까지 내내 관객의 재미를 붙드는 해프닝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삶의 행복한 순간들의 의미를 부여하고, 힘든 순간들을 사랑으로 잊자는 취지겠지요.


 결국 사랑을 얻는 행복한 두 남자가 있습니다. 방탕한 생활에도 여전히 부의 여유를 부리며 사는 이반은 자유로운 인물로 그려지고, 숲의 보존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후르쇼프는 오히려 시간에 쫓기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상황이 아이러니합니다. 한편, 남편과의 결혼생활의 지겨움에서부터 시골 남자들의 구애 등등으로 환멸을 느끼던 엘레나는 결국 남편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그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결국 안전한 ‘새장’으로 들어가고 나면 어느덧 자살한 이고르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맙니다. 저 멀리서 숲은 활활 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극의 대단원. 커플들은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키스를 퍼붓습니다. 이쯤 되면 체홉인지 트렌디를 표방한 대중극인지 모를 노릇입니다.


 중간 중간 생태적인 메시지를 주장하고, 지식인의 실천을 주장하는 후르쇼프의 선언적 행태는 가히 선동적입니다. “사람은 숲속을 헤매고 있으면서 정작 숲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는 아포리즘은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드라마의 해프닝과 의미들은 크게 각인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은 고민하는 대신, 체념을 택하고 삶의 공허함 대신 행복만을 쫓는 듯 느껴집니다. 다들 행복하게 즐기는데 너무 심각하다구요.


 삶의 진실한 상황을 창출해내는 대신 멜로드라마는 보다 과장된 상황, 과잉된 감정 분출로 삶을 집약합니다. 이는 대중극의 한계이면서 장점이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함’ 이 관객들과 만났을 때, 그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했는가, 이 질문에 <숲귀신>은 어떤 대답을 해 줄 수 있을까요.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무리 힘들어도 이상적인 선과 제휴하게 되고, 구원에 대한 기대와 연속 속에서 강력하고 잔인한 것에 의한 어려움에도 궁극적으로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관객여러분은 과연 그러한 힘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5. 


 T.S 엘리엇은 ‘위대한 드라마는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가장 훌륭한 멜로드라마는 위대한 드라마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엇의 이 말은 멜로드라마가 좋은 극을 쓰는 데 유용한 극적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숲귀신>의 연장선상에 있는 <바냐 아저씨>, 그리고 다시 한국에서 체홉의 전문가로 알려진 연출에 의해 선택된 <숲귀신>. 이들은 서로 ‘멜로 드라마’ 와 ‘위대한 드라마’ 로서의 상보적인 관계를 취합니다. 모던한 사회에서 무능한 ‘희곡’ 으로 자조섞인 봉변을 당해야 했던 작품이 포스트모던한 현대 사회에서 어떤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2시간 40분에 달하는 시간 내내 극장은 웃고, 떠들고, 즐기는 분위기였습니다. ‘의미찾기’ 와 ‘사유하기’ 대신 ‘감각하기’ 로 작품과 소통했던 관객들이 그 주인공입니다. 왜 현대 관객은 즐김으로써, 감각으로써 작품과 소통하는 것일까요. 공표된 이상과 맹세된 순정이 불러일으키는 흐뭇한 감상이 현대인의 한계상황을 그나마 위무해주는 것일까요.


 세상을 선악의 이항대립적인 틀과 시적(詩的) 정의라는 구도 속에서 인생을 담아내려 했던 멜로드라마의 세계관은 복잡하고 다단한 현재 삶의 실체를 담아내기 어렵습니다. <숲귀신>을 주저하고 <바냐아저씨>로 넘어갔던 체홉이 승리하는 인간 대신, 패배하는 인간 그리고 죽음을 택한 인간 대신 겨우 남아 살기를 바란 인간을 그린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리고 관객은 행복함과 이상적인 결말에 호응하며 살아갑니다. 관객이 지니고 있는 감정의 뇌관을 자극시킬 수 있는 연극은 분명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한결같은 감정만을 지향할 때, 감동은 줄어들고 공허하기만 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 말 역시도 지나치게 이론적이고 사변적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무대는 진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연극 장르는 즐겁게 감상하고 소비되어 버리는 대중의 풍속에 온 몸을 내맡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관객은 옳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무대는 진실해야 합니다. 


 체홉은 희극적인 재미를 포기하고, 보다 ‘현실’ 적인 의미를 포착했습니다. 그의 작품이 시간을 견디는 희곡이 되고, 우리가 여전히 150년 된 그를 기억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더욱 관심 있게 지켜 볼 수 있었던 <숲귀신>이었습니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구하기 위해  다시 인간을 관찰하는 작가와 연출, 그리고 관객.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고민을 짚어보는 것. 그러한 시도로 이해되었던 <숲귀신>의 ‘한국 초연’ 이라는 수식어가 모두에게 의미 있어 지기를 바랍니다. 연극만세(萬世)!  





안톤체홉 탄생 150주년 기념공연 체홉의 숨겨진 명작 : 숲귀신


2010년 4월 8일 ~ 2010년 4월 25일
혜화동 게릴라 극장

1890년. 러시아 어느 시골.
조용하고 한가한 러시아 전원에 퇴임한 유명교수가 그의 젊은 둘째 아내 옐레나와 함께 자신의 영지에 쉬러오면서 그곳이 떠들썩해진다. 교수 전처의 오빠인 이고르는 옐레나를 짝사랑하게 되고 심각한 상사병을 앓는다.
또한 마을 남자들 대부분 그녀의 도시적 세련됨과 미모에 반하게 된다. 이고르의 구애는 도를 넘어서게 되고, 이를 경멸하는 숲귀신 흐루쇼프는 숲을 지킬것을, 도덕을 지킬것을 요구하지만 옐레나의 영향력에 기운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느 날 교수가 이 영지를 팔고 핀란드에 별장을 살것을 제안하자 이고르는 늙은 어머니와 자신은 어디서 살라는 얘기냐며 교수에 대한 증오와 자신의 못 이룬 사랑에 대한 자괴감에 권총자살을 하고 만다. 마을은 이고르의 자살사건으로 풍비박산이 나고, 옐레나는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로 인해 어느 오두막에 숨어 지내다가 결국에는 모든 마을 주민들과 함께 화해를 시도하고 시골의 삶은 계속된다.


주최 : 애플씨어터, 게릴라극장
주관 : 문화기획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