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독립으로부터의 독립, 변방으로부터의 변방 - 「다페르튜토 스튜디오」클로징 공연

2010. 11. 9. 16:19Review


"그간 8월달 홍대에서 열린 “독립예술축제” 도 있었고, 9월달 대학로에서 열린 “변방예술축제” 도 있었지만, 이태원에서 묵묵히 행한 이들의 작업이야말로 ‘독립’과 ‘변방’ 을 지향했던 ‘실험’ 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독립으로부터의 독립, 변방으로부터의 변방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클로징 공연



글_ 정진삼






 

국제 공연들의 침공이 계속된 10월의 마지막 날, 이태원의 대안공간 “꿀” 을 찾았다. 7월 16일부터 10월 16일까지 석 달을 이어온 실험예술단체인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작업을 정리하는 "Closing" 퍼포먼스가 상연되고 있었다.


일단, 발음하기도 어려운 ‘다페르튜토’ 라는 말을 설명해야 할 듯하다. 이 말은 연기술에 있어서 “생체역학” 방식을 창안한 러시아 연출가 메이어홀드의 예명(다페르튜토 박사)에서 따온 말이다. "Dapperttuto" 는 ‘어디에든지’, ‘각 도처에서’ (everywhere, all over the place) 라는 뜻의 이태리어다. 범상치 않은 이름에서 이들의 작품이 난해한 실험이거나 혹은 고도의 미학을 추구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들은 자유분방하고, 쉽고, 함께 만들어가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그들이 명시하고 있는 “작업방향” 에 ‘관객’ 이라는 단어가 6번이나 언급될 만큼, 관객에 의한, 관객을 위한, 관객 참여적 공연이기도 하다.


[대안공간 : 꿀의 내부]





이들이 임대해서 사용한 ‘꿀’ 은 3개월이라는 역사가 층층이 쌓인 ‘설치미술’ 적 공간’ 이자 우리들의 ‘무대’ 이며, 이미 예술가들과 관객들이 진기한 이야기를 나누는 살롱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따로 마련된 높은 단상의 무대는 없었지만, 카페의 입구와 벽면, 그리고 반(半)층 위의 공간과 옥상 등등이 무대화되어 ‘꿀’ 을 극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상상의 극장을 찾아온 관객들은 저마다 호기심어린 눈으로 꿀의 공간을 탐색했고, 분주함과 편안함이 오가는 분위기 속에서 공연은 시작되었다.

    

 

[프롤로그 : <심청가> 눈뜨는 대목]





맨 먼저 특별히 초대된 소리꾼이 <심청가>의 한 대목을 읊는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녀 뒤에는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심봉사가 눈을 뜨는 대목으로 소리꾼은 자기 앞에 있는 걸상을 두드리며 소리를 하다가, 휙 몸을 돌려 카메라에 자신을 송출하면, 뒤 벽면에 그녀의 감긴 눈이 클로즈업되어 투사된다. 관객들은 이태원의 실험예술 공간에서 낯설게 만난, 우리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심봉사는 짤막한 소리를 마치며 눈을 번쩍 뜬다. “여기가 어디냐” 라는 외침으로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공연을 여는 것이다.




[No exit 첫 등장]





두 번째로 이어진 공연은 180도 관객의 방향을 돌려 맞은 편 벽면에서 상연되었으며, 입안에 마우스피스를 끼고 들어온 두 명의 배우들이 연기한 <No exit> 라는 퍼포먼스였다. 프란츠 카프카의 <어느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를 바탕으로 원숭이를 연기한 배우는 관객에게 자기가 포획되어 서커스단에 들어가게 된 사연을 관객들에게 고한다. 옆에서는 기타를 치면서 원숭이의 사연을 노랫말로 바꿔준다. 제목의 의미대로 인간에게 잡혀온 ‘원숭이’의 출구없는 슬픈 사연은 오히려 역설적인 의미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해주었다.


이들이 연기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주고받는 형태의 짜여진 대본이 있기보다는, 원작이 되는 이야기가 있고, 이를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방식이 선택되었다. 따라서 즉흥적인 요소도, 돌발적인 요소도 많다. 대체로 그날 그날의 분위기대로 자연스런 흐름에 따르는 방식이다. 아프리카 원숭이는 사냥꾼에게 잡혀 제국으로 강제로 이송된다. 원숭이는 사람들과 똑같이 되기로 결심하고 조련사에게 인사하기와 술 마시기, 담배피기 등을 가르침 받는다. 실제로 공연에서는 연기자들 앞에 임산부가 있다는 난감한 상황을 그녀와 멀찌기 ‘거리’ 를 두고 연기함으로 돌파했다.




[No exit 중에서 감옥에 갇힌 원숭이]



잡혀온 야생 원숭이는 점점 동물성을 상실하고, 만들어진 ‘원숭이성’ 을 수행한다. 원숭이가 자신 있게 서커스단으로 진로를 택하는 모습이 딱하기도 하면서, ‘인간을 연기하는 원숭이’ 를 연기하는 인간의 모습이 메타극적이면서, 희극적이기도 했다. 물론 짧은 에피소드지만 자기 반영/반성적인 사유가 보탬이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없다.





[고도를 기다리며, 소년의 모습]





세 번째 공연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원작에 등장하는 ‘소년’ 은 머리에 거대한 양털 옷을 입고 꿀의 입구에서 등장, (방금 전까지 원숭이였던 인물이 분한) 알베르씨와 대화를 한다. 알베르씨는 소년에게 “고도 선생은 잘 계시냐” 라고 강압적인 질문을 던지고, 소년은 여전히 그렇다고 하면서 침울한 얼굴로 “꿀” 공간을 한 바퀴 돌고 나간다. 허무하지만, 강렬했고, 무엇보다도 소년이 뒤집어쓴 양털의 의상에 끌렸다. 이처럼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수행자들은 의상, 가면, 탈 등의 ‘외피’ 를 통해 손쉽게 인물로의 변신을 꾀한다. 이들은 내면적으로 속을 바꾸는 심리학적인 연기술 대신에, 얼굴에 분칠을 하고 간편한 복장으로 ‘역할’ 을 수행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과 환기를 자연스럽게 이뤄지도록 한다. 물론 과장된 변신을 커버하기 위한 능청스러운 그들의 코믹 연기 또한 일품이기도 하다.




[유령의 집, 백남준 가면을 쓰고 앉아있는 ‘백남준?’]



네 번째 공연은 <유령의 집> 이라는 퍼포먼스로 선택받은 관객들이 불려나와 이러한 ‘다페르튜토’적 변신에 동참하는 작품이다.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의 가면을 쓴 배우가 반 층계 위의 분홍색 카펫이 깔린 무대에 앉아 있고, 기이한 분위기를 유도하기 위해 바닥에는 향초가 피워져 있다. 일본 전통음악이 깔리는 중에 딱딱이를 흔들면, 한 명씩 초대되어 바닥에 앉게 된다. 무리 중에 선발된 관객은 오드리 햅번, 찰리 채플린, 알버트 아인슈타인, 마이클 잭슨,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망자들의 가면을 쓰고 둥그렇게 앉게 된다. 누구의 가면일까 궁금해 하던 관객들은 대통령의 얼굴이 공개되자 탄식과 함께 잔잔한 웃음을 흘려주었다. 이들은 모두 후세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망자에 대한 짧은 추모가 이어지고, 백남준은 조용히 박자를 맞추며 읊조리기 시작한다. “아이... 엠... 그... 라... 운...드... 자기소개 하기.” 진지하게 경청하던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린다. 이에 초대된 유령들은 당황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경쟁적으로 게임에 임했다. 이 판은 예술가와 과학자, 연예인과 정치인이 모여 ‘놀이’ 를 행함으로,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 특히, 유명한 외국인의 이름 대신에 성(혹은 성 대신 이름)을 바꾸어 다르게 불러 교묘하게 변칙을 행한 故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략으로 승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음 작품은 <하얀풍선>이라는 작품으로 “꿀” 의 가운데 공간을 두고 천으로 둘러쌈으로써 밀폐된 공간을 관객이 ‘들여다’ 보는 식이다



[하얀풍선 공연을 보기 위해 머리를 들이댄(?) 관객들]



프로젝터로 쏘아진 벽면에서 두 개의 풍선이 고개를 내밀어 이야기를 나누고, 관객들은 귀를 기울인다.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수염아저씨가 잘 때 이불속에 수염을 넣고 자느냐, 빼고 자느냐, 대한 것이다. ‘의식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는 개념예술에 대한 일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으나, 그들은 이 이야기를 ‘고음대결’ 의 형식으로 풀어낸다. 다소 딱딱해질 수 있는 예술가의 자기해설을 놀이로 엮어낸 점이 재미만점이다. 이어 덧붙여진 ‘분해/해체 되도 고유한 원자성을 지닌다’ 는 이야기는 3개월 동안 “꿀” 공간에서 작업했던 그들의 존재성을 언급하는 것이기도 해서, 이를 알아챈 관객들에게 숙연함을 더해 주기도 했다.



[하얀풍선의 배경역할을 했던 스크린]



이어진 퍼포먼스는 관객들을 모두 거리로 몰고 “꿀”의 입구에서 펼쳐진 ‘민족무용’ 이었다. 본인을 재일교포로 소개한 이는 학교에서 배운 북한의 ‘쟁강춤’ 을 선보이며 자신의 혼란스런 정체성과 혼종적인 예술 퍼포먼스를 선동적인 몸짓과 음악으로 우아하고 진지하게 보여주었다.


[재일교포 아가씨가 선보인 쟁강춤과 꿀 밖에서 관람하는 관객들]





서울의 이태원이라는 공간은 실로 혼종적인 맥락을 지닌 장소이다. 과거 미군 기지가 있었던 곳으로, 주말에는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 쇼핑객들로 붐비며 게이와 같은 성적소수자의 클럽이 있는 곳이다. ‘이태(異胎)’ 라는 말 자체가 ‘다른 뱃속’ 이라는 혼종적인 태생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곳에 자리한 “꿀” 공간에서 만나 역시 대안적인 예술 공간으로 여러 태생의 예술과 사람이 섞여 드는 무국적적, 탈경계적 공간임이 분명하다. 실제로 다페르튜토 스튜디오가 임대해서 사용한 ‘꿀’ 은 3개월 동안 층층이 쌓인 여러 가지 잡동사니와 벽과 천장에 달린 오브제들은 이 공간을 하나의 ‘설치미술’ 로 형상화했다. 관객들도, 외국인을 비롯해서 일반인과 예술가를 망라하는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었다.



[꿀의 잡다하고 키치적인 실내장식]

 


알고 보니 3개월 동안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고, 즐거워했고,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예술적 추억이 서린 공간이었던 셈이다. 그간 8월달 홍대에서 열린 “독립예술축제” 도 있었고, 9월달 대학로에서 열린 “변방예술축제” 도 있었지만, 이태원에서 묵묵히 행한 이들의 작업이야말로 ‘독립’과 ‘변방’ 을 지향했던 ‘실험’ 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꿀 옥상 벽면에 새겨진 공간이념]

 


이어진 공연은 <타자>라는 공간으로, “꿀” 의 옥상에서 펼쳐졌다. 이미 시간이 흐른 뒤였고, 고정좌석이 아니라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꽤 많은 관객들이 자리를 지키고 퍼포먼스에 동참했다. 퍼포먼스를 행한 배우는 실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를 하면서,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이웃집 벽면에 크게 투사했다. 불빛으로 보여진 작은 개인과 확대된 개인은 서로 자기의 역사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면서 진실함을 더해주었다.




 
[타자 공연중에 이웃벽면에 투사된 거대한 얼굴 형상] 

  



마지막으로 상연된 작품은 <암세포 삼형제> 였다. 제목부터 웃음기가 유발되는 이 장난스러운 공연은 제주도의 ‘영감놀이’ 라는 ‘굿’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도깨비(도채비)의 형제를 불러들여 병을 쫓는 이야기가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에서는 현대적으로 ‘암세포 삼형제’로 변형되었다. 이 공연은 벽면에 프로젝트로 ‘텍스트 입력 프로그램’ 으로 중계되는데, 암세포 삼형제의 액션이 지시문처럼 벽에 제시되면, 이를 보고 수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일본의 전통 피리인 샤쿠하치 소리가 들리면 일본인의 복장을 한 세 명의 형제들이 들어온다. 바로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마치 가부키를 행하는 듯한 진지한 표정의 암세포 3형제다. 이들은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종이로 만든 초대형 검은 학을 쓰기도 했다. 이들은 전통 ‘굿’ 을 모티브로 한 텍스트에, 가부키를 흉내낸 연희방식에, 인터랙티브를 구동하는 미디어의 퍼포먼스 방식을 일차원적으로 시도한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이 공연은 여러 맥락이 패러디화되어 짜여진 ‘거대한 농담’ 인 셈이다.




                                                      [암세포 삼형제 중 막내]



암세포 형제 중 막내는 한 사람의 관객을 찍고, 그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와중에 형제들은 서로 반가워하고, 또한 관객들을 희롱한다. 이러한 행위는 미리 벽면에 지시문처럼 제시되어, 앞으로 하게 될 행동을 인지한 관객들에게 더욱 코믹하게 받아들여졌다. 마지막으로 암세포는 술을 마시고 놀이를 함으로써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것으로 에피소드가 종결된다. 이로써 다페르튜토의 공연도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암세포는 생체가 갖는 항상성에 지배되지 않고, 자율성을 갖고 증식하는 돌연변이적 세포인데, 웰메이드(well-made)를 추구하는 계획된 기성 예술에 대한 이들의 저항이 상징처럼 드러나 유의미한 맥락으로 읽을 수 있었다.





                                                 [암세포 삼형제중 첫째와 둘째]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작업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삶’ 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예술’ 을 스스로 찾고, 지키려는 시도일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제도권에 속한 ‘예술’ 의 대안으로서 ‘예술’ 이면서, 실험을 자칭한 예술에 대한 대안이기도 할 것이다. 끊임없이 고정된 의미를 만들지 않고, 현장 속에서 참여자들 중에서 의미와 재미를 발견하는 작업. 덕분에 함께한 관객들은 행복해했다. 난해함에 주눅들지도 않았고, 의미 없음에 실망하지도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 풍성한 상상력과 즐거움을 나누었던 퍼포먼스, ‘포켓연극’ 으로 ‘동네잔치’ 에 기여하겠다는 발상.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솔직하고 야심찬 포부다.




                                             [꿀 벽면에 걸린 그들의 작업일지]






ps. 이들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다음의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1월 중순에 공연이 계획되어 있다고 하니까 이들의 작업에 관심 있는 분들은 직접 찾아보아도 좋을 듯 하다.


www.dappertuttostudio.com








제작_다페르튜토 스튜디오 [적극, 오륭, 구세주, 공예지, 박한결]
장소_이태원 “꿀”
일시_2010.1031

다페르튜토: (사전적 의미: 도처에, 어디로나 흐르는)
현대 어느 실험연극인의 공연명.
그는 기득권 배우가 운영하는 왕실극장에서는 메이예르홀드라는 실명을 사용하나,
자신의 관객을 위한 아뜰리에에선 ‘닥터 다페르튜토‘라는 이름을 사용함.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는,
꿀을 3개월간 임대하여 작품 만드는 법을 연구하는 연극과 미술 아뜰리에를 총체적으로 일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