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지금 우리에게 광주는

2012. 5. 18. 23:39Feature

 

지금 우리에게 광주는

 

일시_2012년 5월 12일(월) 오후 5시 반

장소_대학로 타셴

참석_명행, 웅달, winnie, 연두콩, 사과

리경(사회), 지혜로운 늑대의 전사(정리)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사진 = 네이버 영화]

 

다시, 5․18입니다. 별 일 없이 하루가 가겠지요. 그렇지만 그때 그 곳에는 사람들이 살았었고, 지금 이곳에도 사람들이 (같은 경험과 기억을 공유했든 아니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디언밥에서는 문득, 5․18을 경험하지 못한 다음 세대로서 태어나(제목의 ‘지금 우리’ 중에서 ‘우리’를 이루는 사람들은 78년에서 86년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광주에서 자랐다가 현재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예술 쪽에 종사하여 삶과 예술 사이에서 다양한 시선의 교차를 경험하고 있는 분들을 어렵게 섭외하게 되었고요. 좌담에 함께 하신 다섯 분의 패널은 광주 출신 연극 연출가, 광주 출신 영화감독, 광주 출신 연극 이론가와, 비광주 출신 배우 한 분, 그리고 비광주 출신 비예술 종사자 한 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모두 공통적으로 연극 <푸르른 날에>와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참석하셨고요, 그럼에도 모두 저마다 각기 다른 삶과, 다른 시선, 다른 부채감, 다른 소망을 품고 계셨습니다.

 

패널 소개

리경    안녕하세요. 먼저 간단하게 각자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명행    네, 저는 극단 마방진에 소속되어 있고, <푸르른 날에> 공연하고 있는 배우 이명행입니다. 반갑습니다.

winnie    저는 연극이론을 공부하고 있고요, <푸르른 날에> 배경이었던 도청 근처에서 여고를 나왔어요. 이 자리에 있게 된 이유는 그거인 것 같아요. (웃음) 반갑습니다.

연두콩    연극 연출을 배우고 있어요. 저도 광주 출신이라서 초대를 받게 된 것 같고요, 문래동에 작은 작업실을 두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사과    저는 광주 출신이 아니고요, 연극 쪽에 종사하지도 않고요, 그냥 일반인입니다. (웃음) 그런 성격으로 저는 여기 왔고요, 같이 얘기하게 돼서 무척 기대가 됩니다.

웅달    저는 광주 출신 영화인으로 왔다고 하는데요. (웃음) 광주 출신이고, 84년생입니다. 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고요, 장편을 연출한 것은 없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연극 <푸르른 날에> - 웃음에 대하여

<푸르른 날에>의 한 장면, 광주 시민군 [사진 = 남산예술센터]

 

리경    아무래도 저희가 <푸르른 날에> 공연을 다 보셨으니까, 공연을 어떻게 봤는지부터 얘기를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진행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명행    (괴로워하며) 청문회 같아요. (폭소)

사과    저는 약간 팬미팅 같은데요. (폭소)

리경    일단, 공연 자체가 어땠다라고 얘기하시는 것도 물론 좋을 것 같고요. 한편으로는 각자 본인이 갖고 계셨던 광주의 이미지가 있을 텐데요. 경험을 했던 것이든 매체를 통해 학습이 된 것이든, 광주에 대한 이미지, 특히 5․18이라는 사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을 가지고 <푸르른 날에>를 봤을 때 어떠했는지를 얘기해주시면 아마 좌담의 성격과도 맞을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비광주부터 얘기를 들어볼까요? (웃음)

사과    공연은 일단 잘 봤고요, 무척 신선했어요. 이 공연을 두고 광주를 웃음과 함께 다루는 것에 대해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고 들었는데, 그 점도 저는 신선했어요. 처음 볼 때는 사실 광주라는 주제가 그렇다 보니, ‘이 상황을 어찌해야 되지? 내가 지금 웃어도 되나?’ 하는 고민들도 했었는데요. 공연 말미에 가서는 왜 그렇게 웃음을 주고 싶었는지 제 나름대로 이해하게 됐어요. 너무 아프니까, 너무 무겁게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신선했어요. 또 주인공이 민주화운동에 오롯이 투신해있는 분이 아닌, 그 안에서 고민하는 분이었고, 그 분의 삶에 주목한 것도 인상 깊었어요. 모두가 다 피해자이고 모두가 그런 상흔들을 안고 살아오고 있다는 데 주목하게 되어서, 그런 면에서 더 아프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이런저런 시각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만족스럽고 신선했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바라봤으면 하는 새로운 관점이 제공된 게 아닌가 싶어요. 완전히 무겁게 사실 위주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이 모두 갖고 있는 아픔들, 그 마음들에 집중해서 사건을 바라보자는 그런 관점이요. 좋은 시기에 좋은 관점을 제공해주는 좋은 연극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개인적으로 감명 깊었던 장면은 무대 인사 때 주인공 두 분이 포옹하신 거였어요. 과거를 딛고 일어선 지금,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서로 보듬어주는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 점이 이번 연극에서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화해와 함께 현재의 행복과 웃음을 되찾는 것. 희망을 주는, 감명 깊었던, 새로운 공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좋았어요. (잠시) 준비해온 건 다 한 것 같습니다. (폭소)

리경    예, 대사 외우듯이. (웃음)

명행    준비 되게 많이 해 오셨네요. (웃음)

사과    네, 이제 열심히 들어보려고요. (웃음)

리경    네, 확실히 슬픔을 부각시키려고 하기보다 웃음으로 풀어갔다는 점이 얘기할만한 부분인 것 같아요. 그 점에 대해 어떻게 보셨는지, 혹은 그거 말고도, 어떻게 보셨는지 더 얘기해주세요.

winnie    저는 아까 말했다시피 도청 근처에 살았고, 그 학교를 나왔고, 어렸을 때 그 당시를 살았던 20대 삼촌 이모들이 저희 집에 같이 살았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사는 게 일상이었죠. 그래서 저는 다른 지방 출신 사람들이 만든 5․18 관련 영화나 연극을 볼 때, 과연 어떻게 보고 어떻게 만들었을까를 먼저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내용은 솔직히 별로 궁금하지가 않고요. 그런데 기존의 것들은 너무 무겁잖아요. 광주 출신인 저희가 봐도 공감이 안 되는 느낌도 있어요. 무겁기만 하면 더 반감을 줄 것 같고, 알려야 하는데 더 차단시키는 것 같고.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게 없으니까, 보면서 좀 마음이 편했어요.

명행    실례지만 나이가?

winnie    저, 78년생입니다.

명행    음. (끄덕 끄덕)

winnie    왜 그렇게 깊은 끄덕임을? (폭소)

연두콩    저도 좀 비슷한 걸 느꼈어요. 저는 참고로 83년생이고, 겪지는 않았는데, 주변에서 늘 5․18에 대해 듣고 자랐고, 학교에서 5월만 되면 행사하고, 백일장도 나가고, 웅변대회도 나가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연극을 보고 나서는, 일단 마음이 편했어요. 되게 무겁게 볼 수 있는 주제였잖아요. 저도 사실 겪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남의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상하게 그게 남의 일 같지 않은 부분이 있거든요. 그래서 항상 영화를 봐도 마음이 무겁고 그랬는데 이번 연극은 즐겁고 편하게 봤어요. 그런데 연극이 끝날 때까지 들었던 생각이, 어떤 측면에서는 광주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일단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사랑 이야기에 중심이 많이 맞춰져 있었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고요. 두 번째는 주인공들이 사투리를 안 쓰잖아요. 그게 조금, 계속 이질감을 느끼게 만들었어요.

winnie    저도 그 생각 했어요.

연두콩    예를 들면 동네 건달들이나 못 배운 아저씨들은 사투리를 쓰고 주인공들은 안 쓰니까요. ‘주인공하고 여주인공 남동생이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그래서 뭔가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이 이 사태를 이끌어갔나?’ 이렇게 약간 헷갈릴 정도였어요. 그 점이 조금 아쉬웠던 것 같아요. 연극을 보고 나서 바로 <화려한 휴가>를 봤는데, 거기서도 주인공들이 사투리를 안 쓰더라고요. 찾아보니까 연출이나 감독은 관객들이 잘 못 알아들으니까 잘 전달하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던데, 그게 약간 서럽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말 자체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 같아서요. <친구>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쓰고, 거기 담긴 이미지가 멋진 남성성으로 표현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약간 이질감을 느꼈어요.

연극 <푸르른 날에> - 사투리에 대하여

리경    (배우에게) 주인공의 말에 대해서는 얘기된 것이 있었나요?

명행    텍스트 원작 자체가 표준어로 쓰여 있기도 했고요. 저나 정혜나 기준이나, 원래 설정이 토박이는 아니에요. 우리는 전남대 학생이라서 거기 있는 것이지, 토박이로 광주에서 나고 자라서 전남대에 들어간 설정은 아니었거든요. 우리 집안은 보성에 차밭이 있고, 회사는 사실 서울에 있고, 진호 형이나 나는 서울 쪽 사람인 거죠. 그런데 사실은 연출님이 초반에는 과장된 신파로 끌고 가고 싶어 하셨어요. 그래서 말 자체를 옛날 영화 말투 같은 걸로 가져가다 보니까, 거기에다 또 사투리를 얹기가 좀 까다로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극단 스타일인데, 말을 두두두두 스피디하게 치거든요. 그래서 대사량이 많지 않은 작은 역할들은 잠깐씩 사투리로 써도 무방하지만 주인공들은 대사가 몇 줄씩 되는데, 우리 극단 식의 스피디한 에너지를 유지한 채 사투리로 밀고 나가기가 무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최초에 별 거부감이 없이 했던 건 작가님의 텍스트 자체가 사투리가 없는 거였기 때문이었고요. 처음 텍스트는 아예 <화려한 휴가>처럼 사투리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고선웅 연출님이 전라도 분이시거든요. 그래서 연출님이 각색하면서 사투리가 조금 더 들어온 거였죠.

리경    원래 사투리가 없는 텍스트에 거꾸로 첨가를 한 셈인가요?

명행    원작은 정경진 작가님이 차범석 희곡상을 받은 텍스트인데요, 사투리 외에도 연극적인 맛을 조금 더 살리기 위해서 고선웅 연출님이 각색을 하신 부분들이 있어요. 김남주 시인의 시도 그때 들어간 거고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지만 원작에서는 주인공도 그렇고 조연들도 사투리를 거의 안 썼는데, 말을 많이 바꾸면서 연출님이 사투리를 넣으셨죠. 건달들이나 청소 아줌마 등은 사투리를 적극적으로 쓰게 하고요. 그런데 몇 번 들었어요, 왜 주연들은 사투리를 안 쓰냐고. 저희는 그냥 전남대생이라고 얘기해요. 사실 ‘나는 광주 시민인디’ 하고 나서는 건 왕배가 하고 있고, 기준이 같은 경우는 노동자들 가르치면서 인권을 고양시키던 당시 대학생들 중 한 사람이고, 사실 저는 이도 저도 아니거든요. 저는 연애만 하고, 기준이도 안 갔으면 해서 말리고. 그런 입장에서 봤을 때는 제가 굳이 광주 사람이라는 설정은 없고, 타지방 사람인데 대학을 여기서 다니다 보니까 사건에 휘말리는 인물로 나오게 된 거죠. 그래서 저는 캐릭터를 만드는 데 있어서는 말을 그렇게 하는 게 별로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아요.

winnie    타지방 사람이기 때문에 갈등할 수도 있었겠네요?

명행    그렇죠. 저는 사실은 도청에 들어가는 것도 기준이가 간다니까 챙기려고 가는 거지, 직접 총을 쏘거나 저쪽 군인들한테 어떻게 하려고 가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쉽게, ‘기준이랑 안 친했어요, 살려주세요’ 하는 캐릭터가 되는 거죠. 애초에 이념적으로 뭔가가 없었던 인물이라서요.

리경    아까 두 분은 광주 분이시라 ‘주인공들이 왜 사투리를 안 쓰지?’ 하셨다고 했는데, 저는 광주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몰랐어요. 그게 전혀 걸리지 않았어요. 아마도 출신이 그렇다 보니까 사투리에 대한 감각이 덜 민감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투리 얘기가 나오니까 무척 신선했어요. 그게 감각적으로 걸릴 수 있는 문제구나 싶고. 혹시 다른 분들은 어떠셨어요?

사과    저는 전혀 몰랐어요. (웃음)

웅달    저는 광주 출신이지만, 사실 이번 연극을 보면서는 그게 그렇게 걸리지 않았어요. 그 이유를 혼자 생각해보고 있었는데, 아까 말씀하셨듯이 <친구> 같은 데서는 경상도 사투리가 일괄적으로 나오잖아요. 그런 영화들은 많았죠. 그런데 광주 사투리나 전라도 사투리가 전체적으로 나오는 영화나 연극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랬기 때문에 저는 그 연극이 광주 이야기지만 주인공들이 사투리를 안 쓰고 있어도 어색함을 못 느꼈던 것 같고요. <화려한 휴가>도 보고 왔는데, 거기서도 인물들이 사투리를 안 쓰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의식하고 ‘저 사람들은 왜 안 써?’ 하기 보다는 그냥 ‘그러나 보지’ 하고 넘어가게 됐었어요.

winnie    저는 그게 걸렸다기 보다는, 원래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사투리를 안 쓰게 되기도 하고, 지방에도 안 쓰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안 쓰는 와중에 남아있는 전라도 억양이 있거든요. 그런 캐릭터를 새롭게 만들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상도는 그런 캐릭터가 있는 것 같은데, 전라도는 깡패나 폭군 이외에는 이미지가 없잖아요. 그래서 전라도 억양은 있지만 아주 지적인 캐릭터가 만들어지면 재밌을 것 같아요.

웅달    얘기 들으니까 질문이 하나 생겼는데요. <스카우트>라는 영화에도 5․18이 조금 다루어지고, 주인공들이 그 시대에 휘말리는 정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화려한 휴가>에도 그렇고 그 영화에도 그렇고 박철민씨가 동시에 나와요. 그런데 캐릭터가 비슷해요. 과장된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서 웃긴 캐릭터. <스카우트>에는 조폭 같은 걸로 나오고요. 박철민씨 연기하시는 거 들으면 어떠세요? 저는 사실 그 분 사투리가 틀린 건 아닌데, 분명히 우리가 광주에 살면서 듣는 억양하고 다른, 뭔가 웃기려고 만들어진 억양 같다고 항상 느끼거든요.

연두콩    그 분이 전라도 분이고, 그래서 그런 역할을 많이 맡는다고 알고 있어요. <위험한 상견례>에서도 그렇고 대부분의 영화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캐릭터인데, 늘 비슷한 것 같아요. 과장되고, 웃기고, 어떤 때는 위협감을 주는데 그게 아주 무서울 만큼은 아니고. 어딘지 한 번 가공된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요. 그게 기분 나쁘게 보면 나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캐릭터가 아주 멋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못 배우고 깡패 같은 느낌으로 많이 등장하니까요. 그런데 제가 서울에 와서 박철민씨 같은 사투리를 친구들한테 쓰면 되게 좋아해요. 그래서 뭐, 저도 가끔 이용하니까. (웃음)

리경    부산 출신 친구들이 영화에서 부산 사투리 나오는 거 보면서 뻥이라고 얘기하는 걸 많이 들었어요. 진짜 그 곳에 사시는 분들이 들었을 때는 배우들이 연기를 하면서 만들어내는 것들이 어색하거나 가짜 같은 부분이 있겠죠.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부산 사투리는 뭔가 터프하고 남성적이고 의리 있다거나, 그런 식으로 지역의 사투리마다 이미지가 있는 것 같네요. 전라도 쪽은 웃기거나 깡패 같다거나.

연두콩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연극이든 영화든 작품에 사투리를 쓰는 캐릭터가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게 나올 수 있으면 좋을 듯해요. 제가 원래 말에 좀 민감해서 그런지 <화려한 휴가> 보면서 신경이 많이 쓰였거든요. 거기서 진짜 전라도 사투리 같으면서도 무식하기만은 하지 않은 역할이 하나 있었는데, 나문희씨가 그랬어요. 아들을 찾고 기다리는 역할인데, 전라도 식의 가공된 사투리로 지역색을 나타냈다기보다, 그 자체로 아주 연기력을 갖춘 캐릭터로 잘 만들어진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게 좀 다양해졌으면 좋겠어요. 사투리를 쓴다 안 쓴다의 문제라기 보다요.

winnie    저는 <푸르른 날에>에서 표준어를 쓰는 걸 보고,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광주 출신 사람이 방학을 맞아서 광주에 내려왔다고 생각했어요. 잘 사는 집 아들이었다면 그 시대에 당연히 서울로 유학을 갔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건 원래 텍스트와는 정반대로 이해했던 거네요.

명행    사실은 저희 공연이 리얼한 지점에서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에요. 만약에 스타일 같은 걸 버리고 리얼한 드라마로 갔으면 그 부분을 굉장히 고민했을 것 같아요. 설정 상 얘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살았으니까 사투리를 쓰고 안 쓰고. 그런데 우선 어쨌든 이 공연이 재현 드라마가 아니고,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있어서 사투리보다는 다른 것, 가령 빠르게 치는 대사나 옛날 신파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것 등에 중점을 둬서 그렇게 간 것 같아요.

연두콩    저는 연출의 그런 선택이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워낙에 이 연극이 5․18의 실화를 재현하겠다고 하는 게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비광주 출신들이 보고 이해하기에는 쉬웠을 테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는 속사포처럼 쏟아내거나 신파 같은 말투를 썼던 것이 잘 맞아떨어진 듯해요. 다만 저의 마음 상태는, 광주 얘기를 했다고 하니까 ‘이건 우리 얘기다’ 하는 게 생겨서, 그렇게 볼 때 거슬리는 게 있었다는 정도였어요.

winnie    전체 흐름이 이 사투리의 디테일 때문에 이해가 안 됐다는 것은 아니고, 조금 아쉬웠다는 정도고요. 선택은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연극 <푸르른 날에> - 어떤 시선을 선택할 것인가

 

<푸르른 날에> 엔딩 장면 [사진 = 남산예술센터]

리경    아무래도 광주 출신이신 분들은 공연을 볼 때도 어떤 리얼리티를 상정해 놓고 그걸 어떻게 재현했는가를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광주 출신이 아닌 분들에게는 그림이 명확하게 있지 않으니까요, 혹시 비광주 출신이신 분에게는 인상 깊었던 장면이 무엇이었는지요?

사과    저는 대체적으로 웃음을 주는 장면들이 인상 깊었어요. 사실 저는 비광주 출신이지만 광주를 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 그걸 기억해야 한다는 어떤 부채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편이라서, 광주에 관련된 무엇이 있으면, 광주 분들보다 더할지 안할지는 모르겠지만, 리얼리티가 더 살아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그게 일반인들에게 많이 강조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5․18을 얘기하는 데 있어서, 이번 공연은 그런 무거움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의 아픔이나 애환을 바라보는 쪽으로 전환하는 한 축으로서 위트나 웃음을 가져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리얼리티의 포기는 아쉽지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측면에서는 위트 있는 장면들이 인상 깊었습니다.

명행    공연을 하는 입장에서는 무척 고민이 되는 지점이죠. 작년 공연 때만 해도 왜 이렇게 장난을 치느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우선 연출님은 연극 자체를 사람처럼 만들고 싶다고 말씀하세요. 어떤 사람은 누가 봤을 때는 지루할 수도 있고, 그런데 아침엔 굉장히 쾌활하고 밝을 수도 있고, 어느 순간 침울할 수도 있고. 그러면서 그 사람을 알게 되고 정이 쌓이고 하는 거지, 늘 밝은 사람이면 ‘쟨 뭐지?’ 싶을 테니까요. 심각하지만, 풀어주기도 하고, 더 이완시키다가 갑자기 조이기도 하고. 주제도 약간 그런 측면이 있죠. 관객과의 대화를 하면, 광주에서 오신 분들이 계세요. ‘저는 광주에서 왔고, 이 공연을 너무 잘 봤다’ 하시는데, 어떤 쟁점이나 핵심을 좀 더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들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핵심이라 하면 도청에서의 장면들이나, 그런 아픔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겠죠. 사실 이 공연이 결국은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다시 화해로 만나게 되는 지점에서 끝나는 거잖아요. 그래서 아까 누가 말씀하셨듯이 사랑 얘기로 마무리될 수도 있는 건데, 그게 아니라 광주의 이야기로, 광주나 그 시대를 겪은 분들의 아픔 등을 더 세세하게 보여주는 쪽으로 진행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표하는 분들이 계신 거죠. 저희도 그런 주제나 표현에 있어서 나름대로 고민을 했었어요. 그랬는데 어쨌든 저희는 텍스트를 형상화하고 연기해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연출님은 그런 질문을 받으시면, 그런 무거운 것을 재현하고 그 상처들을 헤집어서 눈앞에 전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화해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30년이 지났고. 사실 저는 올해 재공연을 하면서 새삼 느낀 게 있는데요, 처음에 어떤 군인이 필수라는 학생 머리를 깨뜨려서 죽이잖아요. 그때 죽이면서 ‘이 빨갱이 새끼’ 라고 하는데, 저는 그 군인이 너무 슬프더라고요. 군인이라고 따져보면 스물 둘 셋의 젊은이인데, 얘가 무슨 이념이 있고, 아무리 교육을 잘 받았다고 해도 얘가 무슨 생각이 깊어서 ‘이 새끼는 빨갱이 새끼다’ 규정을 짓고 필수를 죽여야만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 지점에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어쨌든 연출님은 이 작품에서 화해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하시고, 그런 연출님의 생각도 사실 그저 한 사람의 생각일 뿐이겠지만 저희는 그걸 믿고 표현한 거고요. 그런데 또 한편 개인적으로는, 5․18이 그래도 될 만한 이야기인가, 화해를 지금 시점에 얘기해도 되는가 싶기도 해요. 화해와 사랑 이야기로 광주를 포장하는 것이 정말 맞는 이야기인가. 사실 제가 볼 때는 군인도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고 또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게 불쌍해 보이는 지점이 있지만, 광주 분들이나 혹은 직접 겪으신 분들을 생각하면 너무 섣불리 어떤 것을 제시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거든요. 어쨌든 저는 직접 겪어보지 못했고, 제가 혹 섣부르다 판단할지라도 이 시점에서 우리 작품이 제시하는 메시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믿고 가고 있어요. 하지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 거죠.

사과    요즘 한창 상영하고 있는 태준식 감독의 영화 <어머니>라는 게 있는데요,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님의 삶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에요. 제가 유가족 분들이 모여서 시사회 하는 걸 봤었는데요, 그 영화는 어머니의 사람에 대한 사랑, 사람을 품는 따뜻한 마음들을 펼쳐내거든요. 그런데 유가족 분들이 보시기에는 아쉽고 힘든 지점이 있었던 거예요. 그 삶 속에 녹아있는 노동자들의 아픔과 그것들을 위한 투쟁을 왜 다루지 않았느냐는 거죠. 그래서 많이 힘들어하시더라고요. 그만큼 다뤄지지 않았던 문제고 아직은 더 많이 밝혀져야 하는 것들이라, 이런 기회를 통해서 좀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이 크셨나 봐요. 그런데 그 마음도 이해가 되지만 제가 볼 때 감독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처절한 삶보다 그들을 품어온 어머니의 일대기를 다루고 싶은 부분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이게, 창작하시는 분들 입장에서 너무 고민될 것 같고, 또 직접 피해를 입고 지금도 그걸 안고 살아가시는 분들에게도 너무 힘든 문제인 것 같아요. 이번 공연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서로의 힘듦이 절충되지 못하는 모호한 선이 있을 거라는 생각. 그럼에도 제가 이번 공연을 좋게 볼 수 있었던 건, 물론 사실적인 처절함을 더 담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 당시를 살았던 모든 이들의 아픔들을 다양한 언어로, 다양한 시각으로 이야기해줄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명행    사실 젊은 친구들한테는 교조적일 수 있잖아요. <화려한 휴가>만 봐도 그런 끔찍한 장면들이 많고. 그러면 누구나 죄의식을 갖게 되잖아요.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 시민 단체라도 들어가야 하나? 뭔가 해야 하나?’ 하는 부채 의식을 갖게 되는데, 그런 부채 의식이 어쩌면 더 큰 에너지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런 교조적인 지점이 들어오면 일종의 거부감도 생기잖아요. ‘왜 이렇게 부담스럽게 막 이러지?’ 싶기도 하고. 신문 기사 등을 보면 저희 공연에서 그런 것들을 좋은 점으로도 뽑더라고요. 젊은 분들이 5․18을 잘 모르거나 잊고 지내곤 하는데, 그것을 어쨌든 재미있게 환기시켜서, ‘그 사건이 뭐지?’ 하고 한 번 더 돌아볼 수 있게끔 하는, 그런 정도의 에너지. 그 지점이 있는 듯해요.

winnie    저도 광주 출신이지만 위트 있는 그 선택이 정말 좋았어요. 잘못하면 이게 정치극이 되잖아요. 선동적으로 되고요. 솔직히 광주 사람들도 그렇게 다루는 거에는 반감이 있어요. 그런데, 불만을 표했던 광주 분들의 마음도 또 이해가 돼요. 제가 97학번인데 2000년 즈음 5․18때 서울에 놀러 온 적이 있었어요. 5․18이지만 광주에서는 놀아도 되는 날이거든요. 물론 상처가 있지만. 그런데 서울은 너무 조용하더라고요. 그게 충격이었어요. 불만을 표하신 분들이 아마 그런 느낌이었을 것 같아요. 광주에서는 이제 5․18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축제처럼 웃으면서 말을 하고, 지나가다가 ‘어, 저기에 묻혔어. 여기서 누가 죽었지.’ 하는 게 그냥 일상처럼 들어와 있는 얘기인데, 그래도 타지방에서 가볍게 얘기하면 조금 반감이 들기도 하거든요. 그 정도인 것 같아요. ‘더 알고 난 다음에 말해야 하는 게 아니냐’ 하는 정도. 이건 예술계가 풀 문제라기보다 다른 데서 다뤄줘야 하는 문제인 것 같아요. 예술은 두 가지 선에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고요.

연두콩    그리고 사실 실제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시기에 힘든 기억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진 않잖아요. 제가 저희 부모님 얘기를 광주 출신이거나 직접 겪으신 분들께는 부끄러워서 사실 못 해요. 왜냐하면 저희 오빠가 81년생인데, 저희 부모님은 80년도에 연애를 하셔서 오빠를 만들고 결혼을 하셨어요. 그런데 저희 엄마하고 아빠가 친해진 계기가 사실 5․18이었어요. 아빠가 당시에 아직 그렇게 가깝지 않았던 저희 엄마의 집으로 인사를 하러 갔는데, 그 날이 5월 18일이었던 거예요. 거기가 도청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죽고 총알이 날아다니고 하니까, 아직 남녀가 유별한 시기지만 저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위험하니까, 나가면 죽으니까 나가지 말라고 하셔서 일주일 동안 아빠가 외갓집에 갇혀 있었던 거예요. 그 시간은 사실 엄마와 아빠의 기억에는, 사랑이 꽃피었던 시기인 거죠. 무섭긴 하지만. 위로 총알이 지나다니긴 하지만. 엄마 아빠가 저한테 그 얘기를 해주셨는데, 저는 어릴 때 주변 어른들이나 학교 선생님들 중에도 5․18때 제자들이 죽은 분들도 많고 해서 맨날 그런 얘기를 하시고 또 사진전에서도 끔찍한 사진들을 많이 보고 하니까, 어디 가서 우리 부모님은 5․18때 사랑이 맺어져서 오빠가 만들어지고 했다는 그런 얘기를 못해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런 사람도 있었던 거잖아요. 물론 저희 엄마도, 이모가 5․18때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3일 동안 안 들어 왔대요. 그래서 이모가 죽은 줄 알고, 조금 잠잠해진 후에 아빠랑 같이 도청에 가서 이모 시체를 찾았대요. 그런 기억은 있죠. 끔찍한 기억이잖아요. 전쟁과도 같은 기억이고, 길거리를 지나가다가도 몰래 사람들 맞는 거 보고, 발가벗겨져서 지나가는 거 보고. 그런 것들이 대부분의 광주 사람들이 겪었던 실제 끔찍한 경험이고 기억이긴 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들도 있는 거니까요. 그걸 다양하게 풀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화려한 휴가>를 보고 불편했던 점 중에 하나가, 마지막에 굉장히 감정적이게 이끌어갔다고 하는 것. 그런 게 두려웠어요. 다른 지방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느낄까. 너무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았나. 실제로도 네이버 영화평에 보니까 <화려한 휴가>가 <실미도>랑 다를 게 뭐냐는 말이 있더라고요. 한편으로는 광주 사람들을 여전히 폭도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걸 엄청난 혁명가로 묘사한 쓰레기 같은 영화다 하는 평가도 봤어요. 저는 <푸르른 날에>가 다양한 측면을 다룬 점에서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광주의 이면, 사람 사는 이야기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사진 = 네이버 영화]

 

리경    두 분이 광주에 대한 기억을 말씀해 주셨는데요. 그런 부모님 이야기는 저희에게 또 새롭게 다가올 수 있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시간이 어떤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시간에 대한 기억일수도 있네요. 혹시 광주에 대한 기억이나 부모님 얘기, 지인 얘기, 또는 개인적인 경험이 있으시면 얘기해 주시겠어요?

웅달    5․18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고요. 제가 84년생이니까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사실 저는 광주 5․18 얘기가 나오면 직접적이진 않지만 어떤 부채 의식이 있는 게, 저희 집은 사실 민주화 운동이나 대의적인 면에 대해서 정반대되는 가풍이랄까, 그런 분위기가 있어요. 제가 지금도 아주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과거가 있는데, 지금은 공원이 잘 만들어져 있지만 저희 어릴 때 망월동에 가면 피투성이에 깨어진 얼굴 사진 같은 것들이 마구 트럭에 실려서 전시되어 있었거든요. 어린 마음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죠.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걸 처음 알게 되고 인식했던 게 7살, 8살 즈음이었는데, 저희 집안은 다 무사하니까, 한 번 물어봤어요. 아버지나 할아버지한테. ‘저희 집안에서는 누가 나와서 싸우지 않았나요?’ 그때 할머니가 대답하셨어요. 굉장히 자랑스럽게. 저희 아버지는 그때 교사 임용되고 얼마 안 된 시점이라 광주에 안 계셨고, 아버지가 광주일고라고 광주에서 명문이라고 하는 학교를 나오셨는데, 그 당시가 고등학교에서 학생 운동을 많이 할 때였거든요. 아마 70년대 후반 유신정권 타도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사발통문이라고, 지방별로 시위를 같이 하자고 돌리는 통지인데 그 전달책이 끊기면 다 잡혀가는 식의 시스템이 있었어요. 저희 아버지가 그걸 집에서 받고, 다른 학생한테 전달을 하지 않으면 못 모이는 거죠. 그런데 그걸 저희 할머니가 숨기셨었다고, 손자인 저한테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신 거예요. ‘그때 만약에 너희 아버지가 그걸 받고 시위에 나갔으면 너희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 말이 전혀 어떤 반어법적인 게 아니라, 어머니로서 스스로 잘 하신 일에 대해 너무 자랑스럽게 얘기하시는데, 저한테는 어린 마음에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왜냐하면 학교에서는 5․18이 민주혁명이었고, 그때 희생당하신 분들이 얼마나 고귀하신지 등에 관해서 가르치는데, 정작 집에서는 ‘그런 거 절대 나서지 말아라. 서울 가서도 절대 시위하지 말아라. 절대 튀지 말고 자라라. 그냥 무덤덤하게 묻혀서 살아라.’ 이런 게 가풍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 그런 집안 분위기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어쨌든 제가 광주나 5․18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들은 그런 거였어요.

 

웅달(웅크린 달이 노래한다)씨의 자화상

연두콩    그런데 확실히, 다른 분들도 그러신지 모르겠는데요, 저희 부모님이나 주변 분들이 제가 서울로 대학을 갔을 때 제일 공포스러워 했던 부분이 시위에 참가하는 거였어요. 그게 일반적인 공포가 아니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주의를 주셨죠. 그리고 저도 사실 어릴 때 전남대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늘 봐왔던 것들도 있었고요.

winnie    저도 기억이 나요. 저는 도청 근처에서 여고를 다녔거든요. 그러면 그 당시에 시위하던 걸 항상 봤어요. 수업하다가 창문으로도 보이고, 대학생들이 학교 담 넘어 들어오면 선생님들이랑 수위 아저씨가 숨겨주기도 하고. 그게 그런 공포에요. ‘죽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 말아라.'

연두콩    그러니까 ‘네가 감옥에 갈 수 있다’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맞아죽을 수도 있다’ 고 하는 그런 공포가 있으신 것 같아요.

winnie    시위하다가 딱 걸리면 먼저 닭장차에 끌고 들어가서 무조건 때린대요. 바로 경찰서로 가지 않고 광주 시내를 한 바퀴 돌면서, ‘여자건 남자건 무조건 때린다, 거기부터 시작이다’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고문당해서 죽는다.’ 그거에 대한 공포.

연두콩    주변에 워낙 많으니까요. 정신이 이상한 분들도 많고요. 그런데 그런 분들이 ‘되게 이상하다’ 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 5.18때 고문당해서 그렇다, 삼청교육대 끌려갔다 와서 그렇다’ 그런 얘기를 진짜 많이 들었어요.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저희 부모님들은 그냥, 늘 으레 있는 것처럼, 같이 사는 사람들처럼 대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저희 외할머니는 저희 아빠는 못 나가게 하시고, 주먹밥 만드셨다고 하더라고요. 시장 아줌마들이랑 같이. 그런 감정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특별히 뭐 민주화에 관심 있고 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밥을 못 먹는대, 만들자.’ 해서 만들고. ‘저 사람 좀 정신 이상한 것 같아.’ ‘저 사람 5.18때 그랬대.’ ‘아 불쌍하다.’ 그냥 그런 거.

winnie    저희 엄마랑 할머니도 주먹밥 만드셨거든요. 주먹밥 만들고 수건 나르고 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투쟁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옆에 있으니까 그랬던 거 같아요.

명행    이런 것들이 아주, 예술적으로 표현될 만한 지점이지 않을까 싶어요. 공연 중에도 보면, 뭘 알아서 의지를 갖고 하는 게 아니라, ‘쟤 왜 저려냐.’ ‘5.18때 그래서 그렇대.’ ‘아 그려?’ 이런 대사나 그냥 툭툭 던지는 말들이 오히려 듣는 사람들에게는 ‘어!’ 하고 올 수 있다는 거죠. 어떤 한 캐릭터가 엄청 바보짓을 하는데, ‘저 바보 새끼는 뭐야?’ 하다가도 그런 대사들이 툭툭 들리면, ‘어’ 하는 그런 게 있잖아요. 말씀하신 것들을 예술과 연결 지어 보자면, 그런 좋은 지점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저희 공연도 보셨다시피 하나의 감정으로 훅 들어가지 않거든요. 들어갔다가도 빠지고 들어갔다가 빠지고 그러는데, 그런 게 오히려 더 환기시키고, ‘어’ 하고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저도 공연을 만들면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요, 거기 보면 할머니들이 다라이 들고 차 지나가면 빵 같은 거 막 던지시더라고요. 정말 총 들고 이런 분들 뿐만 아니라, 옆에서, 잘 모르지만 빵 던져주고 사이다 갖다 주고 하는 분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게 많이 와 닿았어요. 총 들고 투쟁하는 사람들의 에너지 뿐 아니라, 옆에 계신 분들의 이야기. 그런 것들이 공연 만들고 하는 데서도 의미를 갖는 지점이 있는 것 같고요.

연두콩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런 아픈 역사적 사실을 충청도 식으로 표현해도 재밌을 것 같아요. ‘쟤 왜 저래?’ ‘쟤 맞아서 저렇대.’ ‘쟤는 어쩌다 태어났어?’ ‘5․18때 갇혀 있다가 둘이 눈 맞아서 태어났대.’ 뭐 이런 식이죠. (웃음) 그게 사실은 굉장히 일상적인 거거든요. ‘너 왜 주먹밥 만들어?’ 하면 ‘누가 죽었대, 계엄군이 쳐들어왔대.’ 가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밥을 못 먹는대. 같이 만들자.’ 뭐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거니까.

winnie    아까 할머님이 아들 못 나가게 하셨다고 했잖아요. 저는 그것도 굉장히 이해가 가요. 저희 할머니도 그러셨거든요. 못하게 했지만 주먹밥 만드셨어요. (웃음)

연두콩    맞어, 맞어.

웅달    저희 할머니는 안 만드신 것 같던데요. (웃음) 만드셨어야 하는데, 아.

winnie    저는 그게 사람인 것 같아요.

웅달    그래서 저희 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518 얘기가 나오면, 물론 그때 광주에도 안 계셨지만, 친구들 중에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당연히 있겠죠. 그래서 어떤 부끄러움 같은 게 있으신지 말씀하는 걸 안 좋아하세요. 오히려 어린 저한테 충격적이었던 건, 참여 안 한 것도 안 한 거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 가족만 지켰다고 자랑을 하시는 할머니가, 아 잠깐, 이거 나가면 할머니 안 되는데. (웃음)

winnie    저희는 그때 죽었다고 소문나고 그랬던 삼촌이 지금은 한나라당 지지해요. 그래서 그게 가족에게 굉장한 상처거든요 지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그러니까 그때 그렇게 살았다고 해서, 정의로움 같은 게 쭉 그대로 가는 게 아니니까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그런 것 같아요.

 

광주를 어떻게 배우고 또 알게 되었나

리경    5․18이라는 사건을 두고 삶에서 겪은 것을 얘기해주셨는데, 실제로 공포의 수준도 뭔가 다른 수준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아, 그렇구나, 하고 저는 인식이 됐거든요. 그 사건을 어떻게 접하는가에 따라 다른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삶으로 오는 경우가 있고, 저 같은 경우는 주변 친척 중에서도 광주 사람이 전혀 없어요. 저는 정말로 그냥 교과서에서 봤고, 어찌어찌 하다가 좀 정신 차리고 살아야지 하면서 거꾸로 영상이나 사진 통해서 배워서 알게 된 경우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삶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접할 기회가 없었어요. 혹시 비광주 분들은 5․18을 접하게 되는 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사과    얘기 들으면서 너무 신선한 게, 삶 속에서의 이런 사람 사는 이야기나, 그 와중에서의 5․18이라는 개념이 저한테는 전혀 없었거든요. 군부에 의해서 너무 처절하게 당했던 일반 시민들, 그에 대한 관점이 기초적인 시각이었죠. 어쨌든 저는 책을 통해서나 다큐를 통해서 체득했던 거니까요. 그 안에 있는 우리 형제 이야기, 우리 이웃의 이야기, 한편으로는 그래서 내 새끼 귀하니까 내 새끼 챙기는, 이런 것들은 전혀 책에서는 다뤄질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그런 면에서 되게 신선했고요. 음 그래서 저한테는 더 무거웠던 점도 있는 것 같아요. 광주 출신이 아닌 사람들 입장에서는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느낌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얘기 들으면서 사람 사는 코드들, 사람들의 소소한 감정들 같은 걸 접하니까 오히려 부담이 좀 덜어지는 측면이 있네요. 오히려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고. 이번 공연도 그렇고 이런 이야기들도, 5․18을 좀 더 체감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 같아요.

연두콩    저는 되게 궁금해요. 광주 출신 아닌 사람들이 어떻게 알게 되고, 어느 정도의 느낌을 가지고 있을지. 왜냐하면 제가 대학을 처음 들어갔을 때 저를, ‘저를’ 좋아하던 오빠가 있었어요. (폭소)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제가 아니라’ ‘저를’ 좋아하던 오빠, 아니 이건 5․18하고 관련된 이야기에요. (웃음)

사과    뭐, 사람 사는 이야기니까요. (폭소)

연두콩    그런데 그 오빠는 경상도 사람이었어요. 사실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해준 얘기가, 저를 좋아한 이유가 광주 여자였기 때문이래요. 자기는 고등학교 때 5․18을 배우고 나서, 뭔가 죄책감도 너무 많이 들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뭔가 광주 시민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게 높아지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다른 지역 사람으로서 화합과 평화를 이루는 어떤 제스처로 꼭 자기는 대학 가면 광주 여자를 사귀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폭소) 그런데 저는 그게 너무 충격적이었거든요.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헤어졌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배웠길래, 그리고 광주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길래 그렇게 사람을 사귈 수가 있지?’ 이런 생각이 들면서, 개인적으로는 되게 상처였어요. (웃음) 그래서 광주 출신 아닌 분들이 어떻게 배우는지 저도 궁금했었어요.

사과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고요. (폭소) 그런데 그런 지점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광주 사람도 사람인데, 사람을 공부하기보다 사건을 공부하는 거죠. 그 이면에 있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이해하고 그들이 느낀 아픔을 공유하기보다는, 그 사건이 어땠는지, 그 사건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광주사람들은 그 사건의 어떤 배후들로만 보는 거고요. 그래서 그 경상도 분 같은 경우를 보면, 두 사람이 교류를 하는 데 있어서도, 상대방 여자 분은 사실 전라도 여자의 정체성 말고는 별다른 게 없었던 거죠.

연두콩    (웃음) 상담해주시는 것 같아요.

리경    힐링캠프처럼 됐어요. (웃음)

연두콩    근데 완전히 반대인 경우도 사실 있었거든요. 저희 동아리 선배 중에 유독 저를 되게 싫어한 선배도 있었는데, 그 선배가 절 싫어한 이유도 제가 전라도 사람이기 때문이었어요. 그 선배는 부모님들이 전라도 사람한테 사기 당하고, 그 사람들 믿을 사람 못 되고 빨갱이들이라는 얘기를 어려서부터 많이 들었대요. 그래서 저를 만났을 때부터 불신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두 선배들 사이에서 저는 정말 혼란스러웠어요. (웃음)

리경    광주 여자라는 아이덴티티 하나밖에 없는 거잖아요.

연두콩    그래서, 아 눈물 나려 그런다 갑자기. (웃음) 그래서 막 술 먹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내가 너한테 언제 뒤통수 맞을지 모르겠다고. 우리 부모님이 크게 사기를 당하셨다고. 저는 뭐 참 안타깝다는 얘기밖에 못했죠.

연두콩씨의 어린 시절

리경    이명행 배우님은 혹시 공연하시기 전에는 광주에 대해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명행    저는 교과서에도 없었던 것 같아요. (웃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대학교 들어와서 처음 알았고, 그 이후에 5․18이라는 게 부각된 건, 명칭이 바뀌었던 시점이 있었잖아요. 그때 조금 인식하게 됐고, 그런데 그냥 인식뿐이었죠. 저한테는 사실 6․25 전쟁이나 5․18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그냥 역사적인 일이지, 거기에 대한 부채도 없고, ‘나는 하고 싶은 일 하기 바쁜데 뭐’ 하는 식이었죠. 그런데 이번 공연 때문에 많이 배웠어요. 다큐 같이 보면서 다들 울고, 마음 너무 아팠고요. 공연하면서는 어쨌든 5․18 얘기니까 이런 자리도 만들어지고, 저는 사실 공연 때문에 여기 있는 거잖아요. 공연을 통해서 그게 되게 가까워졌어요. 6․25나 5․18이나 나한테는 역사적인 무게감이 비슷했는데, 5․18은 너무 가까운 거예요. 내 아버지가 그랬고, 내 삼촌이 그랬고, 당장 나만해도, 나보다 어린데 최루탄 냄새를 늘 맡으면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전라도 출신 친구들도 있고 하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무게감이 완전히 달라졌죠. 근데 사실은 지금도 결론은 없어요. 관심이 있다거나, 뉴스에서 5․18 관련된 게 나오면 좀 더 관심 있게 보는 정도지, 당장 저는 또 다음 공연 오디션 준비해야 되고, 사실은 먹고 살기 바쁘니까, 여기서 어떤 답을 찾고 하는 건 모르겠어요. 그냥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고, 만약에 정치 쪽에서 이슈가 된다거나 혹은 어떤 사람이 5․18이나 민주화 운동 관련된 어떤 발언을 했을 때 거기에 대한 호불호가 조금 더 생겼달까요. 구체적으로는 말씀을 못 드리겠지만, 하다못해 4년이든 2년이든 선거할 때만이라도 좀 더 관심을 갖고, 표 하나 찍는 거에 뭔가 조금 더 신중해지는 정도죠. 저는 교과서에 아예 없었어요. (웃음) 저는 정말 몰랐어요.

리경    5․18에 대해서 사실 광주 사람이 아닌 경우는 접할 수 있는 통로가 적은 것 같아요. 교과서라든지 책, 조금 더 나가면 다큐 정도가 전부라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 거꾸로 광주 출신인 분들은 공연 외에, 교과서에 나온 광주 이야기라든지 광주를 다루는 기사나 책을 봤을 때 어떤 감정이나 기억이 있으신지요?

웅달    사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84년생이라 직접 경험한 게 아닌데요, 그런 건 있죠. 제가 처음 접한 계기는, 어릴 때,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도 뭣도 몰랐던 상황에서 주말에 아빠 손에 이끌려서 무덤이 되게 많은 어떤 곳에 따라갔던 기억. ‘여긴 뭐지, 조상님들이 묻혀 계시나?’ 하면서 갔는데, 거기서 본 사진들만 기억이 나요. 당시에 피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던 나이인데, 거기 사진들 보면 정말 처참하고, 사람 얼굴이 사람 얼굴이 아닌 그런 게 굉장히 많거든요. 그것들을 보고 나서 진짜 한 2주일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직접 겪진 않았지만 어떤 트라우마가 생긴 거죠. 잠만 자면 항상 그 뭉개진 얼굴들이 쫓아오는 꿈을 꿨었어요. 그 꿈이 아직도 생각나는 걸 보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한테는 그 정도가 트라우마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막연하게,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라든지,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든 어떤 불의한 세력 같은 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5․18을 다룬 영화 같은 것들을 봤을 때, 직접 경험한 게 아니니까, 사실관계나 그런 거에 대해서는 ‘이게 뭐야, 사실이랑 다르잖아’ 하고 벌컥한 적은 없지만, 반면에 <화려한 휴가>처럼 과장되게 마치 ‘우리만 민주주의였다’ 하는 것처럼 전달되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반감을 갖게 되더라고요.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당시에 물론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거기서 총 맞은 사람들이 생기고 죽은 친지들이 생기면서 대부분 같이 싸우게 된 거잖아요. 자신들의 삶을 지키겠다는 목적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은데, 그게 너무 교조적으로 비춰지는 것에 대한 반감이 생기는 거죠.

리경    혹시 공부하신 적은 없었어요? 따로 5․18에 대해 알아보려고 책을 읽었다거나.

웅달    아뇨, 저는 공부한 적은 없었어요. 주변에서 알아보려 했지만 사실 가족들도 별로 연관되어있지 않았고요.

winnie    저는 역사책 같은 걸 접해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때부터 '열사'라는 단어를 알았어요. (웃음) 가르쳐준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자주 들렸거든요. 이런 것은 생각해보면 너무 슬프죠.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게 저에게 상처를 주는 지도 몰랐어요. 지금 오히려 더 그때를 생각하며 상처를 받는 것 같아요. 책자라기보다, 교육에서 처음 얘기했던 건 대학 때였어요. 저는 전남대를 나와서, 한국연극사 시간에 그런 걸 주제로 발표를 하고, 그 배후의 미국에 대해서도 발표를 하고 그랬어요. 수업 시간에 레포트를 써서 내고, 전남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였죠. 5․18이 되면 타지에서 오신 교수님들도 자발적으로 묵념을 하고 수업을 시작했고요.

연두콩    혹시 다른 데서는 5․18때 묵념하거나 그런 건 없나요?

리경    네, 없어요. 아무 일 없이 그냥 지나가는 경우도 허다하고요.

winnie    지금 보면 서울에서는 조금 젊은 친구들이 많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요. 저는 ‘어떻게 하나 보자’ 하는 태도를 갖게 돼요. 거리를 취하고 보는 거죠. 전남대는 정말 5․18이 되면, 지금이야 축제처럼 즐기는데, 사진 자료집부터가 사이즈가 다르거든요. 그런데 서울은 조금조금 있잖아요. 그래도 애쓰는 친구들 보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알려고 하는 것이. 그런데 부채 의식을 갖게 되는 건 조금 슬픈 것 같아요. 부채 의식까지 가질 필요가 있나. 물론 그게 건강한 역사관을 심어주는 거라면 좋지만, 지나간 일인데, 부채 의식은 그 윗세대가 느껴야 하는 거지, 젊은 세대가 가질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건 조금 마음이 아파요.

 

동생을 안고 있는 winnie - 그녀가 3살 때 5.18이 일어났다

 

리경    연두콩씨는 따로 5․18에 대해 공부하거나 하신 게 있나요? 저는 광주 출신이 아니라서, 공부라는 단어를 쓰면서 5․18을 경험했거든요. ‘알아야 해’ 라고 해서. 순서가 좀 달랐던 거죠.

연두콩    저는 공부했어요. (웃음) 아마 저희 때 국사책이 바뀌면서 아주 짧게 한 단락 정도 5․18 부분이 추가가 됐었어요. 그런데 제가 알고 있는 사실보다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게 궁금해서 공부를 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어릴 때부터 들었던 이야기들로 보면 사실은 몇 장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조금만 묘사가 됐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사람들이 이걸 알게 됐을까, 궁금했어요. 그리고 어릴 때 사실 부모님이 5․18이라고 하지 않고 광주사태라 그랬거든요. 광주사태 이야기만 듣고 자랐기 때문에, 이름이 왜 바뀌게 됐지? 이런 것도 궁금했고. 사실 광주는 워낙 학교마다 5․18 기념재단 같은 데서 자료집이 많이 나와요. 그런 것도 찾아봤고. 또 5․18 백일장 같은 거 나가려다 보면, 알아야 되니까. (웃음)

리경    실제적 필요에 의한 거군요? (웃음)

명행    진정한 생활이셨네요. (웃음)

연두콩    백일장에서 시 같은 거 써요. 망월동 묘역 같은 데 가서. 그런데 모르고 쓸 수는 없으니까요, 이 사건이 왜 일어났고 내가 뭘 느껴야 하는지 알려고 했고요. 그런 거 했던 것 같아요. ‘군홧발에 짓밟힌 열사가 어쩌고저쩌고.’ 그런데 또 커서도 계속 관심을 갖고 다큐 같은 것을 많이 보게 되었던 것이, 커서는 다른 지역에 와서 살다보니까 제가 생각하던 것과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아서요. 그래서 영상 같은 것을 더 찾아보고 그랬어요. 저도 사실 사진을 어릴 때 봤거든요. 진짜 끔찍한 사진도 많아요.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생긴 평범한 적개심이 컸던 것 같은데, 사진은 안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애들한테.

웅달    사진은 보여주면 트라우마가 될 것 같아요.

연두콩    네, 진짜, 진짜 끔찍해요. 그런 자료가 남아있는 게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하면서, 광주 애들한테는 그걸 너무 많이 보여주기도 하니까.

명행    학교에서 그런 교육이 있어요? 사진전 같은 걸 간다거나?

연두콩    따로 있지는 않아요.

winnie    그냥 알게 돼요, 자연스럽게. 개구쟁이 남자애들이 와서 모험담 이야기하듯 ‘오늘 어떤 사진 봤다’ 얘기해주기도 하고. 그냥 일상적으로 알게 되는 거예요.

연두콩    초반에는 망월동 묘역에 백일장을 하러 갔을 때 그 사진들이 다 있었어요. 지금은 어느 부분은 없어졌다고 알고 있거든요.

웅달    제가 한 3년 전쯤에 친구들과 광주 여행을 갔었어요. 그래서 망월동에도 가봤는데, 공원을 새 단장 했고, 사진집을 이제 따로 배치하지 않았더라고요. 글쎄요, 어떤 의미로 없앴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난한 수준의 자료들만 남아있었어요. 아마 없앴다면 저희가 방금 말한 취지로 없애지 않았을까 싶어요.

연두콩    그런데 아마 그 사진 보면 지역 구분 없이 누구나 다 적개심을 갖게 될 거예요.

웅달    이게 사람이 한 행동인가 싶고.

리경    저도 사실 사진을 봤었어요. 재작년에 인터넷으로 찾다가 봤는데, 그날 종일, 일단은 식욕 상실. 충격이 너무 커서요. 그리고 약간, 믿겨지지 않는 느낌. 정말? 정말? 정말? 몇 번이나 생각해야 했었어요. 저는 20대가 넘어서도 그랬는데 어렸을 때 일상적으로 그런 걸 보고 자랐다고 하면, 사실은 그게 정말 강하게 각인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사진 = 네이버 영화]

내가 5․18로 어떤 작품을 만든다면?

리경    이제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지금은 주로 어떤 공연을 놓고 그걸 바라본 사람의 입장에서 얘기를 했는데요,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지금 영화 연출 하시는 분이나 연극 연출 하시는 분들이 많은 얘기를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연출을 하고 싶다라든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라든지, 이런 역사적인 사건을 어떻게 예술로 가져가야 할지 고민해보신 게 있다면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뭐, 일반인께서도 혹시나. (웃음)

사과    저는 사실 부채감을 갖고 있고, 그래서 그걸 상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는 입장인 게 사실이에요. 저도 망월동에 가 봤었는데, 산에 산을 넘는 그 무덤들을 보고 영정들을 보면서 사실 저는 더 실감이 났던 것 같아요. 저는 어려서부터 삶으로 경험해보지도 않았고 그런 전언들을 들은 게 아니기 때문에, 아예 새로운 소식을 들어야 하는데, 몇 번 걸러진 이야기를 듣게 될 경우 사실 그 만한 강도의 아픔을 느끼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외지인인 저에게는 그런 강한 자극들이 필요했던 거죠. 말씀 들어보니까 광주에서 그런 자극들을 일찍부터 받아오신 분들에게는 참 힘든 일이기는 했겠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사실 저는 그런 자극들이 있어야 어느 정도 체감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지금 제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런 사실들이 조금 더 사실에 가깝게 재현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대신에 <푸르른 날에> 공연 같은 시도들도 당연히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요. 어느 것 하나를 놓고 뭐가 부족하고 뭐가 좋고를 평가하기보다, 다양한 시각으로 다양하게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저의 시각으로는 좀 더 사실에 가까운 것이 있었으면 싶고, 혹자에게는 더 편하게 그 사실에 접근할 수 있는 루트가 개발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어떤 식으로든 늘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갖는 것. 그런 마음 자세를 갖고 만들고 싶어요. 만들진 모르겠지만. (웃음)

 

광주를 잊지 말자고 하는 아오이 사과씨

웅달    저는 크게는 두 가지를 생각했어요. <화려한 휴가>를 보고 나서 정말 감독 욕을 바가지로 했었는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5․18이라는 사건에서는 살아남은 사람이 갖고 있는 부채감이라는 주제가 가장 크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영화에서 다룬 건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뿐이었고, 꼭 그렇지도 않은데, 또 너무 과하게 엄숙한 부분에서 힘을 확 줘 버리고, 오히려 일반 대중과 멀어진 느낌의 연출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만약에 그런 이야기로 연출한다면 진짜로 그 시절을 살았던 일반 시민들의 삶을 가장 가깝게 그려내고 싶어요. 그리고 또 <푸르른 날에>에서 좋았던 지점이기도 한데, <화려한 휴가>에서는 끝 장면이 사진으로 끝나거든요. 이요원 혼자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죽잖아요. 그런데 이요원 혼자 인상을 쓰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활짝 웃고 있어요. 감독의 의도는 뻔한테, 살아남은 사람은 웃지 못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저는 그 엔딩이 되게 불편했던 게, 그 사건 후로 20몇 년이 지났는데, 그러면 살아남은 사람은 언제까지나 그 부채를 안고 살아야 하는 건가. 살아남은 만큼 또 살다 보면, 본인이 잊지 못하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굳이 그 부채를 계속 안고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푸르른 날에>는 부채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얘기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딸은 그 부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물이잖아요. 완전히 해맑은 다음 세대가 있고, 시대를 살아낸 두 사람이 화해로 마무리하는 것이 저한테는 어느 정도 봉합이 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런 상처나 부채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치유되는 것에 대해서도 그려내고 싶어요.

연두콩    저는 여성주의 문제에 관심이 좀 있어요. 여성주의라는 말도 되게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페미니스트들 싫어하고요. 그런데 저는 그냥 서로 다 즐겁게 좋게 살아보자 하는 계기에서 여성주의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사실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가해를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누구나 다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여성주의 관련된 연극을 하나 만들면서, 장르는 코미디로 했고요. 조선시대에 실제로 어떤 왕이, 일식이 일어났는데 그게 달이 태양을 가리는 현상이고 여자들의 음기가 너무 세서 그런거라 해서 삼천 명을 이유 없이 바다에 빠뜨려서 죽인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저는 그걸 보고 너무 웃기다는 생각을 했어요. 먼 이야기이기도 해서 그런지, 분노가 끓어오르기보다 웃기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걸 바탕으로 좀 웃기게 극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죠. 내용을 보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그런 왕이 있었는데 그에 반기를 든 여자들이 밤마다 남자들을 죽이고 다녀요. 양기가 너무 충천하다 그래서. (웃음)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무사 단체가 있어서, 밤에는 무사로 돌아다니면서 남자들을 죽이는데, 낮에는 다소곳한 여자로 사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 남자들이 굉장히 불편해하더라고요. 여자들은 너무 재밌었다고 너무 통쾌했다고 하고. 남자들은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죽일 수 있냐고 하고.

리경    사람이 아닌데. 남잔데. (웃음)

연두콩    저는 그게 좀 충격적이었어요. 저는 그냥 다 재밌어 할 줄 알았거든요. (웃음) 저의 오류였던 거죠. 사실 역사적인 사실로 보자면 5․18도 그렇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문제로 보자면 가해자들이 직접 사죄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드물고요. 그런 일이 없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늘 피해를 받았다는 것을 계속 외쳐야 하는 그런 삶을 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예술 속에서 그걸 표현하면 어떨까, 그냥 가해자를 한 번 죽여도 보고, 피해자와 가해자만의 드라마가 아니라 그것과 관계없이 재미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도 보고. 그런 게 관심이 있어요. 친구 중에 그 할머니가 일제시대를 겪은 친구가 있는데, 그 분이 제일 싫어하는 날이 광복절이래요. 그 할머니는 광복 직전에 일본에서 살았는데, 굉장히 부자였대요. 그 당시 30년대에 에스컬레이터가 올라가는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바나나를 먹었던 거죠. 그런데 광복이 되고 한국에 돌아오면서, 인플레이션 시작되고 화폐 가치 떨어지고 사기도 당하고 하면서 스무 살 때부터 엄청나게 고난을 겪으신 거예요.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싫어하는 날이 광복절이라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런 것을 볼 때, 어떤 역사적인 사실이라 해도 누구나 다른 경험을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 식의,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경험들을 재밌게 그려내 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 얘기를 했더니 사람들이 조금 많이 걱정하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을까? 일본과의 문제가 아직 실제로는 깨끗해지지 않았잖아요. 사실 5․18 문제도 마찬가지고요. 깨끗해지진 않았잖아요. 가해자가 여전히 살아 있고.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분개하고 있고.

리경    만드시면 저는 보러 갈 것 같아요. (웃음) 혹시 다른 분들도 덧붙이실 얘기 있으세요?

winnie    원래 예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잉여적인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푸르른 날에> 라든지 얼마 전에 했던 DV8 공연 같은 걸 보면, 생각할 여지를 사람들한테 강압적이지 않게 던져주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공연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강압적이지 않은 분위기로, 사유해볼 수 있게끔 해주는.

명행    저는 공연을 하는 중이라서, 공연을 다른 사람들한테 잘 보여주고 교감이 잘 됐으면 좋겠고요. 역사적 사실이라든가 아픔의 문제라든가를 형상화하는 예술가 입장에서는 사실 대부분 겪어보지 못한 일이잖아요. 예술가는 어떤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서 그걸 보여주는 건데, 저는 배우 입장에서는 소통의 문제를 항상 고민해요. 내가 이 이야기를 이번에 할 건데 지금 동시대 사람들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을 할 것인가, 그게 예술가인 저한테는 제일 큰 문제죠. 아까 부채를 갖지 않아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런 사실들을 그저 객관적으로 접하고 바라보는 지점에서도 또 어떤 에너지가 생겨날 것 같아요. 너무 직접적이거나 주관적으로 그 아픔을 드러내는 것은 다큐멘터리 같은 데서도 충분히 가능하니까요. 그런데 어쨌든 안다는 것 자체는 중요한 것 같아요. 끊임없이 어떤 작업을, 물론 때로 훌륭할 수도 있고 때로 안 좋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이 계속 상기될 수 있게끔, 예술가로서 작게나마 끊임없이 화두를 던져줄 수 있는 작업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투사 같은 발언이 됐네요. (웃음) 사실 저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이어질 만한 공연들이 계속 만들어진다는 건 고무적이라고 생각해요. 올 초에 <빨간시>라는 작품이 있었어요.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를 다루는 건데요, 사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수요일마다 집회하시고 하는 건 알지만, 그거는 뭐 삼국지에서 장비가 언제 죽는다는 걸 아는 정도로 개인적으로는 정말 멀고 사소한 얘기였는데, 그런 걸 드러내고 작품화해서 보여주니까, 공연 자체의 완성도를 떠나서 굉장히 감동 받았고 생각하게 된 게 많았거든요.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뉴스를 한 번 정도 더 찾아보게 되고요. 사실 사진 한 장 기사 한 줄 그런 게 사람 안에서 쌓이잖아요. 예술가로서는 그렇게 환기시킬 수 있는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게 있어요. 배우로서는 얼마나 그것을 잘, 재미있게 동시대의 젊은 친구들과 교감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요.

 

못 다한 이야기

리경    다양한 관점의 공연이나 영화 등의 시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공통적으로 갖고 계신 것 같네요. 저희가 얘기하려 했던 거는 거의 다 한 것 같고요. 혹시나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미처 제가 여쭤보지 못하여 하지 못한 게 있다면 얘기해주시면 좋겠어요.

명행    이 자리가 저는 되게 재미있는데요. (잠시) 재밌다. (웃음) 그러니까 이 자리가 지금, 저희가 5․18 관련해서 만났지만 굉장히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사람들 알아가는 것도 너무 즐겁고, 5․18 관련된 것을 수다라고 하긴 그렇지만 어쨌든 수다 떠는 이런 지점에서 나오는 좋은 에너지가 있잖아요. 이런 게 진짜 좋은 것 같아요. 심각한 것들도 물론 필요한데. (웃음) 그런 사람들도 있고. 저는 오늘 5․18 관련해서도 굉장히 많은 것을 배우거나 느낀 것도 있었고, 그런 것들이 이렇게 즐거운 자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게 무척 좋네요. 그런데 사실 5․18이라는 게 굉장히 큰 얘기잖아요. 정말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거고. 오늘은 주로 만들어졌던 예술 작품들에 기댄 여러 개인적인 얘기들이 나왔는데요, 좀 더 전문적인 얘기가 들어가도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winnie    제가 약간 전문적인 얘기를 하자면, 5․18의 배후에 미국이 있잖아요. (웃음) 정말 나쁜 것 같아요. 멀거니 앉아서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하잖아요. 지금은 이라크 애들을 그렇게 하고 있고. 제가 아까 말했던 것 중에, 저는 초등학교 때 열사라는 단어를 알았는데, 걔네는 지금 더한 걸 알 거잖아요. 그래서, 미국 나쁘다는 말을 꼭 써주세요. (웃음)

연두콩    찬성합니다. 꼭 써 주세요. (웃음)

사과    저도 오늘 너무 좋았고요. 일반인이 이런 기회를 갖기가 사실 쉽지 않은데. (폭소) 너무 좋았어요. 삶 속에서의 이야기들은 직접 그 분들을 만나지 않으면 듣기 힘든 것들인데. 저 나름으로는 오히려 캐주얼하게 소소한 생각들을 나누는 것이 편하고 좋은 자리였던 것 같아요.

웅달    저도 좋았고요. 다 좋았지만 특히, 사실 광주 출신 친구들하고 5․18 얘기 안 하시잖아요.

연두콩    네, 안 해요. (웃음)

리경    아, 안 하세요?

웅달    네, 술 먹고도 안 하는 얘기예요. 직접 경험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런 주제로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경험이었고요. 막상 얘기해보니까 어릴 때 기억들이 다 비슷한 것도 같아서 좋았어요.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 것은, 지금 다 5․18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광주 출신들인데, 한 명이나 두 명 정도는 한 10살이라도 되어서 실제로 경험을 했고 기억이 있는 분이 있었다면 더 재밌지 않았을까 싶어요. 분명히 시각차가 있을 거거든요.

명행    공연보고 되게 재밌다고 표현하셨잖아요. 그런데 당시에 초등학생, 중학생이어서 경험을 하셨던 분들은 무섭다고 말씀해 주세요. 빨간 메가폰을 든 여자애가 등장해서 메가폰으로 ‘시민 여러분’ 하는 그 순간에 그냥, 당시에 밤마다 이불 뒤집어쓰고 그런 걸 듣던 경험이 있어서, 듣자마자 몸이 반응했고 무서우셨다고 하더라고요. 말씀대로, 어릴 때라도 경험한 분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또 다른 얘기들이 됐을 것 같아요. 그러면 내일 모레, 그런 분 섭외해서 다시 한 번 할까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