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주디스 버틀러의 ‘연합의 정치학’으로 이해하는 젠더>

2013. 5. 24. 10:42Review

 

<주디스 버틀러의 ‘연합의 정치학’으로 이해하는 젠더>

 

 글_ 성지은

 

197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페미니즘 미술은 미니멀리즘이나 퍼포먼스 아트와 함께 미술 실천과 미술사에 있어서 ‘신체’에 주목하게 하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페미니즘 미술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성지배적인 사회구조에서 억압받고 타자화되는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야 한다는 의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미술을 통해 여성이 억압받고 착취받는 모습을 재현하여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거나, 간과되었던 여성의 권리와 위치를 조망하여 그 가치를 드높이고자 한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던 페미니즘 미술은 1990년대에 들어와 다른 ‘주의’들의 공격을 받았다. 남성중심적인 사회가 남성 대 여성이라는 이분법을 고수하듯이 페미니즘 미술 역시 똑같은 이분법을 따르고 있고, 따라서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다양한 정체성들을 포용하지 못한다는 비판이었다. 이러한 비판과 더불어 동성애 미술운동이나 흑인 미술운동, 탈식민주의 미술 등 여러 운동들이 나타났다. 이 중 동성애 미술운동은 젠더(gender)의 영역을 탐구하는 페미니즘의 계보를 잇는, 성(sexuality)의 영역을 탐구하는 성 정체성 이론을 기반으로 삼는다. 그리고 많은 이론가들 중에서 가장 핫한 사람은 단연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일 것이다.

 

▲ 버틀러의 Gender Trouble 표지 (http://en.wikipedia.org/wiki/File:Gender_Trouble.jpg)

 

버틀러의 가장 유명한 책인 『젠더 트러블』(1990)은 출판된 지 이미 20년도 더 되었다. 버틀러는 여성이라는 젠더는 “만들어진다”고 보았던 시몬 드 보부아르의 명제에서부터 더 나아가 ‘섹슈얼리티’ 역시 문화적 구성과 그 속에서의 개별적 수행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본다. 그런 주장의 중심에는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는 개념이 놓여 있다. 한 마디로, “정체성이라는 것은 사람의 본질적 특성이기보다는 외부적으로 구성되는 반복적 행위이기 때문에 수행적인 것”이다.팬덤이 생길 정도로 유명한 버틀러의 이론은 미술 실천과 미술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영미권에서 그녀의 개념을 이용한 미술 비평은 흔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는 언제까지나 ‘서구’의 상황이다. 페미니즘 미술이 제대로 꽃을 피우지도 못한 한국에서 페미니즘을 넘어 성정체성을 이야기하는 미술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미술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그러한 담론이 충분히 논의되고 있는 것일까? 이 좁고 북적이는 땅에서도 버틀러의 논의, 그리하여 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담론을 적용하고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힘겹게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미디어 극장 아이공>(www.igong.org)이 있다.

아이공은 대안영상문화를 고민하며 대안영상을 만들어가는 곳이다. 이 때 ‘대안’은 현재의 지배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에 대한 검토와 평가를 뜻할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배 이데올로기가 ‘가부장제’인 만큼, 젠더와 성에 대한 논의는 아이공이 만들어내는 담론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어 왔다. 그리고 2013년 5월, 아이공에서는 그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주디스 버틀러의 ‘연합의 정치학’으로 이해하는 젠더>를 마련했다.

학문적 이야기를 다소 지루하게 늘어놓았지만, 이 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배경과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는 20년의 페미니즘 미술, 그리고 이어서 20년의 성 정체성에 대한 미술 운동이 있어왔다. 한국에서는 2000년대에 아주 잠깐 페미니즘 미술이 있었고, 10년이 지난 지금 성 정체성에 대한 미술 실천이 만들어지려고 하는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공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같은 것을 고민하는 담론이나 미술 실천들이 충분히 집적되지 않은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가장 처음부터 고민하는 것이다. 아이공은 성 정체성에 대한 담론의 처음을 짚는다. 즉,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고민한 결과물을 섣불리 내놓지 않고, 우선 모두가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한다. 아이공이 밝히고 있듯이 “이번 전시에서 여성, 젠더라는 의미를 하나로 결정하거나 사회적인 규칙에 편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의견을 연합하여 진정한 여성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이공은 곽은숙, 홍현숙, 원의 영상 작업들을 보여주고, 강연회와 작가 워크숍을 열었다. 두 번의 강연회는 각각 “경쟁하는 보편성과 연대의 정치”, “무지한 사랑- 버틀러의 윤리”라는 제목으로 성 정체성을 다루는 미술의 이론적 기반을 닦으려 한다. 곽은숙, 홍현숙 작가의 워크숍은 “확장된 젠더성의 탐구- 버틀러의 윤리”, “대지적 신체, 수행성의 정치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론이 미술 실천과 만나는 지점을 탐구한다. 이러한 이벤트들에 앞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세 명의 작가들이 영상 작업을 통해 보여주는 미술 실천들이다.

 

 

▲ 원, <창문너머별>, 2006, 스틸컷

 

아이공의 전시실에서는 곽은숙 작가와 홍현숙 작가의 작업이 전시되고 있었고, 세 작가들의 다른 작품들은 시간을 맞추어 상영되고 있었다. 그 중 곽은숙 작가의 세 편의 영상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첫 번째, <히스테리아 시리즈>는 ‘crevice 1’ ‘crevice 2’ ‘crevice 3’이라는 세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두 합쳐 14분 동안 돌아가는 이 영상들은 대형 마트인 이마트, 힘겹게 바람을 뚫고 가는 사람, 빨간 소용돌이 같은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파편적이며 서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는 이 이미지들은 근래에 있었던 대형 슈퍼 마트와 재래시장의 갈등, 이마트의 횡포, 여성으로서 살아가기의 힘겨움 같은 것들을 연상시킨다. 두 번째, <고무공장 큰언니>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 강점기 때 고무공장에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외쳤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드로잉 애니메이션이다. 마지막, <응답하라 무능력>은 오늘날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떤 무능력의 측면들을 여러 개의 단편을 통해 보여준다. 그것은 비정규직, 가난, 여성과 같은 무능력들이다. 이들은 모두 “권력이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판단하고 있고, 그 속에서 진실은 은폐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 곽은숙, <응답하라 무능력>, 2012, 스틸컷

 

홍현숙 작가의 작품들은 전시실의 화면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곽은숙 작가가 사회의 거시적 구조와 그 구조가 개인에게 미치는 효과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반면, 홍현숙 작가는 좀 더 미시적으로 개인과 신체에 초점을 맞춘다. 첫 번째 작품은 <Watering>이다. 거무죽죽한 들풀에 물을 주는 것 같은 이미지는 알고 보면 삭발하다시피 짧게 깎은 머리를 클로즈업한 것이다. 두 번째, <날개>는 황금색 겨드랑이털이 마치 날개처럼 자라난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겨드랑이털인지 날개인지 분간할 수 없는 와중에 유쾌하게 웃고 있는 사람은 그 진위를 더욱 헷갈리게 만든다. 마지막, <북가좌엘레지>는 수풀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물구나무를 서는 사람을 보여준다. 이 모든 작업들은 “기준과 권력에 정해진 조건들에 대한 전복을 위해 힘겨운 수행적 과정의 반복”을 보여준다.

 

 

▲ 홍현숙, <북가좌동 엘레지>, 2009, 스틸컷

 

각종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찬 이들의 작업은 어떠한 감성을 환기시킨다기 보다는 현실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다소 거친 연출과 이미지들의 연결은 곽은숙 작가의 경우에는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성과 결부되어 실험 예술의 모습을 보인다. 홍현숙 작가는 영상의 소리를 일부러 찌그러뜨리고 거슬리게 만들어버리는데, 반복적이고 파편적인 영상 편집은 이와 함께 어떤 식의 생경함을 만들어낸다. 이들의 작업이 비록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으로 서로 묶여 있지만, 여성의 인권 향상을 외치던 이전의 페미니즘 미술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 영상들이 다소 선전적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자칫 잘못하면 이는 버틀러가 말하는 식의 ‘수행적 반복’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보여주는 순진함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작품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작품들은 아이공의 전시가 목적했던 ‘논의의 장’을 여는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그리고 페미니즘 미술이 제대로 실천되지 못했고 그래서 풍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한국의 상황에서는 작품의 단점으로 보이는 것이 필연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나아가 이 글이 아이공이 물꼬를 트기 시작한 성 정체성에 대한 담론의 한 부분을 이루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