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마임] 20년의 기억.. 한 줌에 흩어진 씨앗, 뿌리를 이뤄.

2009. 4. 10. 12:4507-08' 인디언밥

[한국마임] 20년의 기억.. 한 줌에 흩어진 씨앗, 뿌리를 이뤄.

  • 김민관
  • 조회수 1025 / 2008.06.14

 5월 27일 9시 ‘봄내극장’에서 2008 춘천마임축제의 ‘다시 보고 싶은 한국마임’, 네 개의 공연이 모두 끝나고, 무대 위에는 유홍영, 심철종, 최규호, 유진규, 임도완이 나란히 섰다. 유홍영은 다음 날 ‘다시 보고 싶은 한국마임 2’에서 공연을 선보여 이날 무대에서는 빠졌지만, 이들 다섯은 20년 전에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거의 유일한 마임이스트들이었고, 그 당시의 작품으로 한 자리에 서는 것이기도 하다. 춘천마임축제 역시 1989년 "한국마임페스티벌"로 출발, 1995년 "춘천국제마임축제"로 명칭을 달리하며, 2002년 지금의 "춘천마임축제"로 이름을 갖추기까지 20년의 생일을 맞았고, 축제의 중심축으로 예술감독 유진규는 20년 전부터 축제를 이끌어 오며 세계적인 한국의 마임축제로의 발전을 도모해 왔다.


 그의 말대로 한 줌밖에 안 되는 이 다섯 명이 씨앗을 뿌려 열매를 맺고, 이 자리에 조금은 늙었지만 굳건한 모습으로 섰고, 현재 그 다섯 명은 각자의 위치에서 여전히 예술의 가지를 치고 있다. 가지는 계속해서 또 하나의 씨앗으로의 시작점으로 작용하며 30년, 40년이 된 춘천마임축제의 자리에 이들을 다시금 부르게 될 것임을 그는 일종의 천명처럼 관객과 분명 약속했다.
 한 줌이라는 단어가 꽤나 적절한 비유로 느껴졌던 것은 ‘줌’이 곧 다섯 손가락으로 이뤄진 주먹이기도 하되, 싸움을 할 때처럼 힘을 줘 꽉 쥐는 게 아니라, 살며시 무엇을 ‘쥠’의 의미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즉, 손가락과 손바닥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생겨야 한 줌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한 줌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쥐어지겠는가? 그 쥠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한 줌의 씨앗일 때 가장 유효한 의미를 얻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한 줌의 씨앗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에 시작은 곧 거창한 미래로의 잠재성을 품는 동시에 언젠가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는 공수래공수거의 진리와도 연관이 되는 듯하다. 쥠은 곧 ‘놓아버림’의 행위와의 연속선상에 있기도 한 것이다.


 오래 전의 작품이 다시 무대 위로 출현했을 때, 그것은 예상 외로 신선했고 그 파장 역시 컸다. 적어도 몸을 앞세우는 세계 안에서 오래됐다는 것,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단순히 유행과 조류의 기준에 따른 시대적 진부함을 가리키지는 않을 것이다.


 20년의 역사와 기억이 환영처럼 움직임의 자취에 주마등처럼 띄어지는 경험, 그리고 거기에서 알 수 없는 뭉클함이 느껴지는 것, 그 체험되는 정서는 그 20년의 일부만을 오늘 자리를 통해 본 사람으로서는 진정한 향수의 느낌이 아닌, 20년이 체현되고 있는 직접적인 그들의 몸에 대한 확고한 진실성이 성립된다는 믿음에서 출발한 감동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단 예전에 호평 받았던 공연으로서 여전히 그 점이 유효하다거나 뛰어난 작품성을 담보하기 이전에, 역사보다 더 뚜렷한 실체로서의 그들이 시간을 건너 뛰어 다시 한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 동시에 그 세월을 같은 공연에 다시 한 번 숨을 불어 넣으려 할 때, 그 속에 다 들어가지 않는 세월의 무늬들이 작품을 비집고 나와 역설적으로 그 숨이 작업에 있어서 계산된 숨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적 삶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경의를 표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들 다섯의 만남을 바라보며 그들에게서 굳건함과 안온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삶의 이정표, 부단한 현실의 무게에 희생되는 삶의 축적된 피로에 일종의 짐을 덜었는지도 같다. 곧, 긴 세월을 지탱할 수 있었던 예술에 관한 신념과 의지, 또 그 출발에 있어서의 용기, 그리고 그 열매 맺음의 희망을 통해 삶이라는 것 자체의 온전함, 진실성을 믿고 싶어 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들의 무대는 더욱 판타지가 아닌 실재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개-심철종(심철종 퍼포먼스제작소)

 심철종의 “개”는 형언할 수 없는 무대로 격해서 무대가 강한 파동의 입자가 부유하듯 떨렸고, 처절한 나머지 강렬했으며, 음악의 힘을 빌은 장엄함은 슬픔으로 돌아와 있었다. 쇼스타코비치 재즈모음곡 제2번 중 왈츠를 배경음악으로 개가 되어가는 사내, 개의 울부짖음을 표현한 심철종의 모습은 개와 사람의 경계선상 어디쯤에 있었는데, ‘개-되기’에는 미친개가 무작정 울부짖듯, 눈알이 터져 나올 것처럼 혈액의 심한 얼굴에의 쏠림 현상은 정적의 순간을 불렀다. 애처롭게 호소하듯 나락의 끄트머리를 부여잡듯 욕망의 편린을 갈망하듯 그의 눈빛에는 삶의 궤적, 기쁨과 슬픔에 대한 온갖 회상이 스쳐가고 있었다.
 인간이 개가 되기에 슬픈 것일까? 개가 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인간의 현실이 그토록 슬픈 것일까?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는 비참한 상황이 단지 변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고, 또 벌레가 되어 그럴 수 없어 가족의 멸시 속에 죽어 간 더 큰 슬픔의 현실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작품은 인간이 지닌 미약한 삶에 대한 근원적인 슬픔과 균열의 가능성을 짐작케 했다.
 인간을 벗어나는 그의 인간으로서의 장렬한 죽음(?)은 영화로 비유하자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의 소위 ‘개라도 되는’, 극한의 상황에서의 이성의 질서가 무너지고 무릎 꿇고 애원할 수밖에 없는 비굴함의 면모가 엿보였던 장면에 가깝기보다는 차라리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에서 한석규가 죽어가는 가운데 남은 숨을 안고, 문성근의 차에 매달려 얼굴이 미끄러져 내려갈 때의 충혈된 눈의 거부할 수 없는 슬픔의 실재적 장면을 연상시켰다.
 즉, 그의 눈빛은 슬픔을 표현하기에 슬픈 것이 아니라, 처절함 그 자체에서 슬픔으로 전이되고 있었기에, 모든 에너지가 남김없이 발산되고 있었기에, 그것이 다음의 상황을 짐작케 하는 게 아니라 곧 끝임을 알기에 이는 쉽게 말해 거부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중간 중간 그는 자신이 예전에 부인과 이별하고 산 속에 들어가 칩거한 채 작품을 만들던 중 그 삶의 아픔이 이 “개”라는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들게 되었고, 또 이번 공연을 위해 예전 작품을 찍은 비디오를 찾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고 했고…… 그래서 공연은 공연으로서 완결된 형태를 띠기보다 관객과 직접 이야기를 하고, 주요한 몇몇 동작을 보여주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몸을 꺾고 구부리며 개가 되는 과정, 왈왈 짖으면서 마이크에서 점점 멀어지대 소리는 더욱 확장돼 무대를 쩌렁쩌렁 울리는 모습 등, 예전 공연의 일부만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분명 섬뜩한 효과는 그 이하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줄인형-임도완

 임도완의 “줄인형”은 실을 얼굴 여기저기에 꿰는 몸짓에서부터 심술궂은 모습, 잔뜩 위축된 모습, 위세찬 모습의 세 남자를 모두 형상화한다. 한 바퀴 회전하여 옆으로 이동할 때 마다 얼굴 표정이 바뀌는 동시에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인물이 나타나, 이 셋이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일명 ‘삐뚤이’, ‘억울이’, ‘튼튼이’라고 이름이 붙은 이 세 사람은 삐뚤이가 먹을 것을 혼자만 먹자, 억울이가 억울한 표정으로 튼튼이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면서 튼튼이가 위용 있는 모습으로 삐뚤이에게 겁을 주자 셋은 모두 먹을 것을 나눠먹게 되고, 그 이후에 얼굴의 주름이 모두 펴지게 되는 내용으로, 극명하게 다른 얼굴 표정들의 대비, 그리고 그에 딱 알맞은 성격을 지닌 캐릭터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이 놀라웠다.

 유진규 예술감독의 말에 따르자면 이 작품을 초청한 이유는 단 하나, 아직까지 그렇게 얼굴을 심하게 놀리는 사람을 못 봤다는 것인데, 그렇게 몸이 만드는 구체적인 언어가 얼굴 로 확장돼 그 안에서 다양한 지형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밤의 기행-유진규(유진규네 몸짓)

 유진규의 “밤의 기행”은 가만히 움직이는 촛불이 하나의 마임적 세계를 구축한다. 어둠 속에 형체를 가득 담구고, 부채를 안은 채 유진규가 등장한다. 촛불을 바닥에 얹어두면서 부채로 움직임을 전이시키며, 이제 부채를 펼쳐 그 안에 몸을 가리고, 퍼덕거리는 팔의 움직임으로 촛불이 담은 신비한 질서를 이어간다. 부채는 곧 갓난아이가 되고, 갓난아이를 보듬고 젖을 먹이는 여자 앞에 나타난 괴한은 재물을 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자를 죽이고, 아이는 괴한이 한 살림집 앞에 놓고 가고, 아이는 자라, 살인을 하며 괴한의 행태를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부채(칼)로 자신을 찌르고 죽는다.


 끊임없이 쫓고 쫓기는 가운데, 아이를 둘러 싼 죽음의 위협, 그리고 엄마가 됐다 괴한이 됐다 하는 유진규의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의 끊임없는 몸의 변주는 꿈을 걷는 듯한 몽롱함의 노정이기도 한데, 아이의 탄생에서부터 자라,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돌아온 구성은 긴 역사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담아 낸 것으로 보기 이전에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살인의 업이 아이에게 기억의 낙인으로 찍혀, 성장 이후 새로이 그것이 등장해 그의 생을 좌우한다는 것은 너무 끔찍스러운 것 아닌가? 아이가 알 수 없는 자신의 질곡어린 삶, 그리고 뒤늦게 깨달은 살인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는 모두 아이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진행된다. 즉, 운명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이의 삶은 사실 무의식의 자장에 머물고 있었음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보는 이로서는 인과관계가 맞아떨어지는 현실이 아닌 또 하나의 악몽으로 치부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 안에 보이는 아이의 삶은 사실 우리의 역사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아이의 가련한 삶 뒤에는 ‘핏덩어리’를 지키려고 하는 모정, 어떤 연고도 없는 불합리한 폭력에 대한 무방비의 신체, 그 험난한 역사에서 어떻게든 생명의 숨을 이어가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엄마의 삶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초대받은 광대-최규호(극단마임)

 마지막 공연으로 국내 처음으로 피에로가 나와 관객을 웃고 울리는 '클라운마임'을 시작한 최규호의 “초대받은 광대”는 소위 막노동꾼인 사내는 벽돌을 이고, 높은 계단을 올라, 벽돌을 쌓고 바르며 벽을 만드는 과정에 꿈을 꾸고, 무도회장에 가서 실컷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이 재미있게 그려진다.
 이날 가장 많은 웃음을 준 공연이었는데, 모든 행위가 분명하고 사실적이었으며, 이야기 구조가 빈틈없이 탄탄해서 집중력 있게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왼쪽부터) 유홍영, 심철종, 최규호, 유진규, 임도완... 관객에게 '하트를 날리며', 인사하고 있다.

 각기 다른 네 공연은 마임이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마임이스트에 따라 얼마만큼 다양한 색깔을 내며, 다른 몸짓의 언어가 발현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시간이기도 했다. 특별히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 20년 이상의 내공이 길어 올린 몸짓 언어들은 곧 마임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으로서의 씨앗을 또한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20년 전의 씨앗은 또 다른 씨앗으로 열매를 맺었기에, 앞으로 10년, 20년 후의 이들의 또 다른 만남 역시 진부하기보다는 신선할 듯싶다.
 그렇지만 이제 이들이 내린 토양에 새로운 씨앗이 자라나길, 아직 보지 않은 그럼에도, ‘보고 싶은 한국마임’의 세계를 기원해 본다.



 


보충설명

2008축천마임축제 기획공연, "다시보고 싶은 한국마임 1"

5/27(화) 저녁 9시~ 봄내극장
출연자 : 심철종,임도완,유진규,최규호

http://2008.mimefestival.com/2008/

"다시보고 싶은 한국마임 2"
5/28(수) 저녁 9시~ 봄내극장
출연자 : 박미선,강지수,이두성,유홍영,조성진
(참고 글)‘몸짓으로 울고 몸짓에 취하다’
http://www.artzin.co.kr/on/bbs.php?table=etc01&query=view&uid=180&p=1

필자소개

필자 김민관 (mikwa@naver.com)

문화예술 전반에 관심을 두고 현장을 적극적으로 찾고 그에 대한 글을 생산코자 한다. 미학적 접근과 철학적 통찰력, 예술의 사회적인 역할의 제고 등 여러 지점에서 예술을 보는 시선을 확장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