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0. 12:41ㆍ07-08' 인디언밥
- 박성혜
- 조회수 597 / 2008.06.09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작은 무용공연이 있었다. 공연 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어 공연 안내서를 살펴본다. 평소에는 꼼꼼히 보지 않는데, 혼자 온 공연장에 무료함을 달래기에 적당한 거리를 못 찾거나 그나마 아는 체 할 수 있는 얼굴이나마 안보이면 만만한 것이 안내서인지라 공연히 붙들고 있게 된다.
사실 무용 공연 안내서라는 것들의 형태가 제목 붙여 놓고 작품 설명은 추상 명사를 마구 남발해 주시면서 모호하다 못해 그나마 제목에 힌트 얻어 대충이라도 짐작케한 작품의 이해를 더더욱 오리무중으로 유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좀 더 심한 경우에는 작품 설명이랍시고 시 몇 줄 옮겨 놓은 경우도 많다. 춤이 가지고 있는 추상성, 상징성, 모호성 등의 이유가 이런 뜬 구름식 작품 설명의 근거다. 덕분에 얻은 버릇이 공연안내서 보지 않고 그냥 공연보기가 되어 버렸다. 사실 안내서를 보면 작품에 대한 선입감만 생기거나 혹은 더 이해 못하는 미로 속으로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고집에는 춤이 가지고 있는 즉물성을 믿고, 현장에서 얻을 수 있는 생생한 경험과 감각적 충격을 원하기에 정보 없이 객석에 ‘등장’하는 것이다.
공연 <기분전환>의 공연안내서에서는 안무가 임선영의 이력이 눈에 들어온다. 독일 수학, 서울프린지페스티벌로 데뷔, 이후 변방연극제 참여, 그런데 한국에서 대학을 안 나왔다. 국내 무용계가 대학 중심 학연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그런데 안무가는 무용하는 사람이면 의당 거친 대학을 건너 뛴 것이다. 순간 든 생각은 ‘이 친구 한국에서 고생 좀 하겠구나’였다. 그 만큼 국내 관행과 제도가 무겁고 큰 반증에서 온 걱정이자, 기우로 여기면 되겠다.
사실 이런 이력이 특이해서는 안 된다. 어디 출신이라는 것보다 안무가의 작품과 예술적 역량으로만 평가되어야 하는 풍토가 정석인데 우습게도 한국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지를 않다. 작품이 좋으면 더더욱 좋은 무대가 보장되어야하고 예술적 관점과 사고가 같은 사람들끼리 자연스레 모여 무용단원들이 확보되면 그만이다. 그런데 국내에서의 좋은 무대는 대학교수의 추천이나 후광이 따라야 하고 단원 확보는 동문 단체의 무용수 제공이 필수적인 요소라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그런 관행으로 대학 무용과의 권력 구조가 자연스레 확보되고 그 맨 권력의 꼭대기에는 교수가 자리한다. 이런 피라미드 권력 구조들이 저마다의 섬을 이루며 군집해 있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 무용계다. 이러한 분위기에 그 어느 피라미드에도 속하지 않은 무용가가 단체를 만들고 단원을 모아 공연한다는 것은 밖에 있는 자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피라미드 군락 속에서 떠도는 미비한 하나의 점일 뿐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안무가는 제도권과 다소 거리가 먼 프린지 페스티벌과 변방연극제를 통해 데뷔했다. 즉 돌아가는 것이다. 다행히 프린지 페스티벌과 변방연극제는 이런 정치적 제도적 야인들을 반긴다. 주변의 것들과 소외 받은 아웃사이더들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여자의 사회적 위치가 프린지이고 변방이면서 그들이 제시하는 예술적 형식과 내용 역시 기존 메이저와는 다른, 즉 예술정치적입장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도 포함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안무가 임선영을 판단해야 한다.
(사진속 인물_ 안무가 임선영)
임선영이 처해있는 사회적 환경과 상황을 놓고 보면 기존 제도권과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분명 프린지이고 변방이며 아웃사이더이다. 하지만 예술적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프린지와 변방이 ‘기존 예술적 담론과 다른’ 그 무엇이라면 임선영은 성공했다. 즉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과 실험들을 통해서 차별성을 확보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은 듯하다. 작품 <기분전환>에서는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고 낯선 것들을 끄집어내자는 의도는 다소 소박하지만 명확한 자기 원칙과 철학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방식에서는 색다른 면면이 비춰졌기 때문이다.
즉 안무의 자세가 기존 국내 무용가들보다는 자세가 잡혔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그녀가 처해있는 제도적 사회적 입장을 보면 분명 ‘프린지’이고 ‘변방’이다. 하지만 변방과 프린지가 ‘아직은 미완의 걸작’을 꿈꾼다면 안무가 임선영은 가야할 길이 멀다.
아마츄어리즘, 저항, 새로운 제안에서만 머물지 말고 일보 전진하려면 예술적 완성도라는 점도 고민해야 한다. 단순히 그럴듯하고 세련된 외관 꾸미기를 신경 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여 주는 모습은 다소 거칠더라도, 심지어 기량이 조금 못 미친다 해도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이왕 잃을 것이 없는 주변인이라면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분명하게 내지르라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심도 깊은 담론 생산과 그에 따른 과감한 시도가 따라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확신성이 따라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끝임없는 자기 성찰과 치열함이 기본적으로 내제해야 한다. 그럼 이쯤에서 묻겠다.
당신의 작품 <기분전환>은 뜨거웠는가? 갈 길은 알지만 눈치는 보지 않았는지, 친구들과의 정겨운 조우에만 머물지 않았는지(클라리넷이라는 친구들과의 조우가 주제였던 작품 <가족>), 제도권의 진입을 바라는 일명 착한 아이 신드롬에서 과연 자유로운가(너무나도 무난하고 착했던 작품 <이름 불러주기>)를 말이다.
프린지와 변방에서 예술의전당으로의 진입이 무얼 의미하는지를 알고 그에 충분히 대처했는가를 말이다. 같은 무대에 섰던 국내 젊은 안무가들의, 소위 말해 제도권의 안무가들의 세련의 극치로 치장된 무대와의 차별성을 어떻게 담보하고 그들과 다름을 스스로 증명할지를 첨예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국내 대학 무용과를 졸업하지 않은 안무가 임선영은 이미 시회적으로나 제도적으로 프린지이자 변방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그리 나쁘지 않다. 아니, 제도권에 물들어 기존 관행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관성에 젖은 애늙은이 안무가들보다는 훨씬 좋다 못해 유리한 환경일 수도 있다.
젊어서의 고생은 전투력을 향상시킬 수 있고 예술적 생존 위지를 위해 발휘하게 되는 근성은 향후 작가의 든든한 밑바탕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질기게 살아남을 각오하고 ‘무엇을(What)’을 보다는 ‘어떻게(How)'를 고민했으면 한다. 기발하고 시대적 조류에 맞아 떨어지는 주제 선택 못지않게 춤으로, 몸으로 풀어 나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추가된다면 세상은 그대를 잊지 않을 것이다. 하여 그대의 건투를 빈다.
보충설명
Atmen 공간 탐색 시리즈 실내편
기분전환 Sky, Earth and Stars
* 일시 : 2008. 5. 28 Wed - 29 Thu / 오후 7시 30분
* 장소 :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 안무: 임선영, Atmen
* 출연: 임선영 박진원 구나경 하미희 염하랑 외 친구들
* 음악: 한받 (기분전환)
* 연주: 지음 클라리넷 앙상블 (가족)
* 조명디자인: 김철희
* 무대감독 : 최정원
* 무대조감독 : 이종진
* 주최 : Atmen
* 주관 : 서울변방연극제사무국
* 사진제공 : 임태훈(블루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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