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오세혁 작 ‧ 연출, <한 번만 좀 때려볼 수 있다면>에라, 모르겠다. 한 번만 좀 때려보자!

2014. 7. 29. 00:42Review

 

에라, 모르겠다. 한 번만 좀 때려보자!

- 오세혁 작 ‧ 연출, <한 번만 좀 때려볼 수 있다면>

청소년극 페스티벌 ‘B성년’ 中 -

 

글_유햅쌀

 

찌질하고 지독한 사나이들의 세계

연극인 오세혁의 작품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꽉 찬 공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상쾌한 것도, 향기롭거나 청량한 것도 아닙니다. 연극이 끝을 향해 치달아 갈수록 거친 숨을 몰아쉬는 배우들 덕에 공연장은 점점 뜨거워지고, 한편으로는 부산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역동적인, 한 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배우들의 땀 덕에 공연장의 습도는 여름 장마의 그것처럼 점점 높아져만 갑니다. 과장을 아주 조금 보태보자면 눈앞에 뿌옇고 투명한 어떤 습기의 막이 생겨난달까요.

<한 번만 좀 때려볼 수 있다면> 역시 '그' 의 공기로 가득 찬 작품입니다. 40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공연시간에도 불구하고,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소동의 에너지가 대폭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연극이 끝날 무렵 즈음 좁은 공연장의 공간들 사이에는 더위와 습기가 알게 모르게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게다가 이 작품은 거친 수컷 냄새로 가득합니다. 사나이들의 세계, 비정하고 폭력이 난무하고 배신과 편 가르기가 일상인 이 세계가 <한 번만 좀 때려볼 수 있다면>의 무대이자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손끝, 발끝, 옷매무새, 머리카락, 얼굴표정 등등 비정한 세계의 멋을 이루는 부분들을 아무리 살펴봐도 수컷들의 멋있음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나이들은 그저 몹시 찌질하고 지독하며 치사한, 축 늘어난 추리닝을 입은 사나이들이기 때문이죠. 이 세계에서는 ‘나보다 못 나가니까 빼앗고, 나보다 잘 나가니까 복종하는 것’, 오로지 이 규칙만이 작동할 뿐이라서, 이 사나이들은 그야말로 잘 나가고 싶어서 무작정 저지르고 보는 ‘삥뜯기’의 세계를 살아가기 때문에 결코 도발적이거나 멋이 넘쳐흐르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막이 오르면 “한 번만 좀! 한 번만 좀! 한 번만 좀 때려볼 수 있다면―”이라는 가사를 아카펠라로 부르는 배우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중길이 같은 반 친구 동효에게 삥을 뜯기 시작합니다. 무대 위에는 이불 한 채와 선풍기, 밥상, 빨래 건조대, 라디오 같은 오래되고 낡은 지난한 삶의 흔적들이 가전제품이라는 이름으로 놓여 있습니다. 가방을, 교복을, 전자제품을 ‘진정한 친구’ 동효가 모두 다 털어 줄 때 쯤, 학교를 그만두고 집 나간 형 정길이 집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형은 친구 승구에게 쫓기는 신세입니다. 게다가 큰 포부를 품고 집을 나간 것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형이 업소의 ‘찌라시나 돌리고 있었’ 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을 하고 맙니다. 어릴 적 동생 중길을 괴롭히는 놈들을 패 주었던 어린 중길의 히어로 형은 이제 빚을 갚지 못해 쫓기고 자기보다 만만한 사람이나 패고 다니는 양아치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형은 이제 “결국 놀고 싶은데 돈이 없을 뿐”인 그저 그런 사람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제 이 식구들에게는 돈 많은 사람이 가장입니다. 형은 자기가 시달려왔던 장남 콤플렉스를 벗어던지며 혹시나 돈을 빌린 친구가 찾아올까 빨래 건조대 뒤로 숨어버리는 그런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빠는 돈은 없고 사주지도 못하면서 집에는 꼬박꼬박 들어와 술만 먹어!”라고 웃픈 넋두리를 할 만큼, 아버지는 돈이 없어 안주도 사지 못하고 그저 검은 비닐봉지에 소주 한 두병 넣어 휘청휘청 걸어 들어오는 주정뱅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아들 둘에, 아들에게 삥을 뜯기고 아들에게 삥을 뜯는 친구 두 놈을 앉혀 놓고는 ‘술은 어른에게 배우는 것’이라며 되도 않는 주도를 가르치기나 하는 그런 어른입니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명예퇴직을 강요받은 이후에 친구에게 돈을 빌려 빚을 갚지 못하자 집 안의 고약하게 없는 살림을 다 내어줘야 할 처지에 처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집에 빚을 받으러 온 친구 대웅에게 다 가져가라며 아주 의연한 태도와 표정을 지으며 아들들에게 “이제 안 숨어도 된다, 내가 나갈테니까”라고 마지막 선언 같은 것을 합니다. “왜 빨리 안 갚았어”라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아들들 앞에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지난하고 비겁했던 인생을 회고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부모들은 일진 삥을 안 뜯기려 노력한다고, 얼마나 때려보고 싶었는지 아느냐고 자조하면서 “제대로제대로 한 방 날려보고 싶었다”, “너희들이라면 그런 놈들한테 제대로 한 방 날려볼 수 있겠냐?”하고 한탄합니다.

 

 

특히 <한 번만 좀 때려볼 수 있다면>은 이야기를 불우한 청춘의 우화 정도에서 끝내버리거나 지독히도 우울한 이야기쯤으로 그려내지 않고, 이야기를 요절복통의 웃기고 속된 것으로 그려냅니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접해왔던 음악들이 소동의 순간들에 등장해 분위기를 반전시킨다는 것입니다. ‘킬라만자로의 표범’부터 ‘마법의 성’, SBS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곡으로 유명한 이오시프 코프존(Losif Kobzon)의 ‘백학’,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까지, 원곡이 가진 분위기와는 다르게 코미디의 과장된 순간에 쓰이는 통속적인 음악들이 쑥쑥 등장해 관객들을 시종일관 웃기고는 합니다.

이 작품은 소동의 에너지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려가는 작품입니다. 나보다 만만한 놈이 나를 때리고, 내가 나보다 잘나가는 놈을 때리고, 나보다 잘나가는 놈이 더 잘나가는 놈을 때리다가, 다시 만만한 놈을 때리고, 때리고, 때리고, 때리고… 소리치고 또 때리고 화를 내고 때리고…

 

 

우리들의 청소년

작가 오세혁은 작품을 쓰면서 잘 나가고 싶었던 자신의 청소년기를 옮겨 왔다고 말합니다. 괜히 언제나 화가 나 있던 시절, 그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싶었던 시절, 하지만 무언가가 나를 건드린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잊고 싶어서 계속 다른 만만한 누군가를 건드렸던 그 시절의 이야기 말입니다.

실은 ‘청소년’, 이 푸르고 젊은 이름에 대해 어떤 다른 형태로 말해야 한다면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날의 청소년에 대한 시선들은 ‘학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외모 콤플렉스, 학교폭력, 왕따. 미혼모, 원조교제, 흡연, 욕설, 매춘, 그리고 자살로 이어지는 온갖 부조리들은 학교 안에서 발견되어 학교라는 시스템 안에서 매듭지어지고 맙니다. 청소년이라는 시기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과 내부의 시선은 어쩌면 수직적이기도 합니다. 어른들이 바라보는 청소년의 세계, 청소년이 바라보는 또래의 세계 사이에는 커다란 틈새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번만 좀 때려볼 수 있다면>과 청소년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청소년극 페스티벌 ‘B성년’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여기에 참여한 작가들은 자신을 아직 덜 자란 소년으로 정의하고는 작품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소년’ 이라는 대상을 이미 염두에 두고 창작된 모든 작품에서 청소년의 이야기는 줄곧 어른이 바라보는 청소년의 이야기로 바뀌어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기 위해 청소년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조리의 극단을 소재로 택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마는 것 같습니다.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 마냥. 그리고 그런 문제들은 학교라는 거대한 시스템 내부에서 맴맴 돌고 맙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들을 제외하고 무조건 ‘젊음’을 택하게 된다면 청소년을 다룬 모든 작품은 한없이 왜소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만 좀 때려볼 수 있다면>과 다른 청소년극이 어떤 차이를 지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야만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문답은 청소년의 가족과 가족 바깥, 친구와 친구 무리의 바깥,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가? 라는 일종의 관계 맺기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번만 때려볼 수 있다면>은 오로지 청소년 집단의 문제만을 경유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오로지 가족 문제만을 다루지도 않으며, 가족 문제에서 더 나아가 학교, 혹은 청소년이 당면한 시스템의 문제를 사회 전반으로 확장시키려는 노력을 포함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삥뜯기의 먹이사슬

결국, <한 번만 좀 때려볼 수 있다면>은 겁 많고 소심한 동효는 친구인 중길에게 삥을 뜯기고, 중길은 친형 정길에게 뺑을 뜯기며, 형은 자기보다 더 잘나가는 친구 승구에게, 그리고 가족은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또 다른 친구 대웅에게 삥을 뜯기는 ‘삥뜯기의 먹이사슬’이 아주 중요하게 작동하는 하나의 세계입니다.

어쩌면 다작하는 작가이자 연출가인 오세혁이 가진 이렇게 뚜렷하고 명백한 세계관은 일종의 복제 시스템처럼 비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일전의 작품에서도 계속해서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해프닝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발견하는’ 식의 알레고리적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마치 영화 <인셉션> 속 ‘차원의 차원의 차원의 차원…’처럼 구성되어 있거나, 큰 부조리의 세계 안에 산재하는 여러 형태의 다양한 부조리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어서 실은 그의 작품에서 일어나는 모든 해프닝은 우발적인 사건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너무나도 많이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상처 받은 개인들의 굴욕감을 웃음으로 일으켜 세워 다시 기억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만 좀 때려볼 수 있다면>에서도 작가의 인물들의—어쩌면 학습화된— 나보다 더 못한 사람에게 뺏고 나보다 더 잘나가는 사람에게 빼앗기는 상황이나, 예전에 내가 빼앗았던 사람과의 관계가 반전되어 이제는 내가 빼앗겨야만 하는 상황을 통해 이 사회의 부조리를 그려내고는 합니다. 이 사회는 우습지만 돈 많은 사람이 가장이 되고, 돈 때문에 ‘지배적 계급 관계가 바뀌는’ 참으로 비겁한 사회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이 시대 부모님 혹은 가부장에게 바치는 애잔한 전상서의 기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쇄적이고 켜켜이 쌓인 일진들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돈 빌린 친구에게 내어주며 삥을 뜯기는 아버지는 “책상은 남겨둬”, “책상만큼은 내가 지켜주고 싶었다”고 ‘책상을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먼저 때릴 것을, 한 방 날릴 것을, 용기 있게 한 방 날려보지도 못하고 쓰러져가는 자기 자신, 그러니까 어른으로 살아가는 슬픈 세계를 비관하는 것입니다.

다면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해보고 싶습니다. 이 시스템, 그러니까 돈 있는 사람이 가장이 되고 더 나은 사람이 만만한 사람을 지배하는 이 사회의 시스템은 결국 큰 의미에서는 ‘아버지’, ‘가부장’의 큰 울타리에서 작동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이 시스템의 붕괴를 바란다면 가부장의 전복을 꿈꿔야 하는데, 잘 들여다보면 소동을 시작하려고, 모든 먹이사슬을 끊고 ‘때려라!’ 하고 말하는 사람은 결국 아버지입니다. 어쩌면 모두가 때리고 때리면서 수평적인 관계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연극은 결국 다시 이 땅의 어쩔 수 없이 비겁하게 살아온, 모든 굴욕을 감내해 온 모든 부모와 아버지들에 대한 애잔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다시 가부장으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 것 같습니다.

이 삥뜯기 세계의 끝이 무엇인지는 정말 알 수 없습니다. 세계가 완전히 불화와 화해하고 이성을 찾는 순간이 온다면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우리 같은 일진들은 미안한 마음이 드는 순간 끝인데”라고 되뇌이는 순간, 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미안한 마음이 드는 순간이 얼마나 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과연 이 시스템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때린다’는 행위를 통해 시스템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사진출처 1,2,3,4,5 = 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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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_유햅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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